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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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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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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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천인의 기억법

DUMMY

바람이 사르락거리며 부드럽게 지나갔다.

상생농장은 맑은 하늘빛 아래 아늑한 초원이었다. 농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바람은 더욱 싱그럽고 향기로웠다.


사빈은 농장이 시작되는 어귀에 앉았다.

꽃밭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녀는 꽃잎은 보지 않고 초점 없이 눈만 깜빡였다.


‘바나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한얼은 뭘 알고 싶은 걸까?’

바나에게 말해봐야 자신이 물어봤다는 것까지 그대로 전할 테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논티가 휘적휘적 풀잎을 헤치고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 바나도 깡총거리며 뛰어왔다.

“마고님, 위화님도 오셨어유. 다로즙 드시러 오시래유.”


바나는 땅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렸다.

“왈, 주인님. 여기 너무 좋아라. 냄새도 좋고, 기운도 좋아라.”


사빈은 바나를 흘끗 보고는 말없이 일어났다.

논티 옆으로 다가서자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사빈을 바라보았다.


“저 한얼 인도자님 봤어유. 소문 그대로더구먼유. 잘 생기고, 기운도 넘치고.”

“한얼님을? 어디서?”


“여기 왔었어유. 상생농장이 궁금해서 왔다고 하셨슈.”

논티는 즐거운지 어깨를 쫙 펴고 가볍게 걸었다.


“마고님, 애기별꽃 보러 오신 거면 저 짝으로 가야 허는디.”

논티가 손을 뻗어 반다강가를 가리켰다.


“아니, 오늘은 순백초 때문에 왔어.”

“아, 순백초. 그거이···. 이번에도 실패라고 구추님이 슬퍼하셨어유. 아무래도 북방흑천에서만 자라는 것 같다고유.”

“그래? 아무래도 천사국에 부탁해야 하나 보다.”


바나는 사빈을 따르던 걸음을 멈추었다.

“왈, 주인님. 전 농장을 탐색하겠어라.”


“히야,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냐? 고것 참 맹랑허네.”

논티가 머리를 쓰다듬자 바나는 눈을 곱게 감았다.


“놀고 싶다는 말이야. 바나, 너무 멀리 가지 마. 조금 있다가 돌아가야 하니까.”

“왕, 걱정 붙들어 매시어라.”

바나는 곧장 풀숲 사이로 뛰어들었다.


나비를 쫓으며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생김새는 강아지가 되었는데, 하는 짓을 보면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빈아, 너도 왔구나.”

위화는 주름진 눈을 비비고는 사빈에게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반갑다.”

구추는 느릿느릿 움직이며 위화와 사빈에게 다로즙을 한 잔씩 건넸다.


“순백초는 잘 안되었나요?”

“음.”

“할 수 없죠. 북방흑천에서는 잘 자라니까요. 구추님, 혹시 여기 산뫼랑 용발도 있나요?”


구추는 눈을 꿈뻑거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있지만. 비실거려. 금방 시들어.”

그는 다로즙을 한 모금 삼켰다.


사빈은 불천수 대나무숲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윤이 라온향을 배합하며 전해준 비결이었다.

‘산뫼랑 용발은 인간세의 신성한 땅에서 자라는 것이 가장 약효가 좋아요.’


‘아무래도 인간세로 가야 하나? 아니면, 씨앗 색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

사빈은 다로즙을 마시지 않고 잔만 만지작거렸다.


위화가 사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무슨 고민 있니?”

“예? 고민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큰 걱정도 새로운 고민이 나타나면 힘을 잃지. 마음에 담아 둘 필요 없단다.”

위화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사빈의 손을 잡았다. 손등의 주름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억도 필요한 것만 남으니까 좋구나.”

“금방 잊는다. 진짜 소중한 것은 영원히 남지···.”

구추도 으흠 목으로 소리를 냈다.


천계에서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필요한 것만 남고, 다른 기억은 의식 깊이 잠든다.

수만 년을 사는 천인들이니 너무 많은 기억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데 방해만 된다.


사빈도 인간세의 일을 금방 잊어버렸다.

그믐의 외출에서 돌아오면 많은 부분이 기억 아래로 숨어든다. 다시 만나면 잠든 기억이 깨어나니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인간세에서 보고 들은 일을 모두 기억한다면 다시는 인간세에 나가지 못할 것이다.


천계의 대기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니. 모든 것이 평화롭고 모든 것이 느긋하다. 고민은 어느새 사라지고 눈앞의 일만 보게 한다.


그믐 외출마다 인간세에 가지 않는다면 몰랐을 것이다.

천계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지, 걱정과 고민은 소금이 물에 녹듯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는 것도.


‘그래도 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어.’

사빈은 주먹을 꼭 쥐었다.


위화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백하랑 반다강에 갔다 왔니?”

“대감이랑요? 아니오. 반다강에는 왜요?”


“아효, 그렇게 얘기했는데, 잊었나 보네. 됐다. 그러면 가시버시날 말하려나?”

위화는 싱글거리며 사빈의 얼굴을 살폈다.


“아, 한얼이던가? 새 인도자도 마음숲에 관심이 많더구나.”

“한얼을 보셨어요?”


“그럼. 모로매 소상각 근처에서 봤는데, 옥지도 봤다더구나. 한긋장벽과 바래강이 맞닿은 어디쯤이라고 했는데···. 아니지, 바래강과 새놀산이 맞닿는 데라고 그랬나?”

위화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로즙으로 목을 축였다.


‘대체 뭘 하는 거지? 뭘 찾고 있나?’

바나를 안고 있던 한얼이 생각났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결계를 쳤었지.

‘확실히 이상해. 다른 인도자와는 달라.’


