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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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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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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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DUMMY

작은 회오리들이 사빈을 에워쌌다. 회오리 정찰병도 마고의 기운을 아는지 가까이 오지 않고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사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단가람이 빠져나갈 시간을 줘야 해. 그 걸음으로는 아직 장벽을 못 넘었을 거야.’


그녀는 백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아나진을 찾으러 왔어요. 대감도 찾고 계시지요?”


“침입자가 있다는 소식이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백하의 시선이 사빈의 머리부터 발끝으로 움직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사빈도 자신의 치마와 저고리를 내려다보았다.

걸어서 산을 오르느라 나뭇가지와 돌멩이에 스쳤지만, 찢어지지는 않았다.


허리띠와 저고리의 앞섶까지는 봐줄 만했는데, 신발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쪼그려 앉았다 일어선 터라 치마는 심하게 구겨지고 치맛단에는 흙이 잔뜩 묻었다.


백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작은 회오리들에게 손짓했다. 회오리 정찰병들이 다시 달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빈은 달해산의 북쪽 끝까지 거리를 계산해보았다.

‘안돼. 회오리를 멈춰야 해. 대감의 시선을 돌려야 해.’


단가람이 지름길을 안다고 해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무언가 얼음대감의 신경을 돌릴 화제가 필요했다.


“저기, 대감!”

사빈은 다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고백할 것이 있어요.”


‘고백이라니···.’

백하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하얀 얼굴에 분홍빛 물이 든 것 같았다.


“무슨 일이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손을 내리자 능선을 따라 움직이던 회오리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 뭐라고 말하지?’

사빈은 망설이다가 오른쪽 소매를 걷었다.


손목을 감았던 얇은 수건을 풀자 어리화 무늬가 드러났다. 이제는 붉은색이 짙어졌다.

꽃잎은 핏빛처럼 붉어지고 청록색 줄기마저 어두워졌다.


“어리화가 피었어요. 마고가 바뀔 때가 된 것이지요.”

그녀는 백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발그레하던 그의 뺨이 이내 창백해졌다.

백하는 말없이 어리화 무늬를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돌았다.


‘어리화가 벌써···?’

가슴이 먹먹했다.

‘왜! 어째서?’


백하는 어리화에서 사빈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느 때처럼 작고 여린 사빈이 거기 서 있었다.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그는 하얀 바위가 된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들 주위에 서있던 작은 회오리들이 제자리에서 맴돌다 점차 엷어지더니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한긋장벽에서 불어오는 소리도 잦아들고 산새들도 울음을 멈추었다.


사빈은 멀리 한긋장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지금쯤 단가람이 빠져나갔을 거야. 가서 구멍을 막아야지.’


“저는 그럼···.”

사빈은 장벽을 가리키며 돌아섰다. 백하를 다시 보니 그의 얼굴이 다시 발그레해졌다.


백하는 사빈의 손을 덥석 잡고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이제 자유로이 다닐 수 있소!”

그는 활짝 웃으며 사빈을 보았다.


상산대감이 그토록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예?”


“마고에서 벗어나면 자유가 되지 않소?”

“그···, 그렇죠. 그보다 아직 다음 마고를 못 찾았어요.”

사빈은 조심스럽게 손을 빼냈다.


백하는 부드러운 눈길로 사빈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사빈은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마음숲에 묶여있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어디라도···. 나와 함께.’

백하의 표정이 점점 바뀌었다.


눈썹이 내려오고, 입꼬리가 올라가자 사빈은 불안해졌다. 늘 무표정이던 상산대감이라 웃는 표정조차 무언의 협박처럼 보였다.


사빈은 수건으로 다시 손목을 묶었다.

“공방 선생님들도 알고 계세요. 위화님과 목예님은 얼마 전에 땅이 흔들렸다고 했어요.”


“나도 느꼈소. 어리화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백하는 산 아래 벌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벌판에서 지평선으로, 하늘로 이어졌다.


“다음 마고를 빨리 찾지 못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귀물씨앗이 들어온 것도, 피천귀가 들어오는 것도···.”

사빈은 백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연회색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순간, 그 눈동자 속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사빈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 아나진을 찾으면서 이상한 기운을 발견했어요.”

“이상한 기운이라니?”


“아무래도 피천귀가 다니는 통로 같아요. 저 혼자 찾기는 위험하니, 같이 가시겠어요?”

마고에게는 통로를 막을 힘이나 무기가 없으므로 어차피 상산대가 할 일이었다.


“어디인지 아시오?”

“달해산의 가장 북쪽과 한긋장벽이 만나는 지점이에요.”

사빈은 북쪽을 향해 가볍게 날아올랐다.


백하도 그녀를 따라 날아올랐다.

그가 손짓하자 작은 회오리들이 다시 생겨났다. 회오리들도 산등성이를 타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한긋장벽을 향해 날아가면서 사빈은 단가람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렸다. 구멍에 대해 말하기 전에 그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 다시는 못 온다는 걸···, 알고 있겠지.’


