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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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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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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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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서(序)

DUMMY

1-2화 서(序)




주원장(朱元璋). 녀석이 스물다섯에 홍건적과 합류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원나라를 죽여 없애는 인재라는 의미. 뿌리 깊은 증오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녀석도 농부의 자식이었다.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굶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주원장은 온 가족이 굶어 죽거나 흑사병에 걸려 죽자 할 수 없이 절에 들어갔다. 탁발승으로 세상을 떠돌며 숙식을 구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은사에게 도법을 사사했고 다시 태어났다. 빈농의 아들, 탁발승 주중팔이 무사가 된 것이다.


아무튼, 그날 밤 녀석은 남달랐다. 당시 나보다 열두어 살 많았던 주원장은 밤이슬처럼 은밀하게 치고 들어와 곽자흥을 구해냈다. 아무도 녀석의 칼질을 당해내지 못했다.


녀석의 도법이 내게는 첫 번째였다. 대성하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무공을 처음 만난 것이다. 주원장과 녀석의 도법을 만난 그 밤, 나는 내 칼처럼 구부러진 달에게 빌었다. 내게도 그런 칼을 달라고.




원래 조균용의 휘하에 있었던 나는 조균용이 곽자흥에게 사죄의 의미로 떼어준 부대에 딸려서 곽자흥의 휘하로 들어갔고 이어서 주원장의 병사가 됐다.


뒤로도 한동안 홍건적은 파벌 싸움을 반복했고 송(宋)나라 황실 후예를 자청하는 한림아. 그가 주축인 동계 홍건적과 진우량이 주도하는 서계 홍건적으로 양분됐다. 주원장과 나는 동계였고.


얼마 뒤 주원장은 호주성을 떠났다. 명분은 장인 곽자흥을 위해 군대를 모으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론 사병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녀석도 깨달은 것이다. 친위대 없이는 장인처럼 낭패를 겪게 될 수 있다고.


고향으로 돌아간 주원장은 1년 만에 5천여 병사를 모았고, 인근 곽자흥의 고향 정원현을 탈환했다. 뛰어난 고수였던 황군 장수 무대형은 주원장과 친우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투항한 황군에서 한족 2만을 흡수했다.


승리의 밤, 주원장이 나를 찾았다. 그의 천막에 서달, 주덕흥, 곽영 등 친우들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병사, 이름이 무엇인가?”

“고가 사라고 합니다.”

“고가의 넷째군.”

“넷째 아들입니다.”

“내 아명은 중팔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실 적에 두 분 나이가 마흔여섯, 마흔둘. 더하면 팔십팔 세고, 팔(八)이 겹쳤다고 하여 중팔이 되었다.”

“예.”

“예사 칼 솜씨가 아니더군. 올해 몇인가?”

“열일곱 됩니다.”

“열일곱!”


깜짝 놀란 주원장과 녀석의 친구들이 나를 샅샅이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때 주원장은 나를 무인으로. 명사를 스승으로 둔 무사로. 무예의 완성과 강토 수복이란 대의를 위해 홍건적에 잠시 몸담은 협사로 생각했었다고.


“칼을 가르쳐주신 분이···?”

“서주성에서 죽었습니다. 왕시목이라고.”

“왕시목?”


다들 누군지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알 턱이 있나. 많고 많은 십인장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을.


“십인장이었습니다.”


나는 마을을 떠난 뒤부터 그날까지의 일을 간추려 설명했고, 다 듣고 난 녀석이 친우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재능이군. 하늘이 내린 재능. 변변한 공력도 없이. 이 시간 이후 선봉대 천인장을 맡으라. 나와 함께 이 땅의 오랑캐를 몰아내자.”


녀석은 영리하고 과감했다. 결단력과 통솔력을 겸비한 영웅이었고 몇 마디만으로 군중을 휘어잡는 위엄을 가진 걸물이었다.


“천하의 선량한 아들들아! 딸들아! 오라! 나 주원장이 그대들과 태평성대를 열 것이다! 새로운 천하에서는 아무도 굶주리지 않고 핍박받지 않을지니! 이 주원장과 함께 천하를 달리자! 오늘부터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가 될 것이다!”


우리 마을을 찾았던 이이처럼 징집을 강제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녀석이 몇 마디 하면 굶주림과 폭정, 탐관오리, 도적, 혼란 등에 지치고 분개한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스스로 작물과 가축, 포목을 가져다 바쳤다. 녀석은 그때 이미 왕이었다.


