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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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CE
작품등록일 :
2024.01.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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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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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저주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2)

DUMMY

-


"고생했네.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여기까지 하지."

"고··· 고생하셨습니다."


펜하임님의 말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가 바닥에 주저앉지 않도록 간신히 부여잡았다.


펜하임님께 훈련을 받기 시작한 지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이 시간 동안 훈련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몸을 움직이는 방법이 처음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만약에 훈련을 해도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면 나는 포기할 생각이었다. 순전히 나의 욕심으로 시간을 버리느니 메이드로서의 생활에 착실하게 몰두할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금 초조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네는 판단력이 굉장히 좋아. 처음에는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움직이기 전에 먼저 계산을 하고 있지?”

“계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제가 그 정도로 똑똑하지도 않고요.”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지는 말게.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니까.”


별것 아닌 이야기처럼 말씀하셨지만, 칭찬에 박한 펜하임님께 이건 엄청난 칭찬이다.

나는 머쓱한 기분에 괜스레 머리카락 끝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머리가 좋아야 해. 스킬을 설계하는 건 마나 레벨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계산을 할 수 있느냐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똑똑하게 움직인다는 건 좋은 신호야.”

“펜하임님께서도 이 정도로 대련 실력이 있으신 걸 보면 굉장히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

“틀린 말은 아니지. 노인네의 육체 능력은 아무리 좋아도 젊은 육체에 비견할 건 못 되니까. 정직하게 움직여서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확실히 펜하임님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다. 그럼에도 함께 훈련을 하며 펜하임님의 검을 받아 내다 보면 나이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말씀대로 정직한 움직임은 아니다. 하지만 강하다. 단순히 힘으로 검을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상대를 제압한다는 싸움의 본 목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시다고 느꼈다.

마법사임에도 이 정도로 검을 쓰시는 걸 보며 어째서 나에게 마법보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먼저 알려주시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목걸이를 차고 있구나."

"물론이죠.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지금은 거의 적응했어요. 거기에 저를 위해서 주신 것인데 제멋대로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표식은 어떻든? 별문제는 없고?"

"네. 그다지··· 가끔씩 손으로 만졌을 때 따끔거리는 걸 빼면 크게 아픈 건 없었어요."

"그건 다행이구만."


이미 해가 저물고 시간이 꽤 지난터라 펜하임님과 나 사이에도 밤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떠오른 달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 사이로 비친 펜하임님의 얼굴은 너무나 따뜻한 표정이셨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계셨던 것이 느껴져서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오멜과 펜하임님 둘 다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펜하임님은 무심하신 듯하지만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오멜에게나 나에게 보이시는 표정과 행동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목에 걸린 파란색 마법석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흔들릴 때마다 달빛이 산란되며 은은하게 반짝이는 것이 아주 예뻤다.


그렇게 훈련장에서 돌아가시는 펜하임님의 등에 마지막으로 꾸벅 인사를 한 후, 먼지로 꼬질꼬질해진 훈련복을 빨리 벗어던질 생각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오멜의 도서관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저게 뭐야?"


왕성 남서쪽에 위치한 훈련장에서 오멜의 도서관이 있는 별관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꽃밭이 있다. 항상 지나다니는 길이라서 그곳에 꽃밭이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늦은 밤에 이곳을 지나는 것은, 생각해 보면 처음이었다.

당연히 보름달이 뜬 날에 이곳을 지났던 적도 없었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우뚝 서서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저 평범한 꽃밭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의 꽃들이 은색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그건 그저 밝은 달빛에 비치는 것이 아니었다. 꽃봉오리 하나하나가 은색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마법이라도 쓴 것 같은 광경이었다. 꽃 모양의 마법석 등불이 바닥에 잔뜩 펼쳐져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내 발은 나도 모르게 길에서 벗어나 꽃밭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었다.


"예쁘죠?"


꽃만 보고 다가갔는데 막상 다가가니 그곳에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서있었다.

나보다 큰 키에 하얀색의 편한 원피스를 입은 우아한 여성이었다. 불쑥 다가온 나를 보고도 놀라지도 않았는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니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원피스 밑단처럼 부드럽게 휘날렸다.

밤이라 또렷하게 이목구비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아주 특이했다. 나긋나긋한, 만약 목소리가 눈에 보인다면 이건 틀림없이 푹신푹신한 양의 털을 잔뜩 모아 놓은 모양일 거다.


“...그러네요. 처음 봤어요.”

“왕성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꽃들은···?”

“보름꽃(Lunar Flower). 특별히 보름달이 뜨면 특이한 빛을 내는 꽃이에요. 밤에만, 더군다나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볼 수 있어서 다들 그저 평범한 꽃밭인 줄 알고 있거든요. 평범한 꽃밭은 그다지 이목을 끌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보름달이 뜰 때면 꼭 찾아오는 저만의 특별한 장소예요.”


따분한 왕성에서 찾아낸 저만의 즐거움이거든요, 라고 그녀는 수줍은 듯 혼잣말로 덧붙였다.


“저도 항상 이 길로 다니고 있었지만 그냥 예쁜 꽃밭이라고만 생각했었어요.”

“남들에게는 비밀로 해줄래요? 이곳이 너무 번잡해지는 건 아쉬워서요.”

