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798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03 10:00
조회
55
추천
2
글자
11쪽

천계_이상한 편지

DUMMY

얇은 나무껍질에 그림 같은 글자가 새겨졌다.


사빈은 그림 글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자신과 예사달이 만든 글자였다.

동녘뜰에서 스승과 제자로, 할머니와 손녀로 함께 지내면서 놀이처럼 단어와 글자를 만들곤 했다.


‘할머니의 편지가 맞아.’

낯선 편지를 받아 들자 사빈은 미심쩍으면서도 반가웠다.


동녘뜰에서 지내는 동안 예사달은 가끔 우주의 경계를 따라 떠돌았는데, 사빈은 천력이 부족하여 함께 다니지 못했다.


예사달은 떠나있는 동안 자주 안부를 보냈다. 그의 인사는 늘 바람이 전해주었다.


빛을 실은 바람이 사빈의 손에 닿으면 주변의 공기 덩어리가 넓게 펼쳐졌다. 그 위에 빛으로 쓴 글자가 나타났다.


지금 그녀가 받은 것은 빛글이 아니라 나무껍질이지만, 역시 할머니가 보낸 것이다.

사빈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쓰다듬었다.


‘차원의 문에 다녀왔다고?

경계에 서니 모르던 것들이 보이는구나.

답이 없으면 만들면 된단다. 네 자리를 지키며

기다린다면 네가 찾는 답이 너를 부를 거다.


빛도 숨도 없는 곳이라 편지를 쓴다. 기억하렴.

나의 제자, 네가 어디 있든 널 찾아가마.’


예사달의 편지는 자상한 손길만큼이나 부드럽고 깔끔했다.

사빈은 편지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혼자 동녘뜰 사빈재를 지킬 때도 편지 한 장이 위로가 되었는데, 풀지 못할 고민을 떠안은 지금도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사빈은 자신을 바라보는 한얼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왜 이걸 한얼이?’


“한얼님, 할머니의 편지를 어떻게 받았어요?”

“우연히 심부름꾼을 만났습니다.”

“심부름꾼? 어디서요?”


“회향미곡 근처입니다.”

‘회향미곡? 설화옥이 있는 곳?’


백하 역시 사빈과 같은 생각이었다.

“인도자가 어찌 그곳에 간단 말이오?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오.”


그의 말은 차갑고 단호했다.

“중간자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빨려들지. 회향미곡에는 무슨 일로 갔나?”


“스승님의 부탁으로 간 것이니 상산대감께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한얼은 싱긋 웃으며 두 손을 모아들었다.


“다훤님의 부탁이라···.”

백하는 장승처럼 서서 한얼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사빈에게로,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로 이어졌다.


회향미곡.

그곳은 북방흑천과 중앙황천, 동방청천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계곡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빈은 그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예사달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천인도 쉽게 나오지 못한단다. 너는 중간자이니 특별히 조심해야겠구나.’


설화옥에 갇힌 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회향미곡을 가득 메운다고 했다.

괴상하고 음침한 소리가 들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설화옥에 갇힌 것이다.


‘다훤 아저씨의 부탁이라고? 회향미곡까지 무슨 일이지?’

사빈은 한얼을 쳐다보기는 했으나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한얼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사빈과 백하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데도 한얼은 여전히 보일 듯 말 듯 눈웃음을 지었다.


“할머니가 심부름꾼을 보냈다고요?”

“예. 천마 비황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길을 못 찾아 헤매고 있었지요. 사빈님께 보내는 편지라기에 받아왔습니다.”


천마라면 남방홍천 소속이니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황?’

사빈에게는 낯익은 이름이었다.

얼마 전 인간세에서 만난 천마였다. 아기를 낳느라 고생하던 기린 홍월의 모습도 떠올랐다.


‘아기들은 잘 있을까? 이름도 지어줬는데. 에밀레와 나토두였지.’

나토두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으니 지금도 허약할 텐데···.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비황의 안부도 궁금했으나 한얼에게 묻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그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었다.


인도자가 인간세에 자주 가는 것도 충분히 의심스러운데, 회향미곡에서 천마 비황을 만나 예사달 할머니의 편지를 가져다주다니 너무나 수상했다.


바나에게 아날빛숨의 차를 나르게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얼에게 모든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가는지, 누구와 어떤 말을 하는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숲에는 상산대가 있고, 키움차사와 돌봄차사가 있으니 바나를 조금 떼어놓는 편이 더 나았다.


하지만, 그믐 외출에는 데려가기로 했다.

무기도 없고 싸움도 못 하는 사빈에게는 소중한 길동무였다.


바나에게는 한얼과 백하의 천력이 들어있고, 차원의 문지기들에게 변신술까지 익혔으니 호위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빈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양쪽에서 큰 소리가 오고 갔다. 백하와 한얼이 거의 소리 지르듯 말하고 있었다.


“인도자는 배웅문으로 가야 하지 않소?”

“대감도 한요재를 지나치셨습니다.”


“상산대는 마음숲 전체를 지켜야 한다오. 어디 한 군데 빼놓을 수 없소.”

백하는 아날빛숨과 광장을 돌아보며 천천히 사빈의 주위를 돌았다.


사빈은 찡그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둘이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것은 알겠지만, 그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좋을 텐데.


백하가 한얼 앞에 멈춰 서자 한얼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사빈님의 안전이라면 염려 놓으십시오. 스승님이 간곡히 부탁하셨으니 제가 있겠습니다.”


