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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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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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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DUMMY

14화




오도 가도 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 세 상서는 의식 속에서 똑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한 걸음 뒤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검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기다리는 모습을.


[!!!!!!]


벼랑으로 뛰어내리면, 그렇게 하면 충정을 증명할 수 있고, 순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순장을 존속시키고 정왕 주견신을 제압할 수 있다. 공(公)의 작위도 더는 꿈이 아닐 터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승리, 패배다. 죽어서 이루는 승리를 승리라고 할 수 있나. 1품 품계도 공(公)의 작위도 살아서 누려야지, 죽은 뒤에 추증받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를 어떻게 한다? 어찌해야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처럼 막다른 길로 내몰린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세 상서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고 있는데 견신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어찌 말들이 없는가? 고(孤)의 말을 듣지 못한 건 아닐 거고.”


내심 계획대로 된 데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견신이 그런 속내를 감추고 세 상서를 번갈아 보는 그때 그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물이 끼어들었다.


“전하! 소신은 전하의 행사에 적잖은 무리가 있다고 사료하옵니다.”


문연각대학사 겸 태자태사 이현이었다. 견신에게는 예상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변수였다. 순장을 반대해 온 그가 나설 줄은, 게다가 순장 철폐를 반대하고 나설 줄은 예상치 못한 견신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견신은 찰나 이현이 순장을 찬성하는 세력으로부터 매수나 겁박을 당한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돌아가는 상황상 차근차근 짚어볼 여유는 없어 보였다.


“······.”

“전하, 이는 전하께서 죽음으로 신하를 겁박하는 격이 아니겠사옵니까.”


놀란 건 순장 찬성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조정과 유림에서 신망이 두터운 데다가 순장을 줄곧 반대해 온 이현이 뜻밖에도 견신의 행보를 저지하려는 듯 보이자, 때는 이때다 하며 가세했다. 이현이 돌연 행보를 바꾼 영문은 그다음 문제였다.


“그, 그렇사옵니다! 어찌 상서들에게 순장을 강권하시어 만고 충신들을 굴복시키려 하시옵니까!”

“군자의 예(禮)도 아니옵고, 군자가 이치를 논하는 방식도 아닐 것이옵나이다!”

“죽음으로써 신하를 겁박하는 것은 천박한 왜(倭)놈들의 행태이옵니다. 왜의 할복(割腹)과 다르지 않을 것이옵고 대국의 군신 관계가 한낱 오랑캐 소국의 미개한 행태와 같아서는 아니 될 것이옵나이다.”


이현과 그에 동조하고 나선 이들의 논리는 궁지에 몰린 세 상서를 구원, 순쟁을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논리였다.


그러나, 순장은 태생이 대자연의 이치 즉, 생명 본성을 거스르는,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근거와 논리로 창조한 제도고 풍습이다. 따라서 허구적 근거가 아닌 실존 근거를 기반으로 삼은 논리 앞에서는 격파될 수밖에 없다.


이현이 열렬히 끼어드는 대신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견신이 의도를 눈치챘기를 바랐다. 그럴 거라 믿었고. 어제 경연에서 경험한 주견신이라면.


“소신의 견해를 어찌 보시옵니까. 옳게 보십니까? 옳지 않다면 과연 다른 어떤 방법이 있겠사옵니까? 부디 작일 경연에서처럼 전하의 공부를 나눠주시옵소서.”


사실 그는 지금 조정 백관 중 누구보다 견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바로 직전에 견신이 호통을 치고 나섰을 때부터는 완전히 매료된 상태였다.


그때는 뭐랄까, 마치 천순제의 아비, 성군이자 영웅호걸이었던 선덕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그 모습에서 또 어제의 경연에서 확신과 신뢰를 얻었기에 나섰다. 일부러. 오늘 주견신을 도와서 순장을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순장이 최소한 명(明)의 시대에서는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허면, 누구를 순장해야겠소? 어떻게 정해야 한다는 말이오? 하룻밤 승은을 입었으나 그 한 번에 그친 까닭에 자녀를 생산치 못한 비빈? 아니면 환관과 궁녀? 여기서 문무백관 중 세 상서를 제외하고 셋을 뽑으면 되겠소? 세 상서는 안 되고 그들은 된다는 말이오?”