그렇게 주원장을 따라 하남 저주성을, 다음 강서 육합성을 탈환했고 이듬해 화주를 함락했다. 그때쯤 주원장은 홍건적을 탈퇴하고 독자적인 세를 구축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한림아에게 충성했다.




얼마 뒤 군벌의 수장인 곽자흥이 병사했다. 당시 소명제 한림아를 주축으로 한 동계 홍건적은 송(宋)으로 발족한 상황이었고 한림아는 곽자흥의 아들 곽천서를 도원수, 주원장을 좌(左)부원수, 나를 상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때 주원장은 별다른 공훈이 없는 곽천서가 상관으로 임명된 데 불만이 많았지만, 꾹 참고 내색하지 않았다.


상장군이 된 직후 주원장의 허락을 받아서 고향에 다녀오기로 했다. 금의환향이었다. 한림아가 투구와 갑옷을, 곽천서가 말을 내주었고, 주원장이 보검을 내줬다. 고향에 가서 고 씨의 넷째 아들이, 한림아와 홍건적이 천명을 받았음을 널리 알리라는 뜻. 고향을 떠나 전쟁터를 구른 지 4년만, 내 나이 스물의 일이었다.




가을이었다. 전쟁은 겨울에 잠잠하지만, 마을의 물자는 겨울에 귀한 법. 천지가 살찐 가을에 고향으로 길을 잡았다. 아버지, 어머니, 형들과 누이들, 매형들과 조카들. 그리고 홍소화. 지난 4년 동안 내 칼과 함께 나를 지켜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반겼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중 하나는 분명히, 틀림없이 가족이었다. 나를 기다리는 가족.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찍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돼서. 4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니만큼 많이 변하진 않았을 거라며 생각했다. 홍소화는 다른 사내와 혼인했겠지만, 얼마든지 기꺼이. 너무나도 흔쾌히 축하해 줄 마음이었다.


그렇게 그리운 사람들과 하룻밤 회포를 나누고 다시 주원장에게 돌아가 한시라도 빨리 천하를 평정해서 태평성대를 열자고, 그런 뒤 낙향해서 아내와 자식을 얻고 논밭을 부치며 살리라며 재차 다짐했다.


그런데, 그맘때면 황금빛 물결이 사방에 넘실거리고 굴뚝마다 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마을. 어미 소가 제 새끼를 부르는 소리, 아이들과 개들이 한데 어울려 뛰어다니는 소리까지. 온갖 생기로 가득한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조의 선조, 그 선조의 선조 때부터 마을을 지킨 당산나무가 외로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는 숨을 몰아쉬며 한탄하고 있었다. 마을을 지키지 못했다고. 더불어 너도 너라고, 너도 잘못했다고.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하냐며 타박했다. 그렇게 죽어가던 당산나무는 네 번째 운명이었다.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서 그나마 온전한 집들을 샅같이 뒤졌고 뒷산 골짜기에서 인기척을 찾았다. 아이나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이라는 보고였다. 그럼에도 발작하는 심장을 달래며 달려갔다.


날 듯이 말에서 뛰어 내려 투구를 벗는 순간, 죽은 마을처럼 생기를 잃어버린 노인 중 한 명이 나를 알아봤다.


“너, 너는···? 고 가의 넷째가 아니냐···?”


나도 그를 알아봤다. 그는 홍소화의 아비였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장인과 사위로 연결되었을 사람.


“운 좋게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떠났지. 어디 산으로 들어가거나 바다로 갔겠지. 우리? 왜 남았냐고? 곧 죽어 관에 들어갈 사람들이, 아비 어미가, 내 자식이 언제 올 줄 알고 어디를 가겠느냐.”


스무 명 남짓의 그들은 4년 전 나와 함께 끌려간 자식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었다. 4년 전 겨울날, 생이별한 자식들이 못내 눈에 밟혀서, 잊지 못해서, 혹시라도 돌아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해후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떠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말고도 아는 얼굴이 상당수 있었다. 심지어 건넛집과 옆집 이웃 어른들도 보였지만, 우리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작년 봄이었지. 처음에는 또 사람을 빼앗아 가려고 왔나 했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게야. 사검(死劍) 고사의 마을을 찾아왔다더라. 사검이 뭔지, 그게 누군지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허나, 고사는 알았지. 고 씨의 넷째 아들을 왜 모르겠느냐. 이 마을 소년 장사였거늘. 성명이 조균용이라 했다.”