단가람을 생각하니 무언가 빠뜨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상해. 이 기운, 느낀 적 있어. 어디였더라?’


낯익은 느낌을 되살리니 천사 가온에게로 이어졌다. 가온과 함께 골목을 헤매던 때로 거슬러 갔다.


‘옥구슬?’

옥구슬에서 나오던 기운이 단가람과 꼭 맞았다.


‘이런! 바로 알아봐야 했는데! 언제 만날지 모르잖아···.’

사빈은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천사 어머니의 사랑이 깃들었으니 제 주인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을 것이다. 겨우 주인과 가까워졌는데, 그걸 보지 못하다니.


*


달해산 꼭대기에 이르자 한긋장벽의 두꺼운 구름이 치솟아 올랐다. 뭉클거리며 뜨거운 바람을 내뿜었다.


“저기 가장 북쪽 끝이에요. 한긋장벽과 만나는 곳.”

사빈이 손을 들어 가리키자 갑자기 먹구름이 부풀어 올랐다.

불길한 예감에 그녀의 손이 우뚝 멈추어 섰다.


장벽의 구름이 달해산 만큼이나 높이 부풀어 올랐다. 장벽 전체가 치솟는 것처럼 굵고 높은 구름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기둥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폭발과 함께 거센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거친 바람은 순간에 산 위의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바람을 따라 날아갔다. 어린나무는 뿌리째 뽑혀 허공으로 떠올랐다.

풀잎과 흙먼지가 피어올라 사방이 뿌옇게 가려졌다.


사빈의 몸도 나뭇잎처럼 힘없이 날아올랐다.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흙먼지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소리도 못 내고 떠밀려가다가 겨우 백하의 손을 붙잡았다. 그 역시 간신히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백하는 사빈을 품에 안고 등을 돌려 바람을 막았다. 회오리 정찰병들이 날아올라 그들을 감쌌다. 회오리 방어막이 생기자 바람도 비껴갔다.


거센 바람이 가라앉았다.

한긋장벽은 갑자기 폭발한 것처럼 갑자기 고요해졌다.


백하는 사빈을 안고 달해산 꼭대기에 내려섰다. 그는 사빈을 내려주고 휘청이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소?”

“예, 예. 괜찮아요. 대감은?”


그제야 백하는 사빈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괜찮으면 되었소.”


폭풍이 지나간 달해산 꼭대기는 폐허가 되었다. 살아남은 나무들이 부러진 나무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사빈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긋장벽과 달해산이 만나는 곳. 그들이 서 있는 바로 아래 그곳이 보였다.


한긋장벽의 구름 사이, 검은 구멍은 구름장벽의 움직임에 맞춰 커졌다가 작아졌다.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였다. 지금의 단가람은 현관을 지나듯 드나들었을 것이다.


구멍 건너편을 노려보던 백하가 기합을 넣었다.


“헙!”

그는 곧 허공에서 길고 날카로운 얼음칼이 뽑혀 나왔다.


“기다리시오.”

백하가 구멍 가까이 내려간 뒤에야 사빈은 장벽 건너편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반대편에 피천귀들이 모여있었다.


백하는 단숨에 구름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가 얼음칼을 들어 올리자 칼끝에서 빛이 스며 나왔다. 구름에 가려있어도 날카로운 빛이 보였다.


빛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꽤애액 질긴 비명이 들렸다.

피천귀들은 잿빛 연기처럼 사라졌다.


백하가 손을 올리니 한긋 장벽의 틈이 서서히 메워졌다.

그가 한 걸음씩 돌아 나올 때마다 뒤쪽의 구름이 벽을 만들며 그를 배웅했다.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오.”

“고맙습니다.”

“인사는 됐소. 아나진을 찾아보겠소.”


백하의 말에 대답하듯 작은 회오리들이 쇄애액 소리를 냈다.


아래쪽에서 회오리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회오리가 길게 늘어났다가 짧아졌다.

사빈은 무슨 일인가 보고 있었지만, 백하는 그 신호를 알아들었다.


사빈의 허리를 가볍게 안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 제가 갈게요.”


“금방 도착하오.”

그의 말대로 날아오르자마자 내려앉았다.


거대한 바위와 돌로 이루어진 바위숲이었다. 그사이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샘물가에 아나진이 앉아있었다.


아나진은 샘물에 손을 담그고 물을 튕기며 장난치고 있었다.


자신이 방을 잃었다는 것도, 시간이 흘러간 것도, 폭풍이 지나간 것도 모르고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옷의 앞섶이 다 젖어도 마냥 즐거워했다.


천진난만한 아나진을 보니 사빈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나도 저렇게 웃고 싶네요.”


아나진에게 다가가면서 사빈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백하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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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5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4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5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6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6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6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2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7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6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4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6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7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7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8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9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54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4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2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5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7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7 2 13쪽
»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63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9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60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6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71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7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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