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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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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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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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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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_창성곡의 산적

DUMMY

매운 기운이 코를 통해 목까지 파고들었다. 하늘에는 빛이 남아있으나 산속은 짙은 암흑이었다.

”뭐야? 또 산이야?“


부엉이 우는 소리, 늑대 울음소리가 간혹 들렸다. 우거진 숲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며 얼마나 산이 깊은지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어딜까?’

내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니 마음숲에서 입던 것과 비슷했다. 넓은 소매, 긴 저고리, 앞여밈에 허리띠를 둘렀다.


다른 것이라면 치마가 무릎을 겨우 덮는다는 것, 치마 아래 바지를 겹쳐 입고 종아리 부분을 끈으로 묶었다.


색이 수수하고 무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서민의 옷차림이다. 게다가 짚으로 엮은 신발까지.

어릴 때 동네 여인들이 주로 입던 옷이었다.


‘엥? 과거로 왔어?’

또 덫에 걸렸나. 이러다가는 일 못 하는데···. 수명환은 고사하고, 다음 마고도 찾을 수 없다고.


인간세의 대기가 알려준 지식도 내 짐작대로였다. 지금 여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영감도 바람잡이도 부를 수 없다. 지박령들에게도 지나간 시간이니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날지도 못하는데 영감도 없고. 이렇게 깊은 산을 어떻게 지나가나?’


나는 봇짐의 끈을 잡아당겼다. 인간세로 넘어오는 도중에 놓칠까 봐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구름빵과 샘물떡도 가져왔는데···.“

이번에도 파라다이스 빌라를 기대했건만. 차원의 문지기들을 위해 가져왔는데···.


다음 마고를 찾는 일에 어떤 수확이 있는지, 작은 단서라도 찾았는지 알고 싶었다. 이상한 낌새라도 있으면 곧장 알려준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었다.


나는 애꿎은 꽃수 열쇠를 흔들었다.

”꽃수 열쇠! 새로운 주인을 찾고 싶지 않은 거야? 응?“


강아지 바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왕, 주인님, 삽살이와 참새가 있는 곳이어라?”

“아니. 여기는 과거야.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왔어.”

“에? 삽살이가 없어라?”


바나는 귀를 축 늘어뜨리고는 바닥에 엎드렸다.

마른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올라왔다. 바나가 낑낑대는 소리도 들렸다.


“반계에서 덫을 너무 많이 친 거야? 내가 덫마다 찾아다니는 거야?”

나도 씩씩거리며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길도 없는 숲 한가운데 서 있을 수는 없어. 어디로든 움직여야 했다.


“내려갈 길을 찾아보자. 사람 냄새가 남았나 봐줘.”

나는 바나를 내려다보았다. 혹시라도 길을 알아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바나는 앞발에 턱을 올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한숨을 쉬느라 작은 몸이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낑, 주인님, 혼자 다녀오셔라.”


“여기에 할 일이 있을지 몰라. 그믐 외출은 짧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끼잉, 다리가 아파라. 배도 고파라.”

바나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안고 내려갈 수밖에.

바나를 안아 올리는데, 어디선가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한두 명이 아니라 십여 명 정도였다.


이어서 남자들의 거친 고함이 들렸다. 우지끈 나무토막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바나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왕! 주인님, 가시어라. 여긴 여기대로 재미있을 거라.”


바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 나는 쪽으로 바람처럼 뛰어갔다. 조금 전까지 엎드려있던 강아지가 아니었다.


내가 잡목과 풀숲을 헤치며 어렵게 걸어가자 바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왕! 빨리 오셔라, 빨리!”


바나는 물수제비 뜨듯 껑충껑충 숲속을 뛰어갔다.


더는 비명이 들리지 않았지만, 바나는 그대로 뛰어 내려갔다. 나무둥치와 바위를 요리조리 피하며 달리다가 가끔 돌아서서 나를 기다렸다.


비명보다 침묵이 더 무거웠다. 마음이 바빠졌다.


가시나무에 소매와 치맛자락이 찢겨나가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팔과 종아리에 난 상처보다 여인들이 걱정되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곳은 허름한 움막이었다. 바위 절벽 아래 선 얇은 움막.

