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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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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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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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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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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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창세기

DUMMY

그 명령대로, 서주가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은 어느 때보다 경건해 보였고, 두 손마저 모은 채였다.

불안함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예현은 이 모습을 보고선 수도꼭지를 올렸다.

차가운 물이 샤워기에서 서주에게로 쏟아졌다.

말간 액체가 곧 머리와 옷을 적셨다.

값비싼 셔츠는 추욱 늘어져서 몸에 달라붙었고, 점차 피부가 옅게 비친다.

한기가 등골을 훑자, 작은 입술에선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윽.”


이제 가을이 한창 깊어질 무렵.

사실상 초겨울이기도 했다.

당연히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한들, 화들짝 놀랄 정도로.


게다가 그건 앞으로 더 심해질 터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 처음 옷이나 머리카락에 물이 닿으면 공기층 때문에 겉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다 물이 새듯이 안쪽으로 파고들수록 더 많은 냉기를 맞닥뜨리고 만다.

빼앗기는 체온 역시 점점 커진다는 뜻이다.


“목사님···.”


서주가 예현을 불렀다.

닥쳐올 고난을 예감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돌아오는 건 격려의 말 따위가 아니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첫 번째 문장부터 빠르게.

일부러 늦게 외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남은 내용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여기까지 읽고 와인잔으로 핏물 한 잔을 떠냈다.

그리고 찰랑이는 붉은 액체를 서주에게 부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빨간 찰랑임이 물줄기에 녹아들었다.

진했던 피가 퍼져나가, 잠시나마 서주를 붉게 뒤덮는다.


“하아···.”


그게 감격스럽기라도 한지, 짧은 신음이 입김처럼 나왔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커다란 대야, 이제 겨우 한 번 핏물을 부었을 뿐이다.

아직 남아있는 피도, 넘기지 않은 책장도 많았다.

낭독은 계속되었고 차가운 물줄기는 끊이지 않고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렸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체온을 많이 빼앗겨서일까?

서주는 서서히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춥다’를 넘어선 증상이다.

슬슬 근육마저 굳어갈 테지.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예현은 곁눈질하다가 와인잔으로 핏물을 한 잔 떠낸다.

그리고 굳어있는 서주의 머리 앞쪽을 향해 느릿하게 붓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새빨간 액체는 아까도 그랬듯 넓게 퍼진다.

두피 안으로 스몄을 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를 쓸어내린다.

당연히 기도하던 서주의 눈에도 언뜻 붉은 빛이 비쳤을 테지.


“아아···.”


다시 서주는 느릿한 신음을 흘렸다.

잠시나마 굳었던 몸이 떨리고 흐려졌던 눈빛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 새가 날으라 하시고.”


의식은 계속되었다.

예현은 연이어 창세기를 읊었고 차가운 물은 서주를 더욱 얼려버린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과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그러다 정신이 멍해지려는 찰나에 붉은 피를 붓는다.

새빨간 물결이 한바탕 휩쓸면, 눈동자는 한결 더 또렷해진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리라.”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핏물이 퍼져나간다.

셔츠엔 붉은 염색이 겹겹이 덧칠되어간다.

옷감 너머에 비치는 피부에는 분홍빛이 덧씌워진 듯했다.

혈액 특유의 비린내 역시 은밀하게 풍겨온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핏물이 퍼져나간다.

이제 서주는 붉은 물결이 휩쓴다고 하더라도 눈빛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입으로 예현이 하는 말을 부분부분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기나긴 창세기가 퍼져나간다.

예현은 성경을 몇 시간을 걸쳐 읽어나갔다.

핏물이 한 번, 두 번, 대여섯 번이 쏟아진다.

그러자 작은 입술은 더욱 달그락대며 창세기에 화답한다.


지루한 창세기가 잦아든다.

신화에서 인간이 뚜렷해지고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난다.

핏물은 열댓 번, 스무 번, 서른 번이 쏟아진다.

작은 입술은 어느덧 움직임이 잦아 들어간다.

입도 달싹이기 힘들 만큼 체온이 빼앗겼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끝났다.

성경을 외던 목소리는 쉬어버렸고 얼굴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타인을 훔치지 못하는 동안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서주는 더 상태가 안 좋아졌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기도하던 상태로 굳어있었다.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는 모습은 시체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셔츠는 핏물로 붉어졌고, 그나마 멀쩡한 곳도 누런 기름으로 얼룩졌다.

예민한 옷감은 얼핏 보기에도 심하게 우글거린다.

드라이클리닝으로 살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의식을 함께 견딘 성물이니, 이 상태 그대로 모셔두겠지만.


“괜찮니?”


예현이 수도꼭지를 누르고서 서주에게 다가갔다.

얼어붙은 몸은 아예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저 입만 겨우 달싹일 뿐.


다급한 상황이다.

예현은 수건을 있는 대로 꺼내서 젖은 몸을 덮었다.

돌이라도 된 듯 기우뚱대지만, 눈꺼풀은 몇 번 깜빡인다.

다행히도 아직 의식은 있었다.


“추, 추어···.”

“잘 견뎠다. 곧 괜찮아질 거란다.”

“살려···.”

“그럴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질러서 닦는다.

그리고 완전히 식은 몸을 껴안아, 체온으로 데웠다.

멈추지 않고 팔다리를 주물러서 근육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선 아직 너를 데려갈 계획이 없단다. 보렴, 내가 너를 꼭 붙잡고 있지 않니?”

“네에···. 믿어요···.”


극한의 상황.

서주는 오직 한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적이고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애착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린양아. 나를 믿거라. 나만이 너의 구원자이니.”



***


시곗바늘이 자정을 훌쩍 넘겼다.

당연한 일이다.