원수는 조균용이었다. 4년 전 손덕애와 야합해서 곽자흥을 쳤던 그놈이었다. 그날 호주성 사건 이후 조균용은 줄곧 우리 군벌과 사사건건 대립해 왔었다.


“네가 동지를 배신하고 해쳤다면서, 네 아버지 어머니를 데려가려고 했다. 네가 순순히 항복하면 너까지 살려줄 거라고, 다 용서하고 장군으로 임명할 거라고 했지. 허나, 네 아버지 어머니는 알았어. 우리도 다 알았지. 알아본 게야. 그놈의 본바탕을. 우리랑 별반 다를 바 없는, 무식한 놈이 포악하기까지 한 것을 알아본 게지.”


아재의 말처럼 조균용은 근본이 산적 출신이었다. 곽자흥이 죽고 동계 홍건적의 주도권을 노리던 놈은 홍건적 통틀어 가장 강한 장수로 급부상한 나를 주원장과 분리하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비 어미가 돼서 내 자식을 모르겠냐며, 죽으면 죽었지, 식구 잡아먹을 놈은 아니라면서 우기는 것을, 조가 놈이 억지로라도 데려가려고 하니, 부모가 돼서 자식 놈 앞길을 막겠냐며 그 자리에서 낫으로··· 유언으로 절대 막내를 팔지 말라고, 제 형 제 형수 제 조카 위해서 전쟁에 저를 판 막내를 절대 팔지 말라고 했다. 우리 다 네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 독한 사람들이었는지 그때 알았지.”


그렇게 고 씨 일가는 분노한 조균용의 손에 멸문지화를 입었고, 마을 젊은이 대다수가 조균용의 군벌에 끌려갔으며, 젊은 여인들과 마을의 재산도 한낱 약탈 대상에 불과했다고 했다.


잡혀 죽기 전 용케 산으로 도망쳐서 며칠이고 숨어서 살아남은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했다. 전쟁터에 끌려간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들은 남았고.


가슴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마을과 우리 가족을 그렇게 만든 건 4년 전 나와 마을을 찾았던 운명이었다. 내 첫 번째 운명, 전쟁. 아니, 어쩌면 나였다. 내가 마을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 가족도.


“한데, 그··· 우리 명아는···? 살아 있···! 잘 있는 게지···?”


두려움이 덕지덕지 묻은 질문에, 차마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순간 고민했다. 거짓된 희망이라도 살아갈 이유로 줄 것인지, 진실을 줄 것인지. 잠시 고민한 결과, 거짓된 희망은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아재도 내게 진실을 말해줬으니, 나도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답을 기다리는 아재의 얼굴이 노래질 때쯤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내 설명을 들은 아재와 노인들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나는 그 길로 주원장에게 돌아갔다. 진상을 알렸고, 사사로운 복수를 떠나 무고한 백성을 도륙하고 민심을 해쳤으며 홍건의 대의를 저버린 죄로 처벌해야 한다며, 직접 목을 칠 수 있게 맡겨달라며 요구했다.


그랬지만, 주원장과 친우들이 무릎 꿇고 말렸다. 대의를 위해서 한 번만 참아달라고. 일단 한림아가 용납하지 않을 거라며, 조균용을 치는 건 서계 홍건적과 오랑캐들을 돕는 일이고, 그러면 강토 수복이 요원해진다며 사정했다. 천하를 수복한 뒤에 때가 있을 거라며 거듭 부탁했다.


군벌의 수장과 친우들이 수하들 보는 데서 무릎까지 꿇고 사정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우리 마을의 사례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설득에 수긍하기도 했고.


그때를 기점으로 나는 진정한 의미의 사검이 됐다. 죽음을 내리는 검. 분노에 사로잡힌 나의 검예는 어떤 문턱을 넘었다.


사검 고사는 황군과 홍건적 양쪽에 명성을 떨쳤다. 그 유명한 승상 탈탈이 반란군을 통틀어 진정 두려운 존재로 나를 지목했다. 주원장도 있으나 녀석은 사나운 이리 떼를 이끄는 늑대고, 나는 천하를 독보하는 한 마리 범이라면서.


그렇게 나와 주원장은 이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2년 만에 금릉 그러니까 지금의 남경까지 진격했다.




