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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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최근연재일 :
2024.09.1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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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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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감자, 하나 (2)

DUMMY

“으악?! 처, 천···가!”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성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랴!”

“끄아악?! 천···라고! 우왁?!”


크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탁음이 가득한 이 목소리만큼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득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득구가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말 위에 꽁꽁 묶인 채로. 성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저거 득구 아냐?”

“···.”

“말 좀 해봐! 말 좀 해보라···. 아.”


성채의 어깨를 흔들던 왕태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성채는 시야에서 득구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쫓는 중이었다.


“제길···!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왕태하는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개가 잡혀간다는 건···! 소가주는 죽었나? 제기랄, 제기랄! 그럼 나는? 나···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이대로 똥간에 처박혀서···! 이토록 허무하게? 씨발! 그럴순 없어···! 그럴 수는 없다구! 내 인생이··· 이 왕태하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죽을 수는···!”


점점 입가에 게거품이 일어나는 왕태하의 얼굴이 괴악하게 일그러졌다.


성채는 그런 왕태하의 발작에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멀어지는 득구를 시선으로 쫓았다. 말이 달리는 방향은 정주다. 득구를 꽁꽁 묶어서 정주로 데려간다? 그럴 이유가 있나?


성채는 밀려오는 답답함에 가슴께를 꼭, 움켜쥐었다. 자신에게도 오라버니와 같은 힘이 있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아니, 지금은 신세 한탄이나 할 때가 아니다. 어쨌든, 힘이 필요하다. 적어도 누군가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면─


“끄으으르륵!”


얼굴 가득 핏대가 돋은 왕태하가 시뻘건 얼굴로 눈을 까뒤집고 흰자를 내보이고 있었다. 성채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좁은 우리 안에서 물러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커, 헉?!”


지랄병이라도 생긴 듯, 온몸을 뒤틀어대며 발작하는 왕태하의 얼굴에 기묘한 기류가 맺히기 시작했다. 성채의 눈에는 보였다. 왕태하의 얼굴 위로 누군지 모를 얼굴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 * *



“그니까, 뭐라고?”

“왕족.”

“누가?”

“내가!”


득구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어디 뻥을 까도 그럴싸하게 까야지, 되지도 않을 개뻥을···!


“뒤질래?”

“아니, 진짜라니까? 칭기즈 칸의 군대가 우리 호라즘 제국을 침공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일가는 지금까지도 왕족의 신분을 유지했을 거라니까?”

“칭, 뭐?”

“철목진, 몰라?”

“그게 뭐 하는 새끼야?”

“와, 나 이거 돌아버리겠네···.”


발가락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짚었다. 아무리 노비라지만, 이렇게 무식할 수가 있나?


“‘위대한 칸’을 정말 모른단 말야?”

“그게 뭐 하는 새끼냐니까. 왜 모르냐 묻지 말고 설명해주던가, 아니면 아가리 쌉쳐. 나 무식하다고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러우니까.”


득구가 으르렁거렸지만, 말에서 떨어질까 두려움에 떨며 말의 목을 꽉 끌어안고 오들거리는 중인지라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았다.


“음, 지금 대명제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몽골이 천하를 제패했던 건 알고 있지?”

“너 지금 나 무시하냐?”

“그 원나라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칭기즈 칸, 여기 말로는 철목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이름 한번 거지 같네.”


거지를 앞에 두고 비하를 위해 ‘거지 같다’는 표현을 쓰는 미친개에게 다시 한번 놀란 발가락이었다.


“···뭐,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 철목진이가 뭐?”


주변에 몽골인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 발가락이 한마디 했다.


“행여나 몽골 사람 앞에서 그런 식으로 부르진 마라. 불구대천의 원수 취급을 할 테니까.”

“엉, 그러라 그래. 철목진 할애비라도 깝치면 쌍판대기를 갈아줄라니까.”


발가락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 철목진이 내 조상님이 왕 노릇··· 아니,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던 호라즘 제국이란 나라를 인정사정없이 멸망시켰고, 그 뒤에 볼모로 잡혀 온 왕자들 중에 내 조상님이 계셨던 거지. 이제 알겠어?”


득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근데 그게 뭐?”

“···뭐?”

“어쩌라고, 나더러?”


