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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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CE
작품등록일 :
2024.01.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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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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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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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우리는 예언으로부터 조국을 지킨다 (3)

DUMMY

-


"지도는?"

"챙겼어."

"돈은?"

"챙겼어."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알아, 안다고. 왕실 마법사인 오멜 마나필드의 이름을 댄다."


마치 강가에 아이를 보내는 엄마라도 된 듯 오멜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변을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았다.

아무리 내가 기억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린 애도 아니고 당사자인 나보다 더 걱정을 하고 있어서야··· 나도 긴장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부산스럽게 소란을 피우는 오멜을 보니 그럴 마음도 싹 사라져버린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엘리샤를 봤는데 그 애도 성벽 거점에 간다고 하더라. 너랑 같이 이동하는 건 아니지?"

"계속 말했지만 나는 혼자서 행동한다니까. 엘리샤는 아마 다른 왕성 메이드들이랑 같이 거점에서 자재 정리를 할 거야. 조리장님 심부름 끝나고 거점으로 합류한 후에야 엘리샤를 볼 수 있으려나."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오멜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아무튼 갔다 올게. 이따 저녁에 봐. 너도 기사단 일로 가봐야 한댔지? 언제 갈 거야?"

"응, 그래야지··· 앗, 지금 몇 시야?"


오멜은 그제서야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책장 뒤로 사라졌다.

저렇게 나사 하나 빠져 있는 녀석이 이 왕국의 수석 마법사라니. 성격을 뛰어넘을 정도로 마법사로서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걸까. 여태 전속 없이 어떻게 생활했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나는 왕성을 나섰다.


놀라울 만큼 좋은 날씨였다. 요 며칠 비가 올 것처럼 줄곧 날씨가 흐렸는데, 오늘 아침 기가 막히게 하늘이 맑게 갰다. 산책하기 정말 좋은 날씨다.

···뭐, 정말로 산책만 하는 거였다면 이 날씨를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겠지만.


"...수고하십니다."


왕성 내벽 남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나는 조마조마한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당당함을 연기하며 한 발짝을 내딛었다.

이전에 예언석을 보기 위해 한 번 나온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성문의 코앞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엘리샤와 함께였다. 사실상 왕성 밖을 나서는 첫 발자국이다.

뭔가 미묘한 기분이었다. 만약 내 기억이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정말로 이렇게 하나씩 새로운 경험을 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이전까지의 내 삶을 잃고 그렇게 새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오늘까지도 어떠한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는 거다. 머리로는 슬프지만 마음은 슬프지 않은, 정말로 미묘한 기분이었다.


"...니까 한 잔 마시고 가자고!"

"...대낮부터?"

"...팝니다! 구경하고 가세요!"

"...아하하하!"


왕성 바깥의 풍경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낯설었다. 세상은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혹시나 했지만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며 새로운 것을 마주치는 설렘과 두려움만이 가슴속에서 가득 올라올 뿐이었다.


큰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간이 천막들과 활짝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상점들. 그리고 그 앞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젠탈리온 왕국에 대해서 오멜의 도서관에서 꽤 여러 책을 통해 규모가 꽤나 큰 왕국이라는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다. 특히나 젠탈리온의 왕도 역시 주변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로 유명하다. 그러나 글자 이상으로 내 눈으로 본 왕도의 풍경은 더욱 생생했고 북적였다.


'나이트메어의 저주가 젠탈리온에 있을 것이다. 젠탈리온에 거주하는 모든 이는 그 평생에 드래곤으로 고통받을 것이며 그들의 아들이, 그들의 딸들이 드래곤에게 죽을 것이다.'


젠탈리온의 이 많은 사람들은 예언석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태껏 발버둥 치고 있었다는 거다. 최소한 그 예언이 자신들의 세대와 그 자녀들의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게 한다. 젠탈리온의 드래곤 나이트는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도 드래곤 나이트가 되어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자격과 능력이 될까. 내 가족의 복수라고 하기에는 나는 그 복수의 마음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피해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복수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저기··· 에스마이어씨? 계신가요?"