수백 년 고도(古都) 남경과 그 주변은 기름진 땅, 천하의 물산이 나는 젖과 꿀의 대지였다. 확보하면 천하 남부의 젖줄인 장강을 확보하는 셈. 장강을 손에 넣으면 강남 전역을 손에 넣는 격이었다.


주원장은 남경과 그 일대를 평정하면서 스스로 오국공(吳國公)에 오르는데, 바로 그 금릉 전투에서 나는 또다시 운명과 맞닥트렸다. 내가 고향에 다녀온 사실을 확인한 조균용은 한림아와 주원장 몰래 고수들로 별동대를 조직했다. 선수를 친 것이다. 금릉을 지키던 황군도 그랬고.


나는 금릉 전투 당시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쫓기기 시작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보낸 별동대들과 벌인 나흘 추격전 끝에 동쪽 보화산 골짜기에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모닥불이 타는 동굴 안이었다. 한쪽 팔은 잘려 나간 상태였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았음에 안도했다. 더불어 이번에야말로 조균용을 멸하겠다며 다짐했다. 이번에는 주원장이 아니라, 하늘이 무릎을 꿇고 사정해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나를 이렇게 만든 운명을 증오하고 원망하는데, 그때였다. 모닥불 그 너머 어둠에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사정하지 않을 것이다. 억울하더냐?”


신비로운 목소리는 귀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들렸다. 뭐랄까, 소리가 나를 에워싼 느낌. 마지막 다섯 번째 운명이었다. 신비의 목소리는 나를 비웃고 또 조롱했다. 가소롭다는 듯이.


“우습다. 살아남게 해달라기에 그리해 주었다. 마을로 돌아가게 해달라기에 그리해 주었다. 칼을 달라기에 주었다. 증오? 원망? 그것이 네가 찾은 답인가?”

“누···구요···? 그대는···?”

“종화산에서 왔노라.”

“종화(鐘火)···산···?”

“빛이다. 별이다. 달과 바람이다. 그림자다. 꿈이요, 환상이다. 물거품, 이슬, 서리다.”

“······?”

“다시 답을 찾아라. 그것은 답이 아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노란 햇살이 동굴 입구에 걸린 아침이었고, 뜻 모를 말만 남겼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온데간데없었다. 밤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잘려 나갔지만, 밤사이 아문 팔과 머리맡에 놓인 검 한 자루가 아마도 생시일 거라며 주장하고 있었다.


날부터 자루까지 통짜 쇠로 만들어진 검은 날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수련용 목검과 비슷한 생김새였고 날 하단에 글자 고(鼓)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 남은 팔로 기이한 검을 쥐고 생각했다. 신비한 목소리가 남긴 말을. 한동안 궁리했으나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답을 찾았다는 것인지, 그 답이 정답이 아니라는 영문은 또 무엇인지.


이내 멍에를 쓴 소처럼, 학습된 듯 남경으로 향했다. 다른 길은 생각지도 않고 다시 전장으로 향한 것이다. 주인을 찾아가는 노예처럼.


하산 길에 나를 찾아 수색 중이던 별동대들과 연달아 마주쳤다. 하나 남은 팔과 몽둥이 같은 검으로 적을 베어 넘겼다. 한쪽 팔과 날도 세우지 않은 검 한 자루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면서 죽음을 각오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날이 없는 검, 고(鼓)를 쥔 나의 검학은 다시 한번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있었다. 한 합(合)에 생명도 하나, 두 번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전에 별동대 모두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병기는 흙더미처럼 부서졌고 살과 뼈가 물처럼 갈라졌다.


귀환했을 때 주원장과 친우들은 점령한 남경에 깃발을 세우는 중이었고, 나를 귀신 보듯 바라봤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나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그때 나는 4년 전 첫 전투가 벌어졌을 때 느꼈던 안온을 다시 느꼈던 것 같다. 분명한 건 살아남은 데서, 형제이자 가족인 친우들과 재회한 데서 비롯된 안온은 아니었다. 아마도 전쟁이, 전장이 주는 안온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조균용에게 달려갔다. 내 한쪽 소매와 서늘한 눈빛을 직시한 주원장과 친우들은 말리지 못했다. 이선장과 유기를 비롯한 책사들이 나를 설득하고자 했지만, 한마디만 더하면 사검 고사의 벗이 아니라고, 누구라도 베겠다면서 엄포를 놓자, 고개를 떨궜다.