발가락은 굳이 미친개와 말을 섞은 자신에게 소리 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하남성에서 강소성까지의 길은 짧은 길이 아니다. 타고나길 고요와 정적이 천적이었던 발가락은 어린 나이에 백련교의 대호법을 때려잡은 득구에게 큰 호기심을 느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어색한 공기도 좀 흩을 겸, 솟구치는 호기심을 충족시킬 겸 해서 발가락은 득구의 내력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남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는 자기소개부터 해야 정상인 게 아니냐며 핀잔을 놓는 득구에게 성실하게 자기소개를 한 것이다.


“···라는 거 아니겠냐!”

“아, 거, 귀찮게 진짜···.”


득구는 귀가 따갑다는 듯, 귓구멍을 후비적대면서 말했다.


“노비에 고아야. 됐어?”

“···고아라고? 이거, 미안하게 됐네···. 괜히 물어봤지? 미안.”


발가락이 머쓱해하며 뒤통수를 긁적이자, 득구는 손을 휘휘 내젓더니 물었다.


“두목 할배는 뭔가 이것저것 많이 알더만. 댁은 왜 몰라?”

“아, 울 왕초야 뭐, 중원에서 아는 게 가장 많은 양반이고 우리 식구 중에서도 그런 양반이 몇 있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니까 말이다.”

“흐응···.”


이제야 좀 흥미 있는 이야기가 나온 모양인지, 득구의 자세가 변했다. 그걸 본 발가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성깔이 사납고 생각하는 게 영 모를 놈이긴 하지만 이런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가 맞잖나?


“그러고 보니까, 그 거지 형(乞兄)인가 거지 사냥(乞獵)인가 하는 할배랑 두목 할배랑은 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음? 아아, 걸협 어르신?”

“어, 그 할배.”

“내 참.”


걸협 구정삼은 강호무림에서만 영웅이 아니라 천하에서도 영웅이다. 그런 구정삼을 이 할배, 저 할배, 하고 앉았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좋아, 걸협 어르신이 어떤 분이신지부터 좀 알려줄까?”

“아니, 그건 관심 없다니까. 그냥 두목 할배랑 무슨 사이인지를 말하라고.”


득구가 뭐라고 어깃장을 놓든 발가락은 촉새처럼 나불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말에 묶인 상태인지라 어디 딴 데로 도망도 못 치고, 떨어질까 봐서 양손을 떼지도 못하는데, 네가 뭘 어쩔 것이냐? 하는 행태인 셈이다. 득구도 두고 보자며 이를 갈긴 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계묘혈사로 온 천하가 흉흉해지고 황실에선 엄숭 같은 천하의 역적, 벼락 맞을 간신배 놈이 득세하니까, 하늘이 노하신 표라는 소문까지 돌았단 말이지. 결국엔 궁뎅이가 무거운 황실에서도 백련교도에 대한 토벌 명령을 내렸단 말씀이야.”

“아, 그 주먹질이 아주 무식한 할배 얘긴 다 안 해줘도 된다니까? 옘병···.”

“그 당시에 백련교를 토벌하기로 한 토벌대의 대장이 바로 하남성의 도지휘사에 갓 취임한 홍수덕 장군이었단 말이지.”


그때 득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그런데 말이야, 이 홍수덕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냐 하면···.”

“아니, 잠깐만!”

“엉?”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색을 한 득구의 표정에 발가락이 말을 멈췄다.


“누구라고?”

“···홍수덕 장군?”

“그 새끼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발가락은 기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산길을 넘는 중이라, 득구의 말이 들리는 범위 안에는 네 발로 걷는 동물은 있어도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없는 것 같았다.


“야, 이 미친···! 도지휘사를 새끼 어쩌고 부르는 미친 짓거리를 잘도···! 그런 소릴 함부로 지껄이다간, 너뿐만이 아니라 너랑 같이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죄다 모가지가 썰려 나간다고!!”


식겁했던 발가락이 왈칵 성질을 냈지만, 득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놈이 뭘 어쨌다고?”


발가락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철목진, 칭기즈 칸은 몽골인 앞만 아니라면 뭐라고 부르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대명천지 한복판에서 몽골인을 만나는 건 썩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도지휘사는 다르다.


도지휘사(都指揮使)는 정2품의 벼슬로, 한 성의 군정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다. 대명제국 전체의 군정을 책임지고 지휘하는 두 명의 도독(都督)을 제외하면, 도지휘사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남성으로만 한정하자면, 도지휘사는 그야말로 하남성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왕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도지휘사를 욕하는 소릴 들으면 군부에 고해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이자 상식인 것이다. 홍수덕 장군이 엄숭처럼 누구든 욕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천하의 악적이 아닌 마당에야 그걸 들은 사람이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감춰줄 이유도 없다.