지도를 읽으며 낯선 주변 건물들과 거리를 신중하게 살피고 장님처럼 띄엄띄엄 길을 따라가니 간신히 대장간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안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부르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에스마이어이다만. 어쩐 일이신가?"


에스마이어씨의 얼굴에는 지저분하게 난 덥수룩한 수염 위로 숯검댕이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덩치도 마치 곰을 보는 것처럼 큰데다 헤진 옷 사이로 보이는 근육들까지 굉장히 야생적인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 옷을 보니 왕성의 메이드구먼. 조리장이 칼을 부탁했었지?"

"네, 조리장님의 건으로요. 다 됐을까요?"

"물론. 잠깐만 기다리시게."


에스마이어씨는 물건을 찾으시려는 듯 다시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들어가셨다. 대장간 안을 슬쩍 보니 완성된 농기구라든지 무기라든지가 복잡하게 걸려 있기도 했고 바로 옆에 작업하시는 곳이 있어 쉽게 발을 딛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도 에스마이어씨는 그 큰 덩치로 어떻게 다니시는지 요리조리 피하며 물건을 찾으시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카터는 잘 지내는가?"

"조리장님··· 말씀이신가요?"

"어어, 조리장. 이제는 카터 조리장님이라 불러야하겠구먼. 실수했네."

"조리장님을 잘 아시나 봐요."

"허허, 그럼. 조리장님과는 20년 전에 왕실 기사단에서 같이 일했었으니까."

"네? 왕실 기사단에요? 에스마이어씨랑 조리장님이 왕실 기사단에 계셨나요?"

"그렇기는 한데 둘 다 기사단원은 아니고 지원 부서였지만. 지금이랑 크게 달랐던 삶은 아니었지. 나는 기사단의 무기를 손보고 조리장님은 음식을 하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왕실 물품들을 납품하며 연명하고 있으니까, 라고 에스마이어씨는 덧붙였다.

인연이라고는 하셨지만 왕실 기사단 소속이었다는 것은 적어도 젠탈리온에서 손에 꼽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듣기로는 젠탈리온 안에서 정말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만 기사단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강한 목적의식이 있는 이들 중 특별한 능력을 가졌거나 필요한 재능을 가졌다면 드래곤 나이트가 될 수 있다.


"굉장한 실력자셨네요···"

"그렇게 안 보였지? 자랑아닌 자랑을 하자면 내 작품에 대해서 최고의 것을 만든다는 자부심은 있다고. 자네는 왕성 메이드가 맞지? 이름도 아직 안 물었구만."

"루비입니다."

"루비. 성은?"

"성은···"


말문이 턱 막혔다. 기억도 잊었고 성도 잊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자니 너무 얘기가 길어지고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 그렇게 좋은 방법도 아닌 것 같았다.


"...마나필드. 루비 마나필드입니다."

"루비 마나필드. 기억했네. 나는 레이번 에스마이어(Raborn Esmeyer)."


에스마이어씨의 곰 같은 손에 내 손이 잡혀서 반쯤 강제적으로 위아래로 휘저어졌다.

사실 마나필드는 오멜의 성으로, 이렇게 남의 성을 빌린 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다른 성씨가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무심결에 마나필드라고 말해 버렸다. 다음에 둘러댈 성을 하나 정도는 미리 생각해 두어야겠다고 늦은 다짐을 했다.


악수 후에 바로 에스마이어씨는 하얀 천으로 단단하게 감싸놓은 주방용 칼을 건네주었다. 이걸 무사히 가지고 조리장님께 전달하기만 하면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무리하는 거라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 만나서 반가웠네. 조리장님께는 이 레이번이 안부 물었다고 전해주게."

"그럴게요. 감사했습니다, 에스마이어씨!"


-


그렇게 에스마이어 대장간에서 받은 물품을 가방 속에 단단히 넣어 둔 후, 나는 지도를 따라 최종 목적지인 거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거점은 왕도 동북쪽 외벽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대장간으로부터 그렇게 먼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깝지만도 않은, 꽤 한동안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행인 점은 가는 길이 외벽을 따라 북쪽으로 쭈욱 올라가는 길이고 외길에 가까워서 크게 헤맬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저게 소문의 외벽이구나."