예배만 해도 늦은 저녁에 끝나는데, 그런 의식까지 치렀으니.


서주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잠이 들었다.

아래에는 전기장판을 켜고, 위로는 이불을 덮은 채였다.

워낙 힘겨운 과정이었던 만큼 모든 체력이 소모된 모양이다.

사실상 졸도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디, 암호가···.”


예현은 그동안 주변 정보를 파악 중이다.

우선, 스마트폰.

다행히 비밀번호는 걸려 있지 않았다.

중년 중에 암호나 패턴을 번거로워하는 사람은 많은 덕이다.


더욱이, 안에는 필요한 자료가 제법 많았다.

연락처는 기본이고 금고 비밀번호까지 존재했다.

잠금도 안 하는 사람이 이런 건 또 꼼꼼히 흔적을 남겨뒀다.

혹여 잊을까 걱정이라도 됐던 모양이다.

하긴, 나이가 들수록 메모하는 습관이 생기기 마련이니.


“통장에, 장부, 도장, 문서 봉투라.”


구석에 숨겨두다시피 있는 금고는 열려 있다.

예현 앞에는 중얼댔던 물건이 나뒹군다.

개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녹호’로서는 죄다 무시할 만한 푼돈이겠지만.


“일단 챙겨는···”

“으으으···.”


그때, 신음이 들려왔다.

서주가 졸도에 가까웠던 잠에서 깨어난다.


“일어났니?”

“···네, 목사님.”

“일찍 일어났구나. 피곤해서 잠을 설쳤니?”


예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 억지로 일어나면서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몸이 얼었다가 녹았으니 전신이 아플 거란다.”

“병원에 갈···.”


차림이 달라졌다.

녹호에게서 받은 옷 대신 펑퍼짐한 의례복으로.

그 사실을 깨닫자 서주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입던 옷은 말리고 있단다.”

“아···.”


그 셔츠를 계속 입고 있을 수 없었겠지.

핏물에 푹 절어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렴. 그런 일 따위 없었단다.”

“네. 기억나요. 목사복을 위에 입고 안에서 벗었으니까···.”


쾅, 쾅, 쾅!


갑자기 멀리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감을 따져봤을 때, 교회 정문에서 나는 듯했다.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저기요! 나와봐요!”


방금 소리가 났던 대로, 밖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주욱 뻗은 키는 언뜻 남자처럼 보였지만, 가는 허리는 분명 여자였다.

흔치 않은 체형이다.

그렇기에 단 한 번만 만났더라도, 도플갱어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게나.”

“이모, 여기 있어요?”


녹호가 서주와 소파에서 대화하고 있을 때, 조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특이한 경우였다.

기억이 나는지, 예현이 잠금장치를 풀면서 중얼댔다.


“그래, 방인영이었나?”


인영.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박인영’이고요, 제 이모한테 연락이나 해주시겠어요? 어제 여기 왔다가 집으로 안 돌아왔는데?”


‘방’씨가 아니라 ‘박’씨였던 모양이다.

하긴, 이모라고 불렀으니 외가라고 보는 게 맞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도 된다네.”

“여기 온 거죠? 어디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게나. 오늘은 평일이니 일정이 있지 않은가?”


인영이 표정을 굳혔다.

돌아오지 않은 이모, 어제 갑자기 사이비 교회에서 외박했단다.

최근 집에 일면식도 없는 남자를 끌어들였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다.

이런 징조가 계속 보이는 상황이라면, 당연하게도 불안한 상상이 스칠 수밖에 없었다.


“···빨리 불러와, 우리 이모.”


작가의말

공지에도 썼던 말이지만, 여기서 영감을 받아서 비슷하게 써보자는 생각은 절대 하시면 안 됩니다.

1. 걸리면 진짜 문제고

2. 풀 줄을 모르니 더 문제며

3.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서 혼자 해결 자체가 불가능하고

4. 세뇌는 명령 입력뿐 아니라, 상식의 파괴도 포함하기에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릅니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합리화를 하며 살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소설은 소설로만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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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화. 엄벌주의 +1 24.01.24 58 1 13쪽
27 27화. 욥 +1 24.01.23 64 1 12쪽
26 26화. 고래 사이 새우 +1 24.01.22 63 1 12쪽
25 25화. 사이비 목사가 될 준비 +1 24.01.19 69 1 12쪽
24 24화. 벌이가 괜찮은 사이비 +3 24.01.18 77 1 12쪽
23 23화. 가정 파탄 +1 24.01.17 80 1 12쪽
» 22화. 창세기 +1 24.01.16 79 1 12쪽
21 21화. 세뇌의 시간 +1 24.01.15 90 1 13쪽
20 20화. 독대 +1 24.01.12 94 1 12쪽
19 19화. 쥐와 고양이 +1 24.01.11 93 2 14쪽
18 18화. 없는 사람 +1 24.01.10 100 2 13쪽
17 17화. 목을 조르다 +1 24.01.09 113 3 12쪽
16 16화. 천선분식 +1 24.01.08 113 2 13쪽
15 15화. 악마를 낳았다 +1 24.01.05 127 2 12쪽
14 14화. 달동네 +1 24.01.04 124 2 12쪽
13 13화. 훌륭한 사람 +1 24.01.03 130 2 13쪽
12 12화. 죄를 지었으면 +1 24.01.02 137 2 12쪽
11 11화. 의심 +1 24.01.01 136 2 12쪽
10 10화. 게임 +1 23.12.29 156 2 12쪽
9 9화. 장난감 만들기 +1 23.12.28 177 2 11쪽
8 8화. 탐색 +1 23.12.27 194 2 13쪽
7 7화. 도둑 +2 23.12.26 21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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