나는 조균용의 부하들이 지켜보는 데서 놈의 목을 쳤고, 내게 칼을 들고 덤벼드는 조균용의 가족과 수하들을 모조리 벴다. 한림아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며 달려왔지만, 천하가 달려들어도 살아 나갈 자신이 있다며 경고하는 나를 어쩌지는 못했다.




남경 전투 이후, 여러 해 동안 주원장은 황군과 싸우기보다는 서계 홍건적을 비롯한 다른 한족 군벌과 싸웠다. 황군은 내분으로 남하할 여력이 없었고, 천하의 지배권을 상실해 가는 중이었다. 그에 최강의 적은 서계 홍건적의 거두, 진우량이었다.


남부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그는 물경 60만에 육박하는 세를 거느렸고, 우리 쪽은 최대 군벌 한림아의 군벌이 황군 차칸테무르의 군대를 상대로 대패한 까닭에 주원장의 군벌을 포함 20만도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랬지만, 한림아가 패한 덕분에 군세의 주도권을 쥐게 된 주원장은 시간을 끌수록 서계 홍건적과 격차가 벌어질 것으로 판단, 파양호에서 진우량을 쳤다. 서계 홍건적의 3할 수준에 불과한 병력으로.


이름하여 파양호 대전. 주원장을 사실상 황제로 만든 전투였고, 사상 최대규모의 수상전이었다. 끝에 가서 진우량이 조직한 결사대가 주원장을 수중에 넣을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책사 유기의 선견지명 덕분에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모면했고, 내가 주도한 기습과 화공으로 전세를 역전, 전투를 승리로 매조지었다.


천하를 통일할 유력자로 첫손에 꼽히던 진우량이 무너지자, 다음 가는 군벌의 수장이었던 장사성도 무너졌고, 그렇게 우리는 천하통일에 바짝 다가섰다.


그런데 4년 뒤, 천하 통일을 앞둔 우리에게 난데없는 변고가 일어났다. 황제 등극을 앞둔 한림아가 남경으로 호송 중 익사한 것.


애초에 한림아에게 정이 없었던 터라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 당시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실은 주원장이 계획한 익사라는 소문이. 주원장이 황제 자리를 노리고 사고로 위장, 한림아를 강에 수장한 거라며.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림아가 통왕태평적로(通王太平的路)라고 무적무쌍의 창법을 익힌 고수인 데다, 주원장의 반 수 내지는 한 수 위 상수이긴 하지만, 그 차이는 종잇장 차이에 불과했다. 서달과 상우춘을 비롯한 친우 한둘이면 극복이 가능한 차이였다.


어쨌든 한림아라고 하는 대의와 명분이 사라지자, 이선장과 유기를 선두로 친우들이 기다렸다는 듯 주원장에게 제청했다. 직접 황제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라며, 한림아의 비명횡사는 곧 천명이 녀석에게 있다는 뜻이라며 입을 모았고, 이내 주원장이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그렇게 새 나라의 이름은 대명(大明), 연호는 홍무로 정해졌다. 마침내 원(元)의 지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황궁으로 몰려든 백성 수만이 사흘 밤낮에 걸쳐 눈물 흘리며 대명을 부르짖다가 해산했을 만큼 온 세상이 요동쳤다. 강호의 세력들과 지방 토호들이 앞다투어 주원장의 발아래 고개를 조아렸다.


나와 친우들은 개국공신이 됐고, 마침내 전쟁에서 벗어나 여생을 보내게 됐다며 믿었다. 우리의 명성이 천하 구석구석 강과 개울처럼 흘렀고 저잣거리 어디서나, 우리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마을을 떠난 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쯤 별호는 사검에서 검자(劍子)로 바뀌어 있었다. 천하가 유교의 교조 공구를 공자로 추앙하듯 나를 고금제일의 검객으로 추앙하며 붙여준 별호였다.


새 이름도 얻었다. 견신(堅信).

공신첩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유기가 준 이름이었다. 공(公)의 작위와 드넓은 봉토도 주어졌다. 우리 마을이 포함된 너른 땅이었다.


친우들은 조정에 남았다. 조정 요직에 앉아서 주원장을 도왔다. 주원장은 내게 어떤 관직도 제안하지 않았다. 몇몇 친우들과 공신들이 나를 대도독으로 앉히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얼른 사의를 표했다. 싸울 일이 없어진 군대에서 뭘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스스로 역할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


결국 새로운 나라에서 역할과 의미를 찾지 못한 나는 전쟁 동안 돌아보지 못한 천하 북부와 서부를 돌아보겠다며, 천하 어딘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을 찾겠다는 핑계로 낙향했다. 내 낙향을 흔쾌히 받아들인 주원장은 내 가족을 찾으라며 전국에 칙서를 내렸다.


