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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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3.03.31 20:22
최근연재일 :
2023.04.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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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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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DUMMY

열흘 후, 오버플로우 4차 실험.



핵심 연구진만 모인 상태였다. 형철을 포함한 서브 팀들은 4차 실험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사실은 참여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배제시킨 것이었다. 아직 실험이 충분히 안전하지 못했고, 결과 여부에 따라 뎦어버려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부산하게 움직이며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오버플로우 기기 옆에서 멍하니 서 있던 비니가 자야에게 물었다.


“자야 씨, 혹시 민호연 박사님은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바쁘게 움직이며 무심하게 자야가 답했다.


“지금 휴직 중이십니다. 연구소 전체에 출입금지 되셨구요.”


“혹시 한번 볼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곧 실험 시작인데 불가능하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민호연 박사님은 근처에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냥 한번만, 한번만 보고 싶습니다.”


애처롭게 부탁하는 비니의 눈이 젖기 시작했다. 자야도 눈을 보고 놀랐다. 자신도 인위적으로만, 기계적으로만 흘려본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야는 최 대령을 불렀다.


“최민호 대령님, KnMq-06, 비니가 눈물을 흘립니다. 충분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한번 살펴 주십시오.”


“자야, 그거 참 신기하구나. 안타깝긴 한데, 우린 지금 바로 실험에 들어가야해. 비니는 출발해야 하고. 안전하게 돌아오면 그때 자세히 살펴보자 알았지? 지금은 변동없이 진행하자. KnMq-1184,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최대령이 등을 돌려 걸어가며 외쳤다.


“좌우 공간 충분히 확보해! 돌아올 때 위치는 바뀔 수 있다. 4~5m 차이 날 수 도 있다고!”


자야가 비니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어쩔 수 없습니다. 혹시 민호연 박사님께 남길 게 있나요? 실험과 관련된 이야기만 아니면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



2108년 3월. 연구센터 입구 별관 면회소.


“한달만이네요. 두 사람 다 잘 지냈죠?”


“우리야 뭐, 별일 없었지. 물리학을 잘 모르는 나야 잔심부름이나 하며 시간 죽이고 있고, 자야 얘는 정신 없이 바쁘고. 진짜 이럴 거면 왜 날 여기다 쳐박아뒀는지 모르겠다 정말.”


슬쩍 형철의 눈치를 보던 자야가 호연에게 물었다.


“민호연 박사님은 잘 지내시나요? 실험실 복귀는 언제쯤 하실겁니까?”


“복귀 안할거야. 퇴직신청했어. 내가 별 대단한 연구를 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게으른데다 문제도 일으켰으니 곧 수리되겠지. 별 미련도 없어.”


“비니씨 일은 유감입니다.”


“그럴 거 같다 생각했어. 1, 2차 실험 후에는 그렇게 떠들어대더니 이후 실험은 아무런 발표도 이야기도 없으니 문제가 계속 있나보다 생각은 했지.”


이야기를 듣던 형철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이렇게 꽁꽁 숨겨놓는 거야? 비니 녀석은 바로 점검센터로 보냈다가 회사로 반납시켰다고 하고. 대부분의 연구진들은 비니를 보지도 못했어. 그렇게까지 숨길 일인가.”


“죄송합니다. 특급기밀입니다.”


정색을 하는 자야를 보고 더 이상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야기해 줄 리도 만무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호연이 말했다.


“그래, 행패부리고 짤린 일개 연구원을 왜 부르셨나요?”


“KnMq-06 비니가 민호연 박사님께 좀 전해 달라고 한 게 있습니다. 제가 녹음을 해왔으니 들려드릴까요?”


“아냐, 그냥 전해듣고 싶다. 자야, 네가 말해줘.”


“알겠습니다.


鳴る神の / 少し響みて / 降らずとも / 吾は留まらむ / 妹し留めば 


천둥소리만 / 희미하게 들려오고 /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 난 머무를 겁니다 /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이 구절을 말했습니다. 일본 고전 단가 아닌가요?”


“맞아. 그래, 고맙다. 다른 건 없었니?”


“그 뒤에, ‘외우고 계신 걸 보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제가 남긴 것 중에 하나라도 좋아하게 된 게 있어서.’ 라고 말했습니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민호연이 물었다.


“그걸 비니가 알고 있더라고?”


“네. 마지막 순간에라도 이전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다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전 버전의 비니 기억까지 다 돌아왔다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두 기억이 다 있을 수...도 있는건가.”


“이론상으론 가능합니다. 아직 그런 사례가 보고된 적은 없습니다만. 비니씨 마지막 말 녹음파일 아직 남아있습니다. 보내드릴까요?”


“아니야, 고마워. 지워버려, 그건.”


“아, 그리고 노랑할미새라고 했습니다.”


“뭐가? 노랑할미새?”


“네. 민호연 박사님이 크게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아시면 좋아하실 것 같다고 말하면서 노랑할미새라고 했습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 그랬구나. 암튼 여러 가지로 고맙다, 자야. 다른 건 없지? 그럼 난 이만.”


