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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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3.03.31 20:22
최근연재일 :
2023.04.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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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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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최고의 생일

DUMMY

그날 저녁.


“넌 왜 굳이 따라오겠다는 거냐?”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술자리 참여라는 건 필수죠. 제가 좀 더 인간다워지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며 어깨를 으쓱하는 형철에게 자야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정한도가 옆에서 거들었다.


“지도 요새 힘들고 하니 술 한잔 하고 싶은 갑지요. 팀장님은 뭐 그런걸 가꼬 따지고 그랍니까. 예쁜 아가씨가 술자리 와주면 감사합니다~ 하면 되지.”


“넌 모델처럼 생겨가지고, 본명도 안드레 한도 셔젤인 놈이 경상도 사투리를 그렇게 쎄게 써대냐. 진짜 들을 때마다 적응이 힘들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는데 우짜겠습니까. 성일이 형도 안 되잖아요.”


“정과장님이야 생긴게 딱 시골 아저씨니 그렇다치고, 넌 혼혈인데다 약간 모델같이 생긴 놈이 그러니까 너무 어색해서 그런다.”


“여자들은 매력있다고 다 좋아하던데.”


“정성일 과장님 사투리 누가 좋아하디? 내가 사투리 팍팍 쓰면 아가씨들이 꺄아~ 오빠 귀여워요~ 하면서 좋아해 주겠냐? 그건 그냥 니 스타일이 여자들한테 좀 먹힐 만해서 그런거야. 사투리랑 상관없다, 빌어먹을 세상.”


“그것도 그릏네요.”


“니가 또 그렇다니까 기분 나쁘다. 그나저나, 정 과장님이 사촌형인 건 전혀 몰랐다. 왜 숨겼냐?”


“숨기다니요?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숨깁니꺼. 아무도 안 물어보던데. 비밀연애하는 것도 아이고. 그런데, 위에서는 왜 우리 셋을 한데 묶어가지고 교육을 하는 겁니까. 팀장님 아는 거 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형철이 답했다.


“전혀. 난 진짜 날벼락같은 명령받고 왔다. 물리학의 물자도 모르는데 가라고 하더라. 승진에 급여인상을 내걸고 가라는데 어쩌냐, 안 가면 짜르겠다고도 하고. 이유를 모르겠다. 자야 넌 아는 거 없냐?”


눈을 크게 뜬 자야가 형철과 한도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저, 저, 저도 자, 잘 모릅니다. 팀 내부의 결정이라 자세한 건 기밀입니다. 최민호 대령님의 명령이 있어야 내, 내부사정을 마, 말할 수 있습니다.”


“야 와이래 말을 더듬노. 곤란하면 마 됐다. 와 우리를 묶어서 팀으로 만들고 친해지라는 건지, 교육을 같이 받으라는 건지는 전혀 몰겠심니다마는, 저도 최대한 빨리 소령 찍어준다 했으니 잘 해보입시다, 우리.”



AI팀의 정성일, 민호연, 비니. 오버플로우 서브팀의 이형철, 정한도, 자야, 이렇게 네 명의 사람과 두 안드로이드가 한도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모였다. 적당히 한가한 다섯과는 달리 자야는 엄청 바쁜 몸이었지만, 술도 못 마시면서 굳이 오겠다고 바득바득 우겨 자리에 오게 됐다.

생일상에 미역국 같은 음식은 당연히 없었다. 배달시킨 피자, 파스타, 치킨과 매점에서 사온 과자들 밖에 없었다. 대신 술은 종류별로 있었다. 맥주와 소주, 호연이 실험실에 짱박아둔 보드카와 형철이 가지고온 샴페인과 레드와인까지.


“자, 고깔모자 쓰고 사진 한방 찍어야지.”


“형, 쫌. 하지마라. 고깔모자 씌우면 상 엎는다이.”


성일이 한도에게 흑역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한도는 단칼에 그 공격을 쳐냈다. 내심 기대하던 호연이 실망하며 말했다.


“와, 여기서 생일파티를 다 해보는군요. 이래도 되나?”


“안될건 또 뭐고. 모여서 마약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실험실 내 음주 금지 규칙 같은 것도 없잖아?”


성일의 말에 형철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그런 규칙이 없는 것 아닐까요.”


“으쨌거나 그런 룰 없으니 그냥 묵자 마. 나가서 술 마시기도 귀찮고. 자야나 비니도 그런 이야기 하고 다닐 아들도 아이고. 그지, 자야?”


“네, 맞습니다. 6월 27일 저녁 7시쯤 AI 실험실에 모여 술을 마신 사실이 있냐고 소장님이 물어보시지 않는 한, 전 입을 다물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성일 과장님.”


“크으, 바라. 야가 이래 센스 있다. 형철이 니보다 세배는 센스가 있을기다.”


호연이 갑자기 성일에게 물었다.