그렇게 남경 즉, 남직례 응천부를 떠난 나는 천하를 떠돌았다. 부서진 배처럼 세상이라는 바다를 표류했다. 그러다 옛말에 몸과 마음은 하나라고 표류하는 몸처럼 영혼도 길을 잃고 말았다. 잠에 들면 서주성 전투에서 죽은 조카들과 매형들이 찾아왔다. 17년 전쟁 동안 죽은 동료들과 수하들도.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고, 나중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 늘 검을 안은 채로 앉아서 졸다가 발작하듯 소스라치며 깨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그런 나를 걱정하며 다가온 이를 적인 줄 알고 해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날 그 아이를 해치고 말았을 때, 나는 내가 제대로 탈이 났다는 것을. 내 영혼과 정신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음을 깨달았다. 전쟁이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전투 중이라는 사실을. 그 전투는 내가 죽어야만 비로소 끝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경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도 그런 내 머릿속에 환멸을 새겨 넣었다. 호유용, 이선장, 남옥 등 개국공신들과 친우들이 황좌를 찬탈하고자 역모를 모의했고, 그에 분노한 주원장이 금의위를 시켜 그들의 삼족을 멸했다는 소식들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는 진상을 알 수 없기에, 게다가 정신도 온전치 않았기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모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한림아의 사고처럼 이번에도 주원장이 황권 강화를 목적으로 꾸며낸 음모라며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환멸이 났다. 진저리가 났다. 우리가 17년 동안 어떤 희생을 치러서 얻어낸 평화인데, 이미 많은 것을 가진 녀석들인데, 대체 왜? 더 무슨 영달을 위해 한쪽은 친우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다른 한쪽은 실체 없는 역모를 구실 삼아, 오랫동안 함께 피 흘려 싸운 전우들을 해친다는 말인가.


당장 남경으로 돌아가 전쟁과 전우애, 형제의 맹세를 잊어버린 주원장과 녀석들을 모조리 베고 싶다는 살의가 솟구쳤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살의. 지금 생각해도 그 살의는 광증의 병폐였다. 정신병이었다.




스스로가 누군지 마저 잊기 전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을을 찾기로 결심했다. 마을에 들렀다가 어느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검만을 궁리할 작정이었다. 그 겨울, 마을을 떠난 지 42년, 내 나이 쉰여덟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나란 사람의 의미가, 내 삶의 의미가 구도(求道)에, 검(劍)에 있었다고 생각했고, 그게 오래전 동굴에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요구했던 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찾은 마을의 모습은 예상과 달랐다. 살아있었다. 42년 전 가을처럼 살찌고 생기가 넘쳤다. 죽음을 받아들이던 당산나무는 푸른 잎과 가지를 흐드러지게 뻗은 모습이었고, 술래잡기하는 아이들이 깔깔대며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굴뚝마다 허연 연기가 오르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홀린 듯 집을 향해 달렸다. 하나 남은 팔을 열심히 흔들고, 지친 두 다리에 힘을 보탰다. 뜨거운 눈물이 봄날 비처럼 노랫가락처럼 흘렀다. 아버지, 어머니, 형들 누나들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내달렸다.


그렇게 그 옛날 우리 집이 있었던 자리를 찾아가서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모두 살아 있었다. 우리 가족이. 죽은 줄 알았던 우리 가족이 전부!


아아, 이럴 수가!

아버지! 어머니!

형들! 누이들!

다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나야! 막내! 막내가 돌아왔습니다!

전쟁은 고단했으나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홍소화도 있었다. 오래전 여름날 수숫단 속에서 봤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그녀는 평상 위 아버지 어머니 곁에서 뜨끈한 김이 솟는 국물을 퍼담고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때 마침내, 신비로운 목소리가 남긴 문제의 진짜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정답은 전쟁이나 검이 아닌 가족이었다고. 삶의 의미는 가족이었다고. 내 가족이 내 삶의 전부였다고.




그렇게 환히 웃는 가족들과 홍소화의 얼굴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기억은 환각이었을까, 실상이었을까.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 왠지, 그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다시 답을 찾아라. 그것은 답이 아니다.”


환청이었을까, 실상이었을까.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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