더 이상 이야기하기 힘든 듯 급작스럽게 작별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서너걸음 걷던 호연이 슬며시 쪼그려 앉았다. 어깨를 살짝 앞으로 웅크린 그녀는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웅얼거림과 비명같은 울음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민호연 박....”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하려 옆으로 가던 자야의 팔을 뒤에서 누군가 붙잡았다. 형철이었다. 별말 없이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인 형철은 그대로 자야를 데리고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형철을 보던 자야가 말했다.


“팀장님이 맞는 판단을 하신 것 같네요. 민호연 박사님은 지금 혼자 계시는 게 좋겠군요.”


“그래, 띨띨아. 잠시만 우리가 이 문 앞을 좀 지키고 있자.”


“누가 억지로 들어가려 하면 어떻게 하나요?”


“내가 마빡을 한 대씩 까서 골로 보낼게. 나 싸움 잘하잖아.”


양 주먹을 턱 쪽으로 가져가며 파이팅 포즈를 취한 형철에게 자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WFC(World Fighting Championship)에선 승 하나도 없이 2패만 하셨나요?”


“좀 닥쳐줄래.”


"팀장님"


"응?"


"격투기 좀 가르쳐 줄 수 있나요?"


"너 사람을 못 패게 되어있지 않나?"


"네. 그럴 수 없죠."


"그럼 배워서 어따 쓰게?"


"어딘가에 쓸 일 있겠죠. 김채은 과장님 같은 사람의 안드로이드를 때려줄 수도 있고."


"말 같은 소릴 해라. 몸은 새털같이 가벼워가지고. 니가 치면 아프기나 하겠냐."


형철의 오른팔에 살짝 매달리듯 체중을 실은 자야가 생긋 웃으며 다시 부탁했다.


"그래도 좀 가르쳐주세요.“


팔에 느껴지는 자야 가슴의 감촉에 형철이 흠칫 놀라 팔을 움츠리며 말했다.


"그, 그래, 이번 실험 끝나고 시간 좀 나면 가르쳐줄게."


“고마워요. 팀장님은 22세기가 아니라 2세기쯤 태어나셨으면 행복하게 사셨을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2109년 6월. 서울 시내 칵테일 바.


한 중년 남성이 카운터 자리에 앉아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국방부의 시공간 위상변화기 실험, 일명 오버플로우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세 건으로 알려졌던 국방부 발표와는 달리, 실험은 실제 일곱 건 혹은 그 이상 실행되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세 명의 연구진과 다섯 기의 안드로이드가 여러 차례의 실험으로 인해 실종되는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검, 경 합동수사본부는 실험책임자였던 최민호 육군 대령과 군 수뇌부를 상대로 수사를 해왔고 그간의 불법 행위와 큰 위험성을 무릅쓰고 실험을 강행한 데 대한 경위를 조사해 왔습니다. 그간의 조직적 은폐로 이 위험천만한 연구는 세상에 숨겨져 왔지만, 작년 5월, 이형철, 정한도 두 명의 연구진과 안드로이드 한 기가 참여한 실험에서 그들이 모두 실종되고 수원실험센터가 대파되는 사고가 일어나며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게.......]


잿빛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옆에 앉은 배가 좀 나온데다 머리가 벗겨질락말락한 그 아저씨를 향해 말을 했다.


“아저씨, 뭐 재미도 없는 뉴스를 보고 궁상을 떨고 있어요. 혼자 왔어요? 심심해 보이네요. 예쁜 아가씨하고 오늘 비밀 연애 한번 해 볼래요?”


“예쁜 아가씨가 내같은 아저씨하고 연애를 해 준다꼬요? 그럴 리가 음는데.”


“그러니까 비밀 연애죠. 어때요? 오늘 한 번 놀아볼래요?”


“그르까예? 그런데 예쁜 아가씨는 어딨능교?”


“어머~ 아저씨 안경 새로 맞추셔야겠네. 아니면 벗겨진 머리에 빛이 반사되서 눈이 잘 안 보이시나?”


“천만 탈모인을 싸그리 적으로 돌리는 소리 하지 말고 앉아라, 호연아.”


“니에. 얼마만이죠, 정과장님?”


“우리 얼굴 본 건 1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더 예뻐졌다이? 염색도 파격적으로 하고. 요새 팔자가 좀 피는갑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미친 듯이 뛰어댕기는 시간강사가 팔자 피긴 뭐가요. 아시잖아요? 시간강사야 보따리장수인 거. 힘들어 죽겠는데, 뭔 소리에요.”


“우리는 더 힘들다. 예산 줄고, 인력도 줄고. 관리감독도 빡쎄지고.”


“작년 그 세 사람 실종사건 이후로?”


“그렇지 뭐. 보통일이었나 그게. 처음도 아니었다는 게 더 충격적인 거 아이가.”


“보도된 거 말고도 더 있었나요, 문제가?”


“보도가 어디까지 된 건지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형철이 팀 사라진거 말고도 조원후하고 키나, 그 외에도 더 있다. 강수민 건강에 문제 생긴거 하고 오크 기능손상된 거, 그리고......비니가 사라진 것도 다.”