“...네, 뭐··· 굳이 말하고 다닐 이유는 없으니까요.”

“당신과 저만의 비밀이 생겼네요.”


후후,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다. 밤이 어두워 정확하게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내가 여태껏 왕성에 있으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임은 확실했다. 이렇게 특이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상대도 내 얼굴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터다. 거기에 나는 막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터라 내 신분을 나타내는 유일한 요소인 메이드복을 입고 있지도 않다. 그저 먼지 투성이에 꼬질꼬질한 기사단용 훈련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나를 기사단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사실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 치고는 너무나 편안하게 말을 거는 그녀에게 조금 당황해버렸다.

기사단을 잘 아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사단으로 보이는 나에게 편하게 대화하는 느낌일까. 왕실 기사단의 지원 부서 쪽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붙임성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때때로 사람의 말과 행동에는 그렇게까지 복잡한 이유가 없을 때도 있으니까. 그저 그 순수한 의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는 말이다.


"이 보름꽃은 말이에요, 젠탈리온에만 자생하는 꽃이래요. 알고 계셨나요?"

"아니요··· 보름꽃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들었어요. 다른 나라에는 없다는 건가요?"

"네. 전혀요. 신기한 일이죠. 전해져오는 전설에 따르면 드래곤의 특별한 마나가 보름달이 뜬 어느 밤에 이 꽃에 흘러 들어갔다고 해요. 그래서 이렇게 신비한 빛을 내는 거라고."


그녀는 앞에 펼쳐진 장관을 내 옆에서 멍하니 바라보며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글쎄요··· 그렇다기에는 드래곤이 젠탈리온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저도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드래곤이 다른 나라에 피해를 입혔다는 기록은 단 하나도 없었어요. 몇 번의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젠탈리온 밖에서 드래곤이 발견되지도 않았구요. 이렇게 되면 전설을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드래곤은 젠탈리온에서만 발견된다.

나는 이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젠탈리온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전설적인 악룡 나이트메어와 같은 역사가 젠탈리온 외에 다른 나라에는 없었다는 거다.

젠탈리온이 주변 다른 나라에 비해 드래곤 나이트라는 아주 강력한 전략적 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과거 나이트메어의 사건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나라에 드래곤에 대한 피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젠탈리온에만 드래곤 나이트가 있다는 말은 다른 나라에는 드래곤을 전담하는 기사단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다른 나라는 드래곤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꽃을 보면서··· 알아요, 정말 예쁜 광경이지요? 이미 여러 번 본 광경이지만 보름달이 뜰 때마다 감탄하고 또 다음 보름달을 기다리게 되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이 꽃을 항상 보러 오는 이유는 드래곤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기 위함이기도 해요. 왜 주변의 많은 나라 중에 하필 우리나라만 괴롭히는지, 나이트메어의 예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고통받고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줄 아는지, 만약 제가 드래곤을 만나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꽃밭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그녀의 옆모습을 보니 아무런 생각 없이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림없이 드래곤에 대한 것이었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드래곤을 되새기고 있었다.


"...저도 앞으로는 이 꽃을 볼 때마다 조금 다른 생각이 들 것 같네요."

"드래곤에 대해서요?"

"네. 뭐랄까··· 저는 드래곤에게 제 가족을 잃었거든요."

"...죄송해요."

"아니요. 그럴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이 꽃밭이 당신과 저의 비밀이라고 하셨죠? 그것 말고도 공유하는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좋았어요. 고마워요."


이 얘기는 오멜과 펜하임님을 빼고서는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조금 주저했지만 어둠이 얼굴을 가려 준 덕분인지, 이상하게 이 사람에게는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말하는 드래곤에 대한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보름달에도··· 꼭 이 자리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꼭 올게요."


여전히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돌아본 그녀의 표정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저는 이제 슬슬 돌아가봐야겠어요. 혼자 오래 나와 있는 걸 들키면 혼날지도 모르니까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가 볼게요. 모처럼이니까 꽃밭의 뒤쪽까지 둘러보고 싶어서요."

"...이야기를 방해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밤중의 우연한 만남을 흘려보내려는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왕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기사 한 분이 계셨다.


"날이 늦었습니다. 지금 돌아가시게 된다면 두 분 같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앗,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기사단 훈련복을 입고 있어 아무래도 크게 착각한 모양이다. 왕실의 기사가 나를 깍듯하게 대하는 이 상황에서 사실 내가 메이드라는 것을 들키면 아주 곤란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마치 내가 보잘것없는 메이드라는 사실을 금방이라도 꽤뚫어 볼 것만 같이 나를 노려보는 왕실 기사의 왼쪽을 지나쳤다.


'어라?'


왕실 기사의 옆을 지나치며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울로 기사단장님과 오멜은 왕실 기사단과 드래곤 나이트에 모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어깨에 두 가지 색깔의 견장을 모두 차고 있다. 분명 푸른색은 왕실 기사단, 붉은색은 드래곤 나이트를 상징한다.


"......"


-그런데, 이 왕실 기사는 아무런 견장도 달고 있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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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2. 우리는 예언으로부터 조국을 지킨다 (2) 24.01.29 9 0 11쪽
6 #02. 우리는 예언으로부터 조국을 지킨다 (1) 24.01.25 9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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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1. 드래곤 나이트 (3) 24.01.18 9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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