이런 속임수라면 전에도 본 적 있다. 동굴을 가려놓은 것이다. 저 안으로 길고 깊은 동굴이 펼쳐지리라.


바나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큰 소리로 짖어댔다.

“왈! 주인님, 저 안에 갇혀있어라. 빨리 오시어라!”


높은 절벽을 따라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깊은 밤의 메아리까지 더해져 이중 삼중으로 크게 들렸다.


“바나! 일단 적부터 파악해야지. 얼마나 있는지 모르잖아!”

“왕! 걱정 마시어라. 제가 있어라.”


어떻게 할지 고민할 사이도 없이 움막 문이 벌컥 열렸다.


키가 크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곤봉을 들고나왔다. 그 뒤를 이어 십여 명의 장정들이 병풍을 치듯 움막 앞으로 나와 섰다.


몸집은 제각각 달랐으나 모두 창이나 칼을 들고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뭐야? 계집이 제 발로 들어왔어?”

“쓸모없네. 저런 말라깽이를 얼마에 팔겠어?”

마른 얼굴의 남자가 나를 보고는 땅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저놈 저거, 소리는 제법인데, 한 젓가락 거리도 안 되는구먼.”

짧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바나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그런 말에 기가 죽을 마고 사빈이 아니지. 나는 그들 앞에 버티고 서서 배에 힘을 주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거라. 여기서는 너희 죄를 묻지 않겠다.”

한껏 큰소리를 냈지만, 바나에 비하면 생쥐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저 계집, 뭐라는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네.”

산적 서너 명이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주인님, 뒤로 오시어라!”

바나가 소리쳤다. 소리가 점점 더 굵고 힘차게 바뀌었다.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바나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한얼의 푸른 빛과 백하의 하얀빛이 바나를 감싸고 돌면서 몸이 점점 커졌다.


뛰어들던 산적들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괴물이닷!”


바나는 그들보다 세 배는 커졌고, 날카로운 송곳니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해태로 변했다. 중앙황천의 황금빛 해태와는 달리 풍성하고 하얀 갈기를 휘날렸다.


“얌전히 물러선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너희 숨은 여기서 끝이다.”

거대해진 몸집만큼 소리의 울림이 컸다. 백하와 한얼의 목소리를 섞은 듯 위엄있고 강인했다.


거대한 해태를 앞에 두고도 산적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잡아!”

“껍질을 벗겨서 팔아버리자고!”


산적들이 일제히 바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크와앙!”

바나가 그들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공기가 출렁이며 땅이 흔들렸다. 떨어진 나뭇잎이 들썩이며 날아올랐고 움막 지붕에서 짚이 풀풀 떨어졌다.


산적들도 서 있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바람과 흙 때문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들은 소매로 바람을 가리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한 남자가 창을 던졌다.

바나는 앞발로 창을 쳐내면서 그들에게 발톱을 휘둘렀다. 그는 가슴에 깊은 핏자국을 남기고 쓰러졌다.


다른 산적들의 눈이 이글거렸다.

“널 못 잡으면 창성곡의 두건파가 아니다!”


바나는 훌쩍 뛰어올라 날아오는 창을 물었다. 나무젓가락을 다루듯 이빨로 파직 부러뜨렸다.


“주인님, 한 번에 치워도 되지라?”

바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앞발을 들었나 싶었는데, 발톱이 번쩍거리며 번개처럼 공기를 갈랐다.

다음 순간, 움막 밖에 있던 산적들은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움막 안에 있던 산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바나를 보고 숨을 삼켰으나 쓰러진 동료들을 보자 눈빛이 달라졌다.


한꺼번에 저주와 욕설을 내뱉었다. 칼과 창, 곤봉을 들고 바나를 둘러쌌다.


나는 바나에게 전언을 보냈다.

‘난 들어가 볼게. 그 여자들이 어떤지 봐야지.’


‘와왕, 산적이 남아있으면 어쩌시라?’

‘그 정도는 마고의 술법이 있잖아.’