다시 말해, 지금 득구는 내 목을 잘라주쇼, 외치고 돌아다니는 꼴인 셈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제발 자중이란 걸 좀 해라. 정천호도 아니고 도지휘사를 이놈, 저놈 불러대면 모가지가 열 개라도 부족하다구.”

“한번 잡아가 보라 그래. 상판대기를 갈아엎어 줄 테니까.”

“너 말고 나 말이야, 나! 이 자식아! 아주 거지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르냐? 엉?!”


득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발가락의 말투와 행동이 마치, 성채와 자주 보러 가던 각설이패 거지들처럼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열이 오르던 중이었지만, 웃음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깨진 탓에 굳은 얼굴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던 득구는 한숨을 폭 내쉬고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뭐, 알아서 해.”

“아, 네가 입조심을 하면 되는 문제 아냐, 네가!”

“이 주둥아리가 내 맘대로 닥쳐지는 거면, 여태까지 미친개란 소리를 듣고 살았겠어?”


발가락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득구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고, 얼른 아까 그 얘기나 계속해봐. 뭐라고?”

“···크흠, 그래.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뭐, 계속 얘기하도록 하지.”

“쓸데없는 이야기는 덧붙이지 마.”

“이 주둥아리가 네 마음대로 닥쳐지는 거면···.”

“···너 뒤질래?”


발가락은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홍수덕 장군이 토벌대의 지휘권을 잡은 건 조금 복잡한 뒷사정이 있는데···. 어차피 설명해줘 봐야 못 알아들을 것 같고,”

“이게 진짜?”

“아니, 뭐, 못 알아듣는다기보다는, 쓸데없는 이야기라 이거지. 자, 자, 그 주먹은 좀 내려놓으시고요, 어디 보자···! 아, 그래. 간단하게 말하자면, 엄숭의 외조카사위의 둘째 아우 사돈 정도 되는 관계랄까?”

“외조카··· 뭐?”

“그냥 조카사위라고 해두자. 뭐, 크게 다를 건 없어. 어쨌든 이 나라가 혈연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변하지 않잖아?”

“그건 이해하기 쉬워서 좋구만.”

“여하튼··· 본래 군부에서 천거한 인물은 척경통 장군이었는데, 엄숭의 뒷배로 이 홍수덕 장군이 지휘봉을 잡게 되었지. 사실 홍수덕 장군이 그걸 맡을 깜냥이 안 된다는 거야 적갈패 사태만 봐도 충분히 알겠지만···. 그때는 그 일이 있기 전이었으니까, 뭐.”

“됐고,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 본론만 말해, 본론만.”


여전히 냉담한 득구의 태도에 발가락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 나 참. 기본이 안 됐구만, 기본이. 원래 이야기란 이렇게 썰(舌)을 먼저 좀 풀어주고, 엉? 그 뒤에 찬찬히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보면서, 엉? 하나하나 씹고 뜯고 맛보는 재미가···.”


말하다 말고 득구의 눈을 본 발가락은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벼린 득구의 눈깔이 자신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갠 다음 하나하나 씹고 뜯고 맛볼 것 같다는 느낌이 든 탓이다.


“···알았다, 인마. 애새끼가 아주 성질머리가··· 어휴.”

“됐고! 어떻게 됐는데?”

“대패했지. 당연히. 백련교도의 군세랑 한판 붙고선 와해도 아니고, 고대로 전멸당하게 되먹은 걸 천검이랑 검귀가 구해줬지. 야인(野人)이라고 무시하던 자들에게 목숨을 구원받─”

“···엉? 방금 뭐라고?”

“천검이랑 검귀가 구해줬다고.”


득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뭔 소리야?”

“그러니까 천검이랑 검귀가···.”

“검귀가 왜 구해줘? 검귀는 백련교도잖아. 그것도 사독파파 급으로 악랄한 개자식 아냐?”


그 질문을 듣고서야 발가락은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내리쳤다.


“아! 제길,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뭐라고?”

“그,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면 안 되냐? 이거 말했다는 거 들키면 왕초한테 죽···.”

“이딴 이야기, 어디 가서 내 주둥이로 떠벌릴 일 없으니까, 그냥 말해.”