이현의 예상대로였다. 견신은 이현의 기대와 신뢰에 부응했다. 공부를 나눠달라는 대목에서 이현이 순장 찬성파가 나중에라도 들고 나서서 공격 무기로 삼을 논리를 선제적으로 꺼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늘 힘을 합쳐서 순장을 완벽하게 제압하자고 하는 의도를.


말해놓고 옳고 그름을 논해보자는 듯 어떻게 생각하냐며 물은 것이 그 증거였다. 자기 생각이 옳지 않을 수 있다며 길을 터놓은 것이.


황실과 조정은 물론 유림까지 인정하는 명신이자 학자인 이현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 논리까지 파훼하면 순장 찬성파는 대항할 명분도 전의도 완전히 상실할 게 분명했다.


“더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왜? 논거가 무엇이오? 나만 아니면 된다? 그런 것이오? 애초 순장의 시작은 지극한 충심과 애정. 그런 시작을 생각하면 저들 가슴 속 충심이 진심이라며 모두가 보는 데서 강조한 세 상서는 그 누구보다 적격자이지 않겠소? 천자와 나라를 위한 지극한 충심에서 순장을 찬성하는데 나는 불가하다? 제하라?”


아니나 다를까. 이현이 조금 전 반대하고 나섰던 때의 그것과 완벽하게 반전된 태도로 고개를 주억였다.


끄덕— 끄덕—


“소신이 듣고 보니 전하의 말씀이 실로 지당하옵나이다. 순장의 근본적인 문제는 대상자를 정하는 기준이 없고 기준을 세우더라도 회피하는 자, 거부하는 자가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이옵니다. 생은 본능이기에.”


그 모습이 이현이 저들에게 가세한 줄 알고 한껏 들떴던 순장 찬성 세력의 가슴을 지하 무저갱까지 주저앉혔다.


“고의 말이 그 말이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 된다면 대체 앞으로 누구를 어떻게 정할 것이오? 공평할 수 있겠소? 공훈? 품계로 정할 것이오? 고가 장담하건대 순장을 그냥 두면 백년 천년이 지나도 정쟁의 무기로, 차도살인지계의 칼로 쓰일 것이오.”

“그 또한 그러하옵니다. 공훈 혹은 품계로 정한다면 순장을 피한답시고 없는 공을 탐하거나, 마땅히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사무도 일부러 태만하게 조처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옵고 그리되면 조정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옵나이다.”

“바로 그러하오, 태자태사. 공훈과 품계가 높은 자를 순장하자고 하면, 일부러 공을 쌓지 않을 것이오. 반대로 낮은 자로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을 탐하겠지. 끝은 돈으로 품계와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일 것이고. 그 지경이 되면 열성조와 천순 폐하께서 일구신 제국이 어찌 되겠소?”

“바로 그렇사옵니다, 전하.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지만 반대로 군주는 신하에게 충성은 요구할 수 있을지언정 그 마음까지 요구할 수는 없는 법. 군주나 고관대작이 순장자를 정해놓고 없는 진심을 요구하거나, 충심에서 비롯된 자원이라며 자백하도록 명하는 등 그러한 행태는 부당한 일이지 않겠사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잔인무도한 폭력일 것이오. 고가 그리하여 세 상서에게 묻지 않았겠소? 기준을 공평하게 정할 수 없다면 순장의 시작으로, 본질로 돌아가 보자는 말이오. 폐하와 제국을 위한 충심이 사실이고 진심이라면, 순장을 찬성해 온 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자미원 여정의 호종은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이잖소? 거부할 이유도 피할 이유도 없잖소? 아니 그렇소? 그래서 물은 것이오. 겁박이 아니라 진심으로 물었소. 세 상서가 맹세하면 폐서인의 처분도 달게 받겠다고 한 것도 진심이란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세 분 상서.”


그처럼 견신과 약속 대련하듯 합을 주고받은 이현이 돌아보자, 그런 상황을 보고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던 세 상서와 순장 찬성파는 그대로 공황에 빠지고 말았다.


[!!!!!!]


부르르—


“이 이현은 전하의 논거에 더는 반박할 방도가 없습니다. 작일 경연에서도 느낀 바 있습니다만 정왕 전하께서 적어도 순장에 관해서는 이 이현보다 몇 배는 더 이해가 밝으신지라 이 모는 깨끗이 승복했습니다. 세 분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아직 한 분도 전하의 하문에 답하시지 않으셨으니.”