우울한 표정으로 호연이 성일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걸까요?”


고개를 돌려 호연을 잠시 바라본 성일이 말했다.


“아무도 모르지. 에너지 파장에 휩쓸려서 그냥 소멸한 건지, 아님 과거에 남겨져버린 건지, 다른 시간선으로 가버린 건지.”


“조사는 하고 있나요?”


“제한적으로 하고는 있는데, 여론이 너무 안 좋아져가꼬 덮기 급급한 분위기다. 사실 알아내기도 힘들고. 시간선을 이동한다는 게 인간이 손댈수 있는 게 아이겠지. 애초에 최민호 대령이 오바를 한 기라. 성과를 내는 데에 압박을 너무 많이 받았능가보더라고.”


“우리는 그런 미친 실험이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그러게. 그걸로 뭘 어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대화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니는 어떻노? 좀... 괜찮았나?”


“뭐가요?”


“이것저것 다. 최근 2, 3년 힘든 일 밖에 없었다이가. 정환씨 문제나, 비니 일도 그렇고.”


씁쓸하게 웃던 호연이 자신의 볼을 툭툭 치며 말했다.


“평생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살 줄 알았는데, 이젠 좀 괜찮아요. 의외죠?”


“의외기는. 닌 좀 씩씩한 편이라 금방 털고 일어설 줄 알고 있었다. 혹시 연애라도 좀 하나?”


“어우, 연애는 무슨. 남자놈들 지긋지긋해요. 당분간은 연애의 연자도 꺼내기 싫어요.”


“비니....이야기 해도 개안나?”


“안 될거 뭐 있나요. 내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사실 좀 궁금했다. 뭔 썸이 있기는 했나?”


“어디까지를 썸이라 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네요. 둘 다 사람과 연애를 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어요. 첫 번째 비니는 소년 같았죠. 순수하고, 세심하고, 문학도 좋아하고. 10대 소녀가 된 기분으로 같이 시간 많이 보냈어요. 뭐랄까...”


“10대 커스텀 연애 시뮬레이션?”


“그건 너무 갔다. 하지만,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두번째 비니도 그랬나?”


“두번째 비니는 더 어렸어요. 아시잖아요? 아기 같았던 거.”


“내야 잘 알지. 연구소 인간들이 쑥덕거리기도 했지만, 내 눈엔 모자관계로밖에 안 보였거덩.”


호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막내동생 같기도 하고, 아직 가져보지도 못한 아들 같기도 했죠. 그 녀석 마지막 인사 정도는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과거나 미래로 가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순진한 놈이 낯선 곳에 가서 잘 지내고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럴 거라고 믿어보자.”


주거니 받거니 몇잔 더 마시며 잡담을 한 후, 데낄라를 한잔 죽 들이키며 성일이 말을 이었다.


“저, 저기, 모아둔 돈도 좀 있고, 집이 좀 자, 잘 살기도 하고, 나름 성격도 개안코, 음......그런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한데, 니 생각은 어떻노?”


“예? 뭐가요?”


“아니, 그런 남자가 하나 있거든.”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호연이 말했다.


“돈자랑하고 성격 괜찮다는거 보니 못생겼나 보네요. 나이도 많은거 같고. 나보다 한 일곱 살 정도 많을 것 같네. 배도 나오고 머리털도 좀 사라져가고 그죠?”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잘생겼다 말은 몬하지.”


“됐어요. 이 와중에 남자는 무슨.”


“그렇지? 그렇겠지 역시? 하하.”


“쉰소리 그만하고 가요. 많이 마셨다.”


“그래, 그래 가자.”


“여긴 제가 계산할게요.”


“으응, 가자.”


계산대 앞에서 술값을 계산하고 서 있던 호연이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성일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어림없는 중거리슛이나 하지 말고, 골대 쪽으로 짧은 패스나 드리블을 좀 해 봐요.”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멍청이들만.....술 한잔 더 하러 가자는 이야기에요.”


“오야오야, 가자. 2차는 내가 살게. 혹시 먹고 싶은 거 있나?”


“매운거랑 소주 한잔 어때요?”


“나야 좋지, 요 근처에 맛집 안다.!”


두 사람은 홀로그램과 네온사인, 사람과 안드로이드로 가득찬 서울의 밤거리를 술에 취한 채 사이좋게 걸어갔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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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23.04.17 15 0 14쪽
10 9. 돌이킬 수 없는 23.04.14 15 0 18쪽
9 8. 세상의 전부 23.04.12 17 0 14쪽
8 7. 악의(惡意) 23.04.10 14 0 14쪽
7 6. 최고의 생일 23.04.07 18 0 13쪽
6 5. 노랑할미새 23.04.05 15 0 13쪽
5 4. 비라도 오지 않을까 23.04.03 16 0 13쪽
4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23.03.31 21 0 15쪽
3 2.오르페우스 23.03.31 24 0 17쪽
2 1.호연,비니 23.03.31 40 0 14쪽
1 0.천둥소리 23.03.31 80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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