“아니, 그게···.”


득구는 다시 조용히 발가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벼리고서 노려보는 그 눈빛에 발가락이 결국 손을 들었다.


“으아, 제길. 약속해라, 너. 진짜 절대 넌 아무것도 못 들은 거다!”

“알았대도.”

“검귀 구운상은 본래 백련교도가 아냐. 오히려 백련교를 대적하는 선봉에 서던 어엿한 영웅 중의 한 명이었지.”

“구···운상?”

“으악?!”


발가락이 자기 입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요놈의 주둥이, 요놈의 주둥이···! 언젠간 일낼 줄 알았어, 젠장···!”


발가락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처량한 표정으로 득구를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물러줄···. 알았다, 젠장맞을···!”

“구운상이면, 할배랑 관련 있는 거냐? 같은 구 씨인데?”

“···여기까지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맞아.”


발가락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했다.


“검귀 구운상은··· 걸협 어르신의 친아들이야.”

“그래? 그랬구만.”


생각보다 별로 놀란 것 같지 않은 득구의 태도에 발가락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득구를 쳐다보았다.


“뭐야, 생각보다 안 놀라는데?”

“내가 그거에 놀라야 할 이유가 있냐?”

“아니··· 너도 검귀가 어떤 인물인지 정도는 알잖아? 사독파파에 이어 무림 공적 2호가 된 강호의 배신자. 백련교에 투신하면서 그 이전의 행적이 모두 말소당해 이제는 ‘검귀(劍鬼)’란 별호만 남은 존재가─ 천하의 영웅인 걸협 어르신의 친아들이라는데··· 그게 놀랍지 않다고? 거기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득구는 피식, 웃었다.


“할배도 빡시게 살았으니까, 할배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할배가 나한테 직접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한테 이러쿵저러쿵 듣고 싶진 않아.”


발가락은 놀란 표정으로 득구를 쳐다보았다. 분명 방금까진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애새끼에, 상식과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모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다른 사람의 개인사를 타인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좋게 말해도 뒷담화에 불과하다. 특히나 걸협과 검귀처럼 안타까운 사연으로 서로를 적대시하게 된 부자(父子)의 이야기는 심심풀이 땅콩이나 술자리 안주로 씹을 거리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구운상’의 이야기를 천하에서 지워버린 건 염천호였다. 구정삼이 구운상의 일로 호사가들의 안줏거리가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어쩌면─ 나는 이 득구라는 소년을 조금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구정 할배 이야기에 검귀가 왜 튀어나왔는지는 이해했으니까, 빨리 아까 홍수덕, 그 씨발놈 이야기로 돌아가 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


오해 아니네. 맞네. 미친개···.


“뭐? 그 눈깔 뭐야? 뒤지고 싶어?”

“그, 그래. 좋아. 알겠어.”

“그래! 얼른 말하라구!”

“백련교도와의 싸움에서 참패한 홍수덕 장군은 패전 사실이 엄숭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끔 술수를 부렸어. 숭산 등봉현 북쪽에 꽤 규모가 있는 집성촌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마을이 사실은 백련교도의 본거지라는 거짓 보고를 올렸지.”

“···?”


득구는 눈썹을 비틀었다. 왜 거짓 보고를 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 집성촌이 백련교라고 구라를 쳐?”

“패배한 장군에게 필요한 게 뭐겠어? 달콤한 승리가 아닐까?”


잠시 머리를 굴리던 득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가 일어날 뻔했지. 우리 왕초가 그 첩보를 입수 못 했다면 아마 그 마을 사람들, 다 죽었을 거야. 대략 4,000명쯤 되는 사람들이 전부, 몰살당했겠지.”


득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때 나선 게 거지 할배였다?”

“맞아. 홍수덕 장군이 이끄는 관군 800명이 집성촌을 포위한 그때─ 어르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야. 홍수덕 장군도, 그의 군사들도 바로 수일 전에 천검과 검귀를 봤으니, 어르신을 그냥 괄시할 수 없었지. ‘절대고수’의 무위가 어떤 수준인지 그 몸으로 겪어본 참이잖아?”

“···그 할배가 대단하긴 했지.”


득구도 고개를 주억이며 그 무지막지한 할배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구정삼은 딱 한 번의 발 구름으로 십수 명의 왈패 놈들을 날려버리는 가공할 무위를 선보였었다. 득구의 눈으로도 뭘 어떻게 한 건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무위였다.