인도자들은 혼을 데리고 마중길로 들어오면 잠시 쉬면서 다음 일정을 기다린다. 안내소 나도마중에서 나머지 일을 맡으니 인도자가 따라다닐 이유도 없었다.


나도마중의 도우미들이 공명법을 알려주고 혼알방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면 거기서부터 혼은 마음숲 어디든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다.


대취와 산여 역시 다른 인도자와 비슷했다.


돌봄차사 초연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대취는 듣기를 좋아했다. 두 천인은 주로 아날빛숨에 있지만, 가끔 반다강의 폭포나 대명천의 푸른호수를 보러 가기도 한다.


위즐증가의 돌봄차사 다담과 산여도 마찬가지였다. 다담은 말이 없어도 얼굴에 하고 싶은 말이 다 드러났다.


그들은 복잡한 혼알방보다 산과 강을 좋아했다. 대명천 붉은바다도 그들이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한얼은···.’

사빈은 답답한 마음으로 다로즙을 홀짝거렸다.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한긋장벽조차 낮게 가라앉아 지평선의 구름도 낮게 깔렸다.


사빈은 아날빛숨으로 걸어가면서 주위의 혼알방을 돌아보았다.

‘운와님도 한얼을 봤다고 했는데?’


그날은 장터 열림날을 준비하던 때였다. 샛강의 구름다리를 둘러보다가 상산대원 운와와 마주쳤다.


‘한얼이 새로 온 인도자지? 호기심이 많던데? 혼알방을 처음 보니 그럴 만도 하지.’

‘혼알방을 돌아다녀요?’


‘처음 오면 다들 그래. 그러다 금방 시들해져. 천계야 어디 가나 빤하잖아. 바뀌는 것도 없어. 태초부터 지금까지.’


운와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아니, 미틈오름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사빈은 아날빛숨 문 앞에 서서 구 층 높이의 찻집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마음숲이 궁금해서일까?”


마음숲은 대명천의 일부라도 아주 넓은 땅이다. 인간세의 걸음으로 따지면 바래강에서 반다강까지 가로지르는 데 한 달 넘게 걸릴 것이다.


중천을 안내해달라고 했을 때, 한얼이 한 말이 생각났다.

‘제가 중앙황천에 온 것은, 인도자 때문만은 아니거든요.’

그럼 무엇 때문일까?


아날빛숨에서는 운와와 차미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빈이 들어서자 운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사빈님, 날도 좋은데 왜 혼자요?”

“그래. 오늘은 한긋장벽도 여유로와. 바람도 살랑이고.”


사빈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차미가 어깨를 기울였다.

“이번 그믐에는 어떠셨나? 궁금하네?”


“천사 가온을 만났어요. 차원의 문지기로 있던데요?”

사빈은 미리 숨을 들이마셨다. 그믐의 일이라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다.


“차원의 문지기?”

운와가 외쳤다.

“어? 하륜 선위가 차원의 문지기라고 했는데?”


“둘이 같이 있어요. 보기 좋더라고요.”

“우와, 천사와 선사가 같이 있다니 합이 잘 맞네!”

차미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대감이 들으면 부러워하겠군.”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운와와 차미가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도 같이 지내고 싶은 이가 있는데···.”

운와가 중얼거리자 차미는 말없이 사빈에게 눈짓을 보냈다.


용희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걷느라 찻주전자와 찻잔이 쟁반 위에서 달그락거렸다.

“마고님은 그렇게 해서는 절대 못 알아들어요.”


용희는 사빈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정말 모르세요? 상산대감님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용희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맑고 푸른 물이 또르르 소리를 내며 찻잔 속으로 내려앉았다.


사빈은 눈을 내리뜨고 찻잔만 바라보았다. 차미의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더욱 난처했다.

‘용희도 알아? 난 정말 모르겠는데···.’


사빈은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대감이야 늘 마음숲을 위해 애쓰시죠. 마음숲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신 거죠. 아하하.”


운와와 차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용희도 콧바람을 내뿜고는 혀를 찼다.


사빈은 용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용희, 너 대감을 연모하잖아?”


용희는 상산대감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다.


나도마중에서 아날빛숨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상생농장에 다녀오는 길에 보니 반다강 물결이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였다고 했다.


반다강은 바래강보다 생명력이 강한 만큼 기운을 빨아들이는 힘도 강했다. 그만큼 아름답다. 용희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강가를 걸었다.


갑자기 한긋장벽이 바람을 내뿜었고 강물이 용솟음쳤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백하가 구해주었다.


씻김을 다 끝낸 혼이라면 소멸하지 않지만, 도우미 혼은 달랐다. 소멸까지는 아니라도 산산이 조각났을 것이다.


용희가 씩씩거렸다.

“당연하죠. 생명의 은인인데. 그래도 그거랑 이거랑 다르죠.”

“응? 그건 뭐고, 이건 뭔데?”


사빈이 못 알아듣고 얼버무리자 차미는 푹푹 한숨을 쉬며 찻잔을 들었다.


그때, 아날빛숨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한가하게 차나 마실 때가 아니여.”

부루가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그는 운와 앞에 놓인 물을 한입에 마시고는 빈 잔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탕 소리가 나며 탁자가 조금 흔들렸다.


“아나진이 방을 못 찾았구먼. 이틀째 흔적이 없어.”

“아나진이 또?”

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미가 사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럼, 얘기는 나중에.”


사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나진은 공명이 제일 약하잖아?’


그 혼은 벌써 여러 번 방을 못 찾아 헤맸었다. 발견된 곳도 여러 군데였다.


사빈도 빠르게 문을 나섰다.

‘이번에는 어디로 갔을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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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5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4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5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6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6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7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3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7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6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4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6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7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7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8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50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54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4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2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6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7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7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64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60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60 2 12쪽
»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2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6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71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7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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