이현은 뜻밖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정치적 기반, 뒷배가 없는 정왕 주견신의 강력한 조력자, 그를 도와서 이쪽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적군이었다. 그것도 최악의.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쥐고 있는 모든 패가 무용이다. 그 맹세를 하면 반드시 죽는다. 태자 주견심마저도 간섭할 수 없는 맹세가 될 것이기에, 그의 조력과 구원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그 죽음은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다. 주기진의 최근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그러므로 맹세하면 십 중 십, 황제와 함께 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여지없이.


맹세하지 않으면 거짓으로 충심을 말한 모리배, 죽음이 두려워서 순장을 거부한 겁쟁이 따위로 전락할 것이고.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저 정왕 주견신의 수에, 이현의 훈수에 속아 초장에 대마를 내주고 말았다. 이 대국은 완전히 잘못됐다. 처음부터.




그처럼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는 세 상서. 그에 광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견신에게로 기울었을 때, 세 사람의 귀로 견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여기까지다, 세 사람.”

[······?]

“지엄한 황명에 따라 순장은 금일 부로 철폐하자. 폐하의 대에서 또 경들의 대에서 순장의 역사를 끝내자. 원(元)이 부활시킨 악습을 대명이 유지할 필요가 없잖은가? 아니 그런가? 그러니, 대명과 천순 폐하의 충신들이여. 여기서 끝내자. 폐하의 성심을 거스르지 말라. 옥체를 보전하셔야 할 천자께 순장 같은 문제로 심려 끼치지 말자는 이야기다. 알겠는가? 또한 이부상서, 예부상서, 형부상서. 경들의 노고가 크다.”


끝에서 치하하는 대목이 세 상서와 사람들의 의구심을 짙게 덧칠했다.


[······?]

“고가 누구에게 물었든 그도 그대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폐하를 향한 충심이 없어서도 천자를 공경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생애는 한 번뿐이고 그 생애 중에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가?”


마치 시조처럼 운율이 진 목소리에 주기진도 황후도 신비와 견신의 남매들도 문무백관도 환관들과 궁녀들도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부모 자식, 형제자매, 오래 사귄 벗과 정인, 문무, 농공상업, 그리고 검과 전우··· 같은.”


뭐랄까, 짧은 시간 동안 아이가 노인으로 늙어가는 모습을 관조한 듯한 느낌? 듣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쓸쓸해지고 울적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허무가 찾아들더니 불현듯 외로워졌다.


직접 듣고 있지만, 열네 살 소년의 이야기라기에는 너무도 노숙한 느낌을 자아내는 서사이기에. 또한 그동안 알고 있었던 주견신이 오늘 보인 행보가 너무나도 뜻밖이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열네 살 소년에게 완벽하게 매료됐다고 할까.


“이는 누가 누구를 상대로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금일 누구도 이기지 않았고 누구도 지지 않았다. 다만 각자 천자의 명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그리하여 세 상서도 고도 여기 모두가 충신이다. 아닌가?”

[······.]


대답은 없었다. 세 상서도 나머지 모두 견신의 말을 곱씹는 데 바빴고 마치 종이에 닿은 물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어휘들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이현이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소신, 금일의 하교도 작일의 하교와 더불어 금과옥조 삼아 정진하겠나이다! 또한 금일 철폐를 명하신 천자 폐하의 뜻을 명심하고 봉행하겠나이다!”


견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고만, 그에 잔뜩 고무되고만 그의 열변이 광장에 메아리치는 사이, 견신이 뒤를 돌아보며 무릎을 꿇었다. 주기진과 황후를 바라보며.


그러고는 천천히 읊조렸다.


“금일 제국이 개국 백여 년에 이르러 마침내 순장을 철폐하신 황상 폐하 만세.”


읊조림이지만, 은근하고 부드럽게 광장 전역으로, 호수의 작은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그에 순간 격동한 주기진의 두 눈에 굵은 눈물이 영글고 견신이 다시 한 번 더 읊조리니.


“황후 폐하, 만세.”


황후가 외눈으로 보는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다시 견신이 마지막 한 번 더 읊조리니.


“만만세.”


아직 자녀를 낳지 못한 여인들. 황제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는 탓에 순장될 운명이었던 비빈들. 격정,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그녀들이 저들도 모르게 가세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시작한 외침은 환관들과 궁녀들이 이어받아 부르짖었고.