“허! 마음숲에는 상산대가 있소. 인도자는 오고 가는 존재이나 상산대는 머무는 존재. 사빈님을 지키기에 나보다 나은 이가 없소.”


백하는 헛기침하며 사빈에게 다가갔다.

“이천 년이나 함께 해왔소. 그 마음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소.”


사빈은 편지를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아날빛숨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저기, 저는 일이 있어서···.”


“사빈님, 할 말이 있소.”

백하가 사빈을 가로막자 한얼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도 전할 말이···.”


두 천인이 눈빛이 부딪쳤다. 대취와 산여가 때를 맞추어 나타났다.

“한얼!”

“떠날 혼이 다 모였네.”


그들은 백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상산대감을 만나다니! 반갑군요”

“그르게. 마음숲을 그리 다녀도 대감 만가기는 어려운디.”


“나도 반가웠소. 일이 힘든데 어서 가보시오.”

백하는 사빈의 등을 살짝 밀어 돌려세웠다.


그순간, 아날빛숨의 문이 열리며 용희가 뛰어나왔다.

“대감님! 차 드시러 오셨나요?”


용희가 가까이 오자 백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목을 가다듬었다.

“마음은 고마우나 할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소.”

“예? 잠깐 앉았다 가시지요?”


백하는 사빈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속삭였다.

“다음에 다시 오겠소.”


인도자도 상산대감도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한얼과 백하가 모두 떠나자 비로소 조용해졌다.


사빈은 그제야 몸에서 힘을 빼고 소매를 툭툭 털었다.

‘이런 게 진짜 평화로운 마음숲이지.’


“고마워. 도와줘서.”

사빈은 아날빛숨에 들어서자마자 용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용희는 백하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마고님, 왜요? 상산대감이 얼마나 멋진데. 그런 분에게 사랑받다니 얼마나 좋아요?”


“용희는 괜찮아? 곧 마음숲을 떠나잖아?”

“그러니까 진심을 다하려고요. 다시는 기회가 없잖아요?”

사빈은 용희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볕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예사달의 편지를 다시 펼쳤다.

‘여기는 빛도 숨도 없는 곳이라 이렇게 편지를 쓴다. 네가 어디 있든 널 찾아가마.’


‘할머니···.’

사빈은 편지를 꼭 끌어안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편지를 쓰다듬는데 용희가 주방 입구에 서서 그녀를 불렀다.


“마고님, 이 차 한번 드셔보실래요?”

“응? 무슨 차?”


사빈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용희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가시버시날에 새로운 차를 대접하려고요. 차사님들께 맛을 봐달라고 했는데, 아주 좋대요.”

“그래? 기대되는걸?”


옅은 갈색이 도는 차에서는 진한 향과 묵직한 맛이 느껴졌다.

입에 머금은 첫맛이 묵직하다면 혀로 넘어갈수록 색다른 맛이 나타났다. 단맛과 신맛, 쓴맛이 적당히 어우러졌다.


‘미소화와 강인초를 섞었나?’

사빈은 선반과 바구니를 둘러보았다. 용희가 아끼는 약초들이 반듯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대감님이 좋아하시겠죠?”

용희가 얼굴을 붉히며 약초를 뒤적거렸다.

“마고님, 대감님을 아프게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차 이름은 정했어?”

“아직 안 정했어요. 미강수라고 해야 하나···? 뭐가 좋을까요?”

맛이 묵직하니 무게감 있는 이름이 좋겠는데.


혼들이 무리 지어 아날빛숨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고, 혼을 따라 아날빛숨의 모든 층을 돌아다니던 바나가 드디어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주인님! 제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보셔라. 왕왕.”

바나는 껑충거리자 용희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왕, 귀엽다고 하여라. 내가 사랑스러운 거지라. 왈.”

“그래? 그럼 열심히 일해야지?”


“주인님도 저를 보러 오셨지라? 보고 싶으셔라? 와왕.”

“으흠, 그렇다고 해두자.”


혼들이 바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뽀얀 강아지 어디 갔나?’

‘금방 오겠지. 강아지가 차를 나르다니, 어찌나 귀여운지. 깨물어주고 싶다니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바나는 곧바로 뛰어나갔다. 헥헥거리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강아지 한 마리가 더 있는 것뿐인데도 아날빛숨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백하가 넣어준 천력이 대단한 힘을 뿜어냈다. 바나는 쉽게 지치지 않았다.

신나서 뛰어다니는 바나를 보니 사빈의 표정도 차츰 밝아졌다.


*


사빈은 예사달의 편지를 들고 아롱재로 올라갔다.

힘든 하루였다.

이 정도로는 지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쉽게 피곤해졌다.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었다.


아롱재의 창가에 앉으니 대명천의 빛이 시나브로 어두워져 갔다. 고즈넉한 방안에서 편지를 다시 펼쳤다.


‘할머니, 어디 가신 거예요? 빨리 돌아오세요.’

사빈은 중얼거리며 편지를 쓰다듬었다.


숨꼭지들이 사그락거리며 빛을 내자 아늑한 빛이 편지의 한쪽에 머물렀다. 편지의 왼쪽 글자만 또렷하고 밝게 도드라졌다.


‘차원의

경계에서

답이

기다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5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4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5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6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6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6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3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7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6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4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6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7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7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8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9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54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4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2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6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7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7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63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9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60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6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71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71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