대장간에서 얼마를 걸었을까. 마지막 가게를 뒤로하며 상점가를 벗어나니 탁 트인 벌판과 함께 저 멀리 젠탈리온 왕도를 둘러싸고 있는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몇 번이나 오멜의 도서관에서 이미 책으로 보고 자세한 설명도 읽었었지만, 역시 실제로 보는 것은 그 이상의 압도감을 주었다.

높이가 얼마나 될까.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굉장히 높아 보이는데 바로 코앞에서 올려다보면 훨씬 더 까마득할 거다.

역시 한 왕국의 왕도를 방어하는 외벽이라 그런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사람은 당연하고 웬만한 몬스터들도 이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책에서는 이 외벽을 건설하는 데에 당시 최고의 마나공학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했다. 확실히 이 정도의 벽은 순수한 사람의 손만으로는 쌓아 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나저나 외벽 보수라고 했지. 이 정도의 성벽에 수리나 보수가 필요할지 잘 모르겠다. 몬스터라는 것은 그렇게나 강한 걸까? 아니면 그 몬스터 카니발이라고 하는 것이 이 정도의 성벽을 쌓아 올리고도 여전히 위험한 걸까?


"오빠! 너무 세게 찼잖아!"


공터에서 어린 남매 둘이서 공놀이를 하다가 흐른 공이 내 쪽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왔다.

열 살 정도의 어린 남매였다. 굴러온 공이 내 발을 툭, 치고 멈춰 서자 두 명은 조금 긴장한 듯 먼발치에서 내 눈치를 본다.


나도 잊어버린 기억 저편에는 형제자매가 있었을까? 외동이었다면 조금 쓸쓸했을 것 같으니까 개인적으로 누구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거 같다.

하지만 결국 오멜에게 발견된 것은 나밖에 없었다. 차라리 혈육이 없기를 바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죄, 죄송해요.”


순간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공을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남매들은 조금 긴장한 듯 가만히 서있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아이들을 겁먹게 하는 취미는 없으니 나의 선함을 강조하는 미소를 힘껏 지어서 보여준 후 공을 던져 주기 위해 집어 올렸을 그때였다.


-우지직!


그건 마치 커다란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무게를 간신히 버티던 고목의 허리가 일순간 끊어지는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눈앞의 대지가 일자로 찢어지더니 밟고 있던 땅이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젠장-"


나 혼자 물러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비명을 지르며 균열에 휩쓸리기 직전의 남매에게 뛰어들어 한 손씩 목덜미를 낚아챘다.

땅에 몸이 내동댕이 쳐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흙먼지와 후폭풍이 몸 위를 내달렸다.


"...너희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껴졌지만 아마도 단 몇 초였을 거다. 정말 다행히도 뿌옇게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아이들이 다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기껏해야 조금 긁힌 정도일 거다.


"공이···"

"공은 이제 됐어. 둘이 손 꽉 잡고 집으로 뛰어가! 오빠니까 동생 잘 챙길 수 있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겁을 먹은 건지 우물쭈물하는 아이들에게 뛰라고 소리치니 그제서야 서로 손을 꽉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 몬스터야! 몬스터가 어떻게 왕도 안에···”

“꺄아악···!”

“도망쳐! 다들 도망치게! 경비대를 불러!”


아이들이 무사히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상황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뒤집어진 땅과 폭발하듯 뭉개진 공터. 그리고 그 균열에서 나타난 것.


-그곳에는 커다란 벌레가 있었다.


작가의말

다이나믹한 첫 번째 장면입니다.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건 쓰는 입장에서도 재밌네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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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우리는 예언으로부터 조국을 지킨다 (3) 24.02.01 9 0 12쪽
7 #02. 우리는 예언으로부터 조국을 지킨다 (2) 24.01.29 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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