[만세! 만세! 만만세!]


견신에게 감복한 이부, 예부, 형부상서. 문무백관과 승천문 광장의 유림이 넘겨받았다.


[만세! 만세! 만만세!]


열네 살 소년 친왕에게 진심으로 승복했다는 말을 말로 하지 않고 있는 힘껏 넘겨받는 것으로 갈음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길고 장엄한 메아리가 하늘로, 더 높은 하늘로 끝없이 솟아오르고 파란 하늘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져 있었다.




#




봉천전 광장을 가득 채웠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고 웃음꽃이 핀 가운데 해산이 시작되는데 별안간 이현이 주기진을 불러세웠다.


“폐하! 소신, 태자태사 이현이옵니다. 폐하께 청이 있사옵니다.”


주기진이 언제 다시 정전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말해보라.”

“정왕에게 상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셔야 할 줄로 사료되옵나이다.”

“오오— 그래, 그렇지. 짐이 잊었다. 그래야지. 마땅히 상을 내려야지. 태자태사, 어찌 치하하면 좋겠느냐.”

“폐하, 순장을 반대하는 논리의 근원에 사랑이 있사옵니다. 생명을 향한 존중, 사람을 향한 사랑. 살아있음을 향한 연민과 뭇 신하와 백성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이 있사옵니다.”

“짐의 생각 또한 그러하다.”

“이는 정왕의 가슴에 신하와 백성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뜻이니 인(仁), 남을 사랑하고 어질게 행동하는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옵나이다. 또 그러한 도리와 이치를 작일과 금일 폐하와 문무백관에게 논하였으니 이는 지혜 즉, 지(知)라 할 수 있을 것이옵고 폐서인도 감수하며 나섰으니 명리와 상관없이 옳음을 지지하는 의(義)일 것이며.”


이현의 설명이 더해 갈수록 경청하던 청중도 진중한 얼굴이 돼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기진과 황후를 포함, 학문적 수양이 깊고 노회한 이들은 이현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짐작했고.


“또한 언행에 책임을 지는 자세, 신(信)이라 할 것이옵나이다. 마지막 순쟁을 승과 패로 가름하지 않고, 세 상서를 격려하며 오직 천자와 나라를 위한 충정을 강조하였으니 이는 예를 지키고 남을 배려한 것. 즉, 예(禮)라 할 것이옵나이다.”

“인의예지신! 과연!”


인의예지신, 오상(五常)은 오륜으로도 부르는 다섯 가지 덕목으로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군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강조했다.


즉, 지금 이현의 찬사는 그가 공자의 제자이자 후배로서 할 수 있는 최고 극찬인 셈.


“그렇사옵니다. 소신, 작일과 금일. 정왕에게서 인의예지신을 배웠사옵니다.”

“어찌 배운 이가 경뿐일까.”

“그러하옵니다. 문무백관과 만백성이 배웠다 할 수 있을 것이옵나이다.”

“그 말이 옳다. 허면, 짐이 무엇을 상으로 내려야 할까.”

“하문하심이 어떻겠사옵니까?”

“옳지, 그리하자. 정왕.”


주기진이 호명하자 자리에 있던 견신이 얼른 다시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었다.


“예, 폐하.”

“짐이 네게 상을 내리고자 함이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짐과 황후의 안녕, 만수무강은 되었다. 너 조금 전에 이미 그리 고했다. 진정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소자, 실은 원하는 것이 있사옵니다.”

“오오— 그러하더냐? 그것이 무엇이냐? 어서 말해보라.”


원하는 바가 있다는 것까지는 자신있게 말했던 견신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틀 전 경연 참석 통지를 들었을 때 세운 목표의 한 걸음 앞에 도착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목표한 그곳에 설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 목표가 전례 없는 일이기에.


순장 철폐보다도 어렵고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가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가야 한다, 이대로.


“······.”

“정왕, 어찌 그러고 있느냐? 있다 하지 않았느냐? 어서 말해보라.”

“소자, 봉지가 아닌 자유를 얻고자 하옵니다.”

“···자유?”


역시나, 견신의 예상대로 주기진부터 시작해서 그 말을 들은 모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들 견신이 말한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기단 위아래가 동일한 분위기였다.


