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추풍검 - 5분 후 갈라져 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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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렉스
작품등록일 :
2023.05.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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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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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검 문영화

DUMMY

나는 어릴 적부터 '벼려졌다'.


선조들의 기억, 경험, 무공 일체를 불에 달구고, 두드려서 불순물을 덜어낸다.


그것들과 나를 겹쳐서 불에 달구고, 두드려 하나로 만든다.


그것을 흙에 집어넣어 식히고, 다시 달구고 두드린다.


훌륭한 칼이 될 때까지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좋게 말해서 그렇지, 실상은 그냥 학대였다.


우리 집은 대대로 살수를 키워내는 가문이었으며, 나의 아버지나 형제들도 이런 공정을 거쳐 살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가족의 지시에 거역하지 말라’


그 문구는 아버지의 환술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속 깊은 곳 심장에 새겨졌다.


이후 조금이라도 반항하려고 생각하면 심장에 인두질하는 듯한 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나라는 칼날 위에 글귀가 새겨진 것이다.


나는 수없이 깨지고 다쳤다.


수없이 달궈지고 두드려졌다.


그렇게 학대에 가까운 공정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비로소 '이월李月'이라는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내 몸에 새겨진 무공의 이름은 '월하추풍인月下抽風刃'.


칼 검劍 자가 아닌 칼날 인刃 자를 쓰는 이유는, 나 자체가 하나의 검이며 나는 칼날을 뽑을 뿐이라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그래서 월하추풍검月下抽風劍, 줄여서 추풍검抽風劍이라는 단어는 본체인 나의 별호로서 붙어 있다.


나는 검을 들고 다니지 않으며, 대신 숨결이나 바람 따위를 내공으로 얇게 벼려내어 칼날처럼 사용한다.


바람을 암살의 도구로 사용하기에 눈에 띄지 않았으며 증거도 남지 않았다.


내가 익힌 무공 월하추풍인은 세 자루의 칼날을 취급했다.


3호검 초풍剿風. 목표를 수 분 뒤에 죽이는—최대 5분— 가장 예리한 검.


2호검 범람犯嵐, 덜 예리한 검.


1호검 쇄태碎颱. 무딘 검.


암살에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3호검 초풍이었다. 목표가 죽을 때까지 유예 시간이 있어, 그 사이에 유유히 현장을 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티도 거의 나지 않았기에, 목표는 자신이 베였는지도 모른 채로 행동하다가 그대로 죽곤 했다.


***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기야 여기!

-패스!

-슛해! 슛!

-야이, 빡통아!


흙바닥으로 된 간이 축구장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무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아이들은 서로 북돋아 주기도 하고, 실수를 타박하기도 했다.


나는 친구가 없다.


축구가 뭔지는 알지만, 그걸 내 또래의 아이들과 해본 적은 없었다.


내 곁에 있는 것은 오직 가족뿐이었으니.


"월아."


한 청년이 스스럼없이 다가와서는 내 곁에 앉았다.


비대칭으로 내려온 앞머리와 동그란 철테 안경.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내 둘째 형인 이열李烈이었다.


나는 곁눈질로 그를 보는데, 그는 대놓고 날 쳐다보며 몸을 기울였다.


"돈 좀 빌려주라."


그가 정갈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 주말에 펜션 하나 잡고 여친이랑 1박 3일로 놀러 갔다 올 거야."


"···저번 주에도 빌려줬잖아."


"저번 주는 1박 2일 여행이고, 이번 주는 1박 3일 여행."


"뭔데, 그게?"


"뭔지 궁금하냐 동생아? 응? 궁금해?"


둘째 형은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어깨를 얄밉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안 궁금해."


나이 조금 더 먹었다고 유세 부리긴.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월아, 오늘까지 몇 명 잡았지?"


"···."


다 좋다.


다 좋았지만, 그 질문만은 그닥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내 곁에 달라붙어 귀찮게 할 게 뻔했다.


나는 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펼쳤다.


검은 것은 글씨, 흰 것은 바탕이니,


마지막으로 글귀가 쓰인 페이지 하단에, 2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둘째 형은 그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오, 21명, 많이 죽였네."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월아, 100 빼기 21은 뭐지?"


"···79."


"틀렸어."


그 순간, 그의 손바닥이 날아와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프고 얼얼했다.


"다시 대답해 봐."


"···80."


"틀렸어, 멍청아."


그가 또 한 번 내 머리를 때렸다.