“그러면, 두 분 아버님이 형제인 거에요? 아니다, 정 대위님 아버님이 프랑스분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 그러면 두 분 성이 같은건 어? 왜 이게 헷갈리죠?”


“제가 지금 아버지 성을 안 쓰고 있어서 그런거지요. ‘정’은 어머니 성이지예. 부산에서 나고 자라 사투리도 팍팍 쓰면서 제 이름은 안드레 한도 셔젤입니다, 이러기가 좀 이상해서 그냥 정한도라 소개합니다.”


“복잡할 게 뭐 있노, 한도 어머니가 우리 고모다 이거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식간에 술병이 몇 개나 비워졌다. 술이 약간 오른 성일이 한도에게 물었다.


“야, 니는 현역대위란 놈이 허구헌 날 여자 꽁무니만 쫓아댕기고, 그런 거에 비해 실속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요새 연애는 하나?”


“요새는 맨날 여 쳐박혀 있는데 연애가 되긋나? 지금은 그냥 외로이 썩고 있다.”


“에라이, 인간아. 여 민호연이 어떻노. 맨날 궁상이나 떨고 있는데. 괜찮은 아 인건 내가 보증하께.”


썩은 표정을 하던 호연이 한도에게 물었다.


“내 의향은 안 물어봐요? 정 대위님 몇 살이에요?”


“저 스물아홉입니다.”


“연하네. 잘생긴 연하남, 좋은데.”


“에이, 민박사님 생각 없으시면서.”


“왜 그렇게 생각해요?”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다녀본 프로 사랑꾼인 제가 딱 보기에 말이죠, 민호연 박사님같은 스타일의 여성들은 예외없이 다 절 싫어했슴다. 실속없고 기름지다고 말이지요, 아닙니까?”


왼손 엄지와 중지를 튕겨 소리를 딱 낸 후, 검지를 호연에게 향하며 한도가 확신하듯 말했다.


“정 대위님 프로 사랑꾼은 맞는 것 같네요. 정확한데요.”


“관상만 봐도 대~충 나온다 아임니까.”


웃으며 듣고 있던 자야가 판결을 내렸다.


“0고백 1차임입니다. 최근에 배운 표현입니다. 적절한가요?”


형철도 웃으며 말했다.


“매우 적절하다. 저 녀석은 장교 품위위반 같은 걸로 군법회의에 넘겨야 돼.”


비니를 제외한 다섯은 다 웃었다. 역시 비니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좀 힘들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한 비니는 근래의 일들을 생각하다가 비가 와서 좋았던 것 같은 느낌이 떠올랐다.


“올해는 비가 계속 와서 좋습니다.”


“좋다고 그게? 끈적하고, 빨래는 안 마르고, 이불도 뭔가 척척하고.”


형철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팀장님 이불 상상했다. 으, 싫다. 생각만으로도 뭔가 냄새나네요.”


호연이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뭔가 혐오스러운 것을 보기라도 하는 듯 형철을 바라봤다.


“야, 30대 남자 혼자살면 다 그래. 아씨, 그게 아니고, 나 냄새 안나.”


“안 날 리가. 정환오빠도 아저씨 냄새 났었는데.”


“그놈 그렇게 깔끔 떨어댔는데 냄새가 났다고?”


“났어요. 난 그 냄새 좋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모두의 침묵이 이어졌다. 바로 화제를 전환할까, 그냥 입 닫고 있을까, 그냥 실없는 웃음을 터뜨려볼까 고민하던 형철을 바로 후회하게 만드는 질문을 거푸 들이킨 술로 인해 얼굴이 벌개진 호연이 하고야 말았다.


“그 인간, 내게 왜 그랬을까요? 오늘은 대충이라도 답 좀 해주시죠.”


“낸들 알겠냐, 너 이야기하면 그냥 웃으면서 좋은 소리만 해댔는데.”


“곧 죽을 거라면 죽기 전까지 옆에 있어달라고 말해야 되는거 아니에요?”


“잘...모르겠다.”


“내가 너무 슬퍼할까봐? 내가 혹시 마음 변해서 떠날까봐? 아니면 죽어가는 모습 보이기 싫어서? 아님 전부 다요?”


“그놈 폼생폼사였잖아. 너희 둘 사이 정말 좋았고. 지가 곧 죽는다 말한다고 해서 네가 떠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네가 네 삶도 팽개치고 지 옆에 있는 것도 싫었을 테고, 네가 정환이 옆에서 지치는 모습 보는것도 싫었을 거야. 딱 좋은 상태에서 이별하면 네 좋은 모습만 기억할 수 있었을 거니까, 그걸 바랐나봐. 우리를 만날 때마다 오늘은 여기가 아프네, 어제는 여기가 불편했네, 우리 호연이가 옆에 있었으면 이렇게 해줬을텐데, 저렇게 해줬을텐데, 그딴 소리들 했거든. 횡설수설 했는데, 서로 실망하는 걸 보기 힘들어서 그랬다라고 생각한다. 니가 조금만 이해해 줘라.”