“소자, 궁을 떠나서 무사로 살고자 하옵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 천하를 누벼보고자 하옵니다. 저 북명(北溟)도 가보고 태종 폐하께서 넘으셨다는 사막도 가보고 싶사옵니다. 삼보 태감이 태종 폐하의 명을 받아 대선단을 이끌고 가봤다는 아불리가(阿弗利加)도 둘러보고 싶사옵니다. 그저 한 자루 검을 벗 삼아 천하를 제 집처럼 누비며 살고 싶사옵니다.”

“허···!”


이윽고, 조금 전까지 기대감에 고개를 쭉 내밀었던 주기진이 진이 빠진 듯 용상에 기대자, 견신은 조바심이 났다. 그에 이것저것 살을 덧붙였다.


“친왕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러겠사옵니다. 소자는 그저 가끔 부황 폐하와 모후 폐하를 알현하고 신비를 만나서 소자가 눈에 담아온 풍광들과 귀에 담아온 것들을 말씀 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옵니다.”


하다 하다 친왕 작위 즉, 신분 및 봉록까지 전부 포기한다는 말에, 신비가 기겁하며 외쳤다. 견신을 열 달 뱃속에 품었던 그녀로서는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정왕! 어찌 이 어미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폐하, 불허하시옵소서. 말도 아니 되는 일이옵나이다. 황후 폐하, 그렇지 않사옵니까? 저 하늘과 천자께서 내리신 작위를 사사로이 포기하고 말고 하는 법도가 대명천지 어디 있사옵니까. 아니 그렇사옵니까?”


이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둘째가 즉흥으로 빚어낸 보상이 아니다.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가꿔 온 생각임이, 계획임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평범한 백성인 사람이면 모를까. 아들은 친왕이다. 친왕이었던 사람이 평범한 백성이 되면 온갖 위험에 저를 그대로 맡기겠다는 뜻. 특히, 태자와 귀비가 야인이 된 아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잖은가. 오늘 일을 겪었으니 더더욱.


일단은 아들을 저지하는 게 급선무고 지금 상황에서 비빌 언덕, 기댈 곳은 황후와 지아비뿐. 둘 중 아들을 예뻐한 황후가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런 신비의 눈길을 받은 황후가 외눈으로 물었다. 신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근심과 애정이 눈빛에서 묻어났다.


“정왕, 신비도 몰랐던 것입니까?”

“오랜 꿈이었으나 자식 된 자로서 어찌 어미를 오래 근심케 하겠나이까. 금일 폐하께서 윤허하시든 불허하시든 설명할 기회를 얻었으니 다행이옵니다.”

“···그렇습니까. 흐음··· 폐하.”


황후가 걱정스런 얼굴이 돼서 생략한 말은 견신이 생각 그 이상으로 진심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그에 견신 역시 저도 모르게 움켜쥔 손에서 땀을 쏟아내며 아비의 눈치를 살폈다. 이는 문무백관의 찬반을 떠나, 아비의 허락이 선결 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요건인 사안이므로.


그처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요구와 그를 들은 최종 결정권자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모두가 촉각을 기울인 그때.


“그랬는가. 짐의 우려가 반은 무용한 것이었는가.”


주기진이 허허로운 표정, 따뜻한 눈빛으로 견신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뜯어보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아들의 상을 두 눈 망막에 오래 간직하고자 하는 눈길이었다.


“······?”


그리고 이어지는 순간.


“윤허한다.”


허락이 떨어지고 주기진이 그처럼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던 견신과 신비가 각각 상기와 경악, 상반된 표정을 지었다.


“!!!!!!”

“폐하!”


그와 더불어 황후가 중요한 몇 가지를 짚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서려던 참에, 주기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폐하, 하오면···!”

“작위 또한 회수하지 아니할 것이다. 회수하면 어찌 상이 되겠는가. 벌이지 상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로 봉록도 그대로 줄 것이다. 정왕은 짐의 아들이요, 대명의 친왕이므로.”


좋은 금슬의 부부임을 증명하듯 주기진의 덧붙임은 아내가 하려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완벽한.


그리고 그 답이 천순 7년의 거대 논쟁, 이틀에 걸친 논쟁, 순쟁(殉爭)의 종지부였다.




물론, 더러는 진심으로 승복하지 않은, 더러는 승복할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천하에는 통일이 있으나 인간들의 생각에서 통일이란 존재할 수 없는 신기루였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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