"답은 78이야."


"···."


"내가 78이라면 78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가족에게 거역해선 안 된다.


나는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둘째 형은 그런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 아하하하!"


갑자기 내 어깨를 퍽퍽 때렸다.


"농담이야, 농담! 이건 뭐, 농담도 모르는 좁쌀영감이구먼!"


그러고는 내 어깨에 멋대로 자기 팔을 둘렀다.


"괜찮아! 79명 맞아. 똑똑하네, 우리 월이! 우쭈쭈~."


그가 내 턱을 간질이듯이 만졌다.


"하지만 78명일 수도 있지."


그의 목소리가 한 층 가라앉으며 진지해졌다.


"오늘 목표를 처치한다면 말이야."


그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한 사내가 검을 들고 서 있고, 맞은 편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사내는 코가 잘려 있었고, 두 사람을 둥글게 둘러싼 채 환호하는 관중의 모습이 보였다.


"나검癩劍 문영화."


둘째 형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문둥검이라고도 하지. 문둥병이라고 알지? 걸리면 코가 떨어져 나가는 병."


"알아."


"이놈은 쓰레기야. '비무 재판'에서 대신 싸워주는 걸로 먹고 사는 놈인데. 항상 이렇게 상대방의 코를 잘라가지."


사진을 더 자세히 보니, 그가 쥔 검의 모습이 이상했다.


두 자루의 검을 쥐고 있었는데, 한 자루는 평범했지만, 다른 한 자루는 90도로 꺾인 모습을 갖고 있었다. 마치 수맥을 찾을 때 쓰는 쇠봉처럼 말이다.


"물론 그딴 기괴한 짓을 하면 제지받기 딱 좋지만, 월아, 내가 왜 너한테 이놈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지?"


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그놈이 삼녀 노루아의 끄나풀이니까?"


"그렇지! 옳지, 옳지."


둘째 형이 또 내 턱을 간질였다.


"인성은 쓰레기지만 실력 하나만으로 고용되었지. 하하, 뭐 얼마나 강하든 간에 우리한테는 의미 없지만.“


그가 내 등짝을 후려치고는 유난스럽게 벤치에서 일어났다.


"자, 얼른 갔다 와. 빨리 해치우고 저녁에 피자나 먹자. 물론 네가 사고."


"···."


"대답."


"···응."


"좋았어!"


둘째 형은 손가락을 튕기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터를 떠났다.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둘째 형이 건네준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이 시체 사진을 보고 끔찍하다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기약 없이 불어오는 바람처럼 나는 조용히 공터에 왔다가 조용히 떠나갔다.


지금은 신무림 시대이다.


신무림인은 자신이 떠올린 심상을 쉽게 무공으로 만들 수 있다.


바로 사진 속의 이 인간, 문둥병을 소재로 나검이라는 무공을 만들어 낸 이 문영화처럼 말이다.


구무림 시절에 화산의 제자 하나가 매화를 소재로 검법을 연공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들였던가.


그것에 비하면 너무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


신무림인이 쉽게 만든 무공이, 구무림인이 힘들게 벼려낸 무공보다 강력하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문영화는 얼마 안 가 찾아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에 주근깨가 났던 그는 광화문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재판이라는 이름의 공개 살인극을 벌이고 있었다.


문영화의 상대는 풍채가 좋았으며, 푸줏간의 푸주칼을 잡아 늘인 것 같은 대검을 들고 있었다.


"타앗!"


그가 대검을 두 손으로 쥐어, 문영화의 머리에 내리쳤다.


막아내더라도 어디 한두 곳 정도는 부러뜨릴 법한 대검. 하지만 문영화는 그의 검격을 왼손의 평범한 검으로 간단히 흘려내며 옆으로 파고 들어갔다.


"원수나살円手癩殺."


그리고는, 오른손의 꺾인 검을 선풍기처럼 휘두르며 상대방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재판관이 '우연히' 들고 있던 쟁반 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상대방의 잘려 나간 코였다.


말할 것도 없이, 처참한 비명이 날아올랐다.


또한 사람들의 환호성도 곧이어 날아올랐다.


"나검 문영화가 이겼소!"


재판관 역할을 하는 무림인은 문영화의 손을 들어주었고, 관객 중 누구도 그 판결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코를 빼앗긴 상대방은 길길이 날뛰었다.


"아직, 아직이야!"


그는 다시 한번 문영화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바위 같은 주먹이 옆에서 튀어나오더니, 그를 후려쳐 또 쓰러뜨렸다.