산적들이 저마다 무기를 겨누고 바나를 에워쌌다.


그사이 나는 산적들 뒤로 돌아 움막 문까지 다가갔다. 들어가기 전에 바나를 돌아보니 산적들을 하나씩 날려 보내고 있었다.


동굴 안에 산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바깥이 소란스러우니 모두 뛰어나갔겠지.


동굴은 넓고 길었다. 다른 동굴과는 달리 바닥의 흙은 말라 있고, 물기 하나 없었다.

조금 전에 사람이 지나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갈림길이 많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안쪽 구석에 웅크린 형체들이 보였다. 횃불이 하나뿐이어서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겨우 서로를 알아볼 정도였다.


젊은 여인들과 열서너 살 정도의 소년과 소녀들이 겁에 질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손과 발이 묶인 채 서로 몸을 기대고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겁내지 마세요. 구하러 왔어요.”

내가 다가서자 앞에 앉은 여자가 손짓했다.

“산적들이 올 거예요. 빨리 도망치세요.”


“걱정 말아요. 내 친구가 처리할 테니까요.”

나는 마고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갇힌 사람들의 소망을 끌어모았다. 풀려나고 싶은 소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동굴 속의 공기가 기운을 얻는다.


마고의 힘은 사람의 소망을 받아야 커진다. 피천귀들이 사람의 욕망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과 원리는 똑같다. 결과가 다를 뿐.


동굴 속의 바람이 그 기운을 받아 날이 잘 선 단도를 만들어주었다.


실바람으로도 밧줄을 풀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마고의 술법을 보아서는 안 된다.

이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재울 수도 없으니 조심해야지. 게다가 지금은 잠들 여유도 없었다.


밧줄을 풀어주자 여인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손발을 떨며 일어서지도 못했다.

“어흐흑.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일단 나가요. 산 아래 마을이 있을 거예요.”

나는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단도의 쓰임을 다한 기운은 횃불로 옮겨가 불을 더 환하게 밝혀주었다.


여인과 아이들은 서로 부축하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렸다.


움막 바깥으로 나갔을 때 산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쓰던 무기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나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복슬복슬한 하얀 털에 공처럼 동그란 털북숭이 강아지로.


“바나, 산적들은?”

“왕, 저쪽이어라.”

바나는 고개를 돌려 검은 숲을 가리켰다.


“주인님, 천사가 지나갔어라. 왈!”

“천사?”

나는 검은 숲을 보고 나무 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다. 천사가 때맞춰 다녀갔다면 이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명이었다. 그것도 커다란 해태의 발톱에.


‘바나가 왔어야 하는 시공간이라고···?’

혼란스러웠다.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뀔 텐데? 아니면···, 우리가 왔어야 하는 과거인가?


설마 이 사람들을 구했다고 현재가 뒤틀리지는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왈, 다 나왔어라?”

“응.”

나는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동그랗게 모여 서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나가 제법 큰 소리로 말하는데도 서로 손을 잡고 별을 올려다보았다. 바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어두운 숲을 돌아보았다. 사람의 눈으로는 이 어둠 속에서 나무와 나무 사이도 분간하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이 퀭하고, 기력이 없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나는 봇짐을 풀어 구름빵과 샘물떡을 꺼냈다. 다담 차사가 넣은 천력을 빼내고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파라다이스는 아니어도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거니까.’

이렇게 쓰인 걸 알면 다담 차사도 좋아할 거야.


천천히 떡을 오물거리던 여인이 내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세요?”


“저도 처음이에요. 강아지가 냄새를 맡으니 따라가죠.”

나는 바나를 쓰다듬었다.

“가까이 마을이 있어?”


바나가 코를 킁킁거렸다.

“있어라. 주인님, 사람 냄새여라. 아주 많이 있어라. 왕왕.”


꼬리를 흔들며 씩씩하게 앞장섰다.

“왈! 이쪽이어라. 조금만 가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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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5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4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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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6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6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6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2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7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6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4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5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7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7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8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9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54 2 11쪽
»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4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2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5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7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7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62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9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60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6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71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7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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