그리고 그 영감이 던진 선문답 한 마디, ‘일견 굽은 길이나, 필경 곧은 길이 있다’는 한 마디에 득구는 ‘무(武)’라는 것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선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달구 녀석과 그 패거리 놈들이 줄창 떠들어대던 ‘기연’ 같은 게 아닐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다. 음, 아니 확실하다. 이걸로 달구 놈을 조롱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에 득구는 기분이 확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강룡신보(降龍神步). 용이 깃든 아홉 걸음이라고 하지. 어르신의 성명절기인 항룡신장(降龍神掌)의 보법이야. 딱 아홉 걸음 만에 홍수덕 장군은 항복을 선언했어. 주먹 한 번 내지 않고, 그저 아홉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말이야! 대단하지 않아?”

“대단하긴 했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냐?”

“걸협 어르신은 그런 분이셔. 무고한 양민이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피를 볼 일이 생겼을 때 주저하지 않고 나서는 분이시지. 그 대상이 황실이 임명한 대장군일지라도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물어본 건···.”

“물론, 홍수덕 장군도 뒤끝 없이 물러난 건 아니었어. 명분도 잃어버렸고, 그 자리에서 아무도 죽은 이가 없었으니까, 앞으로는 그저 웃으며 오해가 있었다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소문을 이상하게 내더라고. 걸협 어르신이 백련교도의 편에 서서 관군을 패퇴시켰다는 소문을 내더라니까? 어르신이 워낙에 협행으로 유명한데다, 백련교 척살에 앞장선 영웅이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어르신이 백련교에 투신했단 소문까지 날 뻔했지. 아주 위험했다, 이 말이야.”

“···나중에 두고 보자. 넌 진짜 뒤졌다.”


득구는 눈을 부릅뜨고 씹어먹을 듯이 발가락을 노려보았지만, 발가락은 모른 척하며 실실 웃었다. 아, 이제 좀 개운하다. 역시, 사람은 가끔 수다를 떨어줘야 한다.


“아, 처음 물어본 게 뭐였지? 걸협 어르신이랑 왕초의 관계?”

“···이젠 안 궁금해!!”

“그래? 재미없게. 쯥, 그냥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대. 아니, 친구보단 너랑 달구 사이 같은?”

“씹···!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걸, 지금···?!”


발가락은 득구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 얼른 말을 끊고 물었다.


“그런데, 홍수덕 장군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그놈이랑은 아무 일 없었는데?”


득구는 미간을 좁혔다.


“볼 일이 있는 건 그 인간의 좆같은 아들내미 쪽이지. 홍수덕이 아들, 홍위윤이한테는 빚이 있거든.”

“빚? 무슨 빚?”


득구가 싸늘하게 벼린 눈으로 말했다.


“감자, 하나.”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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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21화.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 (1) +1 23.11.15 633 10 14쪽
74 20화. 시우십결(時雨十訣) (4) +1 23.11.14 615 10 16쪽
73 20화. 시우십결(時雨十結) (3) +1 23.11.14 583 9 13쪽
72 20화. 시우십결(時雨十結) (2) +1 23.11.13 612 12 15쪽
71 20화. 시우십결(時雨十結) (1) +1 23.11.12 647 12 15쪽
70 19화. 아우를 위하여 (2) +1 23.11.11 589 12 16쪽
69 19화. 아우를 위하여 (1) +1 23.11.10 590 6 16쪽
68 18화. 탐랑(貪狼) (5) +1 23.11.09 582 12 16쪽
67 18화. 탐랑(貪狼) (4) +1 23.11.08 583 12 16쪽
66 18화. 탐랑(貪狼) (3) +1 23.11.07 577 7 15쪽
65 18화. 탐랑(貪狼) (2) +1 23.11.07 573 8 9쪽
64 18화. 탐랑(貪狼) (1) +1 23.11.06 623 9 17쪽
63 17화. 타초경사(打草驚蛇) (2) +1 23.11.05 600 10 15쪽
62 17화. 타초경사(打草驚蛇) (1) +1 23.11.04 654 9 18쪽
61 16화. 관화(關和) (2) +1 23.11.03 625 9 16쪽
60 16화. 관화(關和) (1) +1 23.11.02 634 10 15쪽
59 15화. 선(線) (5) +1 23.11.01 643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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