이번에 그를 막은 것은 문영화가 아닌 재판관이었다.


그가 직접 나서서 상대방을 때려눕힌 것이었다.


-와아아!

-문영화! 문영화!

-나검! 나검!


또 관중의 환호성이 날아올랐다.


"하하, 감사합니다!"


문영화는 손뼉을 치며 자화자찬하고, 관중과 가벼운 대화나 악수 따위를 했다.


그런 역겨운 짓거리를 했음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는 근처에 서서 그의 싸움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재판관이 그에게 물수건을 건네주고, 문영화는 그걸로 얼굴을 닦았다.


"그래, 다음 상대는 누구지?"


"총영호, 28세 남자,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지인을 속이고 독초를 달여 먹였습니다."


"쓰레기로군. 그놈도 내가 처리하지."


문영화는 재판관을 마치 제 부하처럼 다루었다.


잠시 후, 비실비실해 보이는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 손에 단도를 들고 있었지만, 벌벌 떠는 것이 도저히 싸울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본디 비무 재판엔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그는 본의 아니게 이곳에 끌려온 듯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문영화는 검을 휘둘렀고,


그가 자랑하는 나검으로 상대방의 코를 잘라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관중의 환호성이 대지를 흔들었다.


나는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고, 서너 번 정도 그의 싸움을 더 지켜보았다.


그러자 머지않아 몇 가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우선, 둘째 형 말마따나 문영화의 실력 자체는 좋았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그는 자신의 힘으로 상대방을 꺾었다. 그것도 항상 코만을 노리는 번거로운 방식으로.


그런데 문영화가 실수하거나 상대방이 그보다 강했을 경우, 이럴 때는 재판관이 나서서 트집을 잡으며 경기를 잠시 중단시켰다.


문영화가 기회를 잡을 때까지 그것을 한두 번 정도 반복하다가 문영화가 승기를 잡으면 내버려 두는 식이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관중들이 나서서 그를 비난했다.


그렇다. 관중 대다수는 문영화가 미리 심어놓은 선동꾼이었다.


결정적으로, 문영화는 항상 원고를 대신하여 싸웠으며, 그의 상대인 피고는 항상 살인, 강간 따위를 저지른 악질 범죄자였다.


그래서 문영화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다소 티가 나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피고가 그의 손에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것이 곧 사회의 정의라고 시민들은 생각했기에.


즉, 한 번 결투가 시작되면 그를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별 의미는 없었지만.


나는 검지를 입술 앞에 두었다.


3호검 초풍剿風, 발도.


"후우."


검지 끝에 날숨을 불고, 기氣를 이용해 그것을 얇게 펼쳐 예리한 칼날로 만들었다.


바람의 칼날은 검지 끝에 매달린 채로, 연처럼 나풀거렸다.


수행이 부족한 무림인들의 눈엔 내가 검지 하나만 공연히 들어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근처를 서성거리며 초풍을 날리기 좋은 위치를 찾았다.


북서쪽으로 40도. 그곳을 밟고 잠시 거리를 재다 문영화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바람의 칼날이 검지를 떠나,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칼날은 관중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갔고, 그 너머에 있던 문영화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문영화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음 상대와 싸움을 시작했다.


이번 상대는 꽤 강했다.


문영화의 검격과 재판관의 비겁한 정지신공, 관중의 선동신공을 최대한 버텨냈다.


하지만 결국 때는 왔고,


"죽어라, 무림의 쓰레기!"


기회를 잡은 문영화가 오른손의 꺾인 검을 선풍기처럼 휘둘렀다.


쩌억,


그리고 문영화는 두 동강이 났다.


고기 두 덩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으, 으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관중의 비명이 날아올랐다.


이번엔 거짓된 비명이 아닌, 진짜 비명이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 빈 페이지를 채워 나갔다.


[20XX/3/15]

[이름 : 문영화]

[문파 : 없음]

[무공 : 나검]

[유언 : "죽어라, 무림의 쓰레기!"]

[22]


이제 자유를 얻기까지 78명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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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석산의 색, 매화의 향 2 23.09.29 38 1 13쪽
104 석산의 색, 매화의 향 1 23.09.28 3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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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작명사 협회 1 +1 23.09.22 57 2 14쪽
99 항쟁의 내막 2 23.09.21 34 2 14쪽
98 항쟁의 내막 1 23.09.20 43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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