“그러니까, 내 감정이나 사랑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박제된 좋은 모습의 민호연만 남겨뒀다 이 말 아니에요? 왜, 내가 아파서 끙끙 앓는 지 옆에서 도망칠까 고민이나 해댈까봐?”


“너무 갔다 그건. 서로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만 남기고 싶었던가 보다.”


“그게 그거죠. 난 힘들어하고, 울고, 술이나 퍼마시고, 왜 내가 차였을까 아파하며,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궁금해하며 허우적댈 때, 지는 우리 호연이 보고싶다, 내가 사랑해서 보내줬다, 이딴 생각들이나 하면서 실실 웃었다는 거잖아요.”


“나도 그 새끼 이기적이었다 생각해. 그래도 죽은놈이잖아. 니가 조금만 이해해줘라. 마지막엔 너 많이 보고싶어했어.”


“그때라도 불렀어야죠! 그 마지막 순간에라도! 지가 싫다해도 친구들이라도, 당신이라도 날 불렀어야지! 어떻게, 어떻게!”


술에 취한 호연이 먹다 남은 피자를 형철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깜짝 놀란 성일과 한도가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날아간 후였다.


“미안, 미안해요. 제가 갑자기 왜 이러죠. 전 먼저 좀 일어날게요.”


자리의 다른 사람들에게 사과한 호연이 비틀비틀 일어나 자리를 뜨려했다. 형철이 호연에게 말했다.


“미안, 호연아.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가 잠깐 미쳤나봐요. 미안해요, 형철씨.”


호연은 슬픈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나가버렸다. 형철은 토마토 소스와 치즈를 닦고 있었고, 비니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성일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한숨과 함께 소주를 한잔 마셨다. 좌우를 둘러보던 자야가 무감정한 눈으로 입만 빙긋 웃으며, 그래도 어투는 최대한 상냥하게 한도에게 말했다.


“정한도 대위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고오맙다, 자야. 최고의 생일이네.”



분위기 싸해진 후에도 무신경의 세 사나이들, 성일, 형철, 한도 셋은 끄덕없이 남은 음식과 술들을 먹고 마셔 없앴다. 결국 형철이 떡이 된 한도를 들쳐업고 돌아갔다. 자야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 감자칩은 몇 개 집어먹었다 -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같이 돌아갔다.


“민호연 박사님은 왜 그렇게 화를 내신 건가요?”


뒷정리를 하던 비니가 성일에게 물었다.


“화가 날 만한 상황이기는 한데, 니한테 딱 설명하기는 힘드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미안함, 그걸 지한테 숨겼다는 원통함 뭐 그런게 섞여서 그런거지.”


“그럼, 그 정환이라는 분은 왜 민 박사님에게 자신이 죽는 걸 숨긴거죠? 죽어간다면 가족이나 연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닙니까?”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합리적인 동물이 아이다. 내가 그 사람 심정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호연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일수도 있고,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결국 알게되면 민 박사님처럼 슬퍼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 니 말이 맞다. 인간의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지 않겠나. 사실은 그게 제일 컸지 싶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날 버리지 않을거라는 확신, 그 확신과 믿음을 실제로 검증해 보고 싶지 않은 거였겠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프고 힘들 때, 죽어갈 때, 상대가 날 혹시나 버릴까봐, 마음이 변할까봐 무서운 거야. 그러지 않더라도 지친 모습이나 불행한 모습으로 날 실망시킬까봐. 그런걸 알고 싶지 않은거지. 그래서 연인을 떠나보내고 우리 사이는 영원히 아름답게 남기고 싶은....그런 심정인 거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건 정말 알기 힘든 거군요.”


“니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래. 대개의 경우 한없이 이기적이지. 연애라는 게 서로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거지만, 정말 그래? 서로에게 정말 그렇게 이타적인 관계일까? 대개는 안 그래."


"그래서 정성일 과장님이 연애를 안 하시는 거군요!"


이에 정성일은 한번도 비니에게 하지 않았던 욕을 하고야 말았다.


"이 개쉐키가."


"과장님, 제가 또 뭘 잘못한 건가요?"


"아니, 니가 무슨 잘못이 있겠노, 다 내 잘못이다. 이 쉐키야."


세상 여자들이 다 원망스러운 정성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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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23.04.17 15 0 14쪽
10 9. 돌이킬 수 없는 23.04.14 15 0 18쪽
9 8. 세상의 전부 23.04.12 17 0 14쪽
8 7. 악의(惡意) 23.04.10 14 0 14쪽
» 6. 최고의 생일 23.04.07 19 0 13쪽
6 5. 노랑할미새 23.04.05 16 0 13쪽
5 4. 비라도 오지 않을까 23.04.03 17 0 13쪽
4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23.03.31 21 0 15쪽
3 2.오르페우스 23.03.31 25 0 17쪽
2 1.호연,비니 23.03.31 41 0 14쪽
1 0.천둥소리 23.03.31 80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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