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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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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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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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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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1화 서(序)

DUMMY

1-1화 서(序)




처음부터 무사였던 건 아니었다. 농부의 자식이었다. 흔하디흔한 빈농의 아들.


촌장 일가를 제외, 대다수가 일자무식인 산자락 마을이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논밭에서 나는 작물과 직접 기른 가축으로 자급자족하는,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역마살 낀 방랑객이나 길 잃은 객이 떠밀려 오면 애도 어른도 전부 몰려 나와서 구경하는 마을이었다.


칠 남매 중 막내였다. 위로 형이 셋, 누나가 셋. 첫 번째 이름은 사(四)였다. 고(高)사. 고 씨의 넷째 아들이라는 뜻.


농촌 마을에서 칠 남매는 보통이었다. 농가의 자녀는 곧 병사다. 많은 병력을 보유한 군대가 전쟁에서 유리하듯 땅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자녀가 필요했다. 이는 진리였다.


농촌에서는 공리로 통하는 진리를 몇 마지기 논밭과 더불어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내들은 낮에는 땅에, 밤에는 아내의 배 속에 씨를 뿌리는 데 열중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문맹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촌장에게 자식들 이름을 부탁했고, 촌장은 대충 숫자나 계절 따위를 이름으로 지어줬다.


그렇게 산자락 마을의 일원이 된 나는 태생의 임무에 충실했다. 세상이 고양이가 먹고 버린 생선처럼 앙상해지는 겨울 지나 파릇한 점이 곳곳에 찍히기 시작하는 봄이 오면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으며 누렁소를 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뙤약볕이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여름 뒤 가을이 오면 불어오는 북서풍이 한껏 달아오른 천지를 식히기 시작했고 황금빛 물결이 멀리 지평선까지 밀려 나갔다.


추수를 앞둔 우리 가족은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 앉아서 그 물결을 감상하곤 했다. 그때의 나는 작황이 예년에 비해 나은지 못한지, 얼마쯤 뒤에 벼를 벨지 등 농사와 관련된 생각만 했을 뿐, 마을 밖의 삶은 무의식에도 없었다.


당시 나에게 마을 밖은 가지 않은 땅, 굳이 가서 볼 필요는 없는 땅이었다. 거기나 여기나 비슷할 테니까. 그때는 세상 사람 모두 나처럼, 우리 마을 사람들처럼 사는 줄만 알았다.


당시에는 어딘지도 몰랐던 호광 땅에서 붉은 두건을 두른 사람들이 봉기했다거나. 서수휘가 황제를 참칭했다거나. 백련과 황군이 엎치락뒤치락 중이라는 소문은 죽은 물고기 강기슭에 떠밀리듯 마을에 닿았을 뿐. 마을 사람들 모두 다른 세상 이야기로 여겼다.




홍수나 역병, 메뚜기 떼의 습격 같은 게 없으면 예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세월이 흐르고 잠에서 깬 형들의 바지춤도, 누나들의 웃옷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때가 된 것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술과 땅을 물려줄 후손을, 같은 운명을 타고난 짝과 만나 같은 운명을 물려줄 자식을 생산할 때가.


형들과 누이들은 낳아준 아비 어미가 그랬듯 자라는 과정에서 눈이 맞은 상대 혹은 부모가 정해주는 상대, 촌장이 맺어주는 상대와 혼인했다. 마을에는 여러 씨족이 있었고 촌장은 근친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족보를 작성해서 관리했다.


혼인하더라도 마을에 사는 건 달라지지 않아서 가족의 유대도 변하지 않았다. 어제까진 한 지붕 아래서 같이 먹고 자던 식구가 오늘부터 건넛집에서 살아갈 따름이었다. 누구 하나 죽으면 모를까, 중간에 혼인을 무른다거나 갈라서는 일은 없었다. 한 번 혼인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내 바로 위 셋째 누이가 나이 열여섯에 동갑내기에게 시집가고 내 차례가 왔다. 내게도 짝이 있었다. 당산나무 서쪽 개울 건너 홍씨 집안 소화였다. 홍씨 집안의 작은 꽃. 이름처럼 아담하고 어여쁜 사람이었다.


우리는 맑은 여름 소나기 또박또박 내리던 날 수수밭에 쌓아 놓은 수숫단 속에서 두 손을 맞잡으며 약속했다. 열여섯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혼인하자며.




그런데 이듬해. 열여섯이 되던 해 겨울. 혼례를 몇 달 앞둔 내게 그들이 찾아왔다. 붉은 두건을 두른 반란군. 홍건적이.


단 한 번의 투레질로 개들을 쫓아버린 시커먼 말 등에 그가 앉아 있었다. 내 첫 번째 운명, 전쟁을 몰고 온 자. 호주 사람 이이가.


“나는 호주 사람 이이다. 촌장이 누군가?”


최초의 홍건적 즉, 동계 홍건적은 한족 봉기군, 반란군이었다. 목표는 멸망한 송나라의 부활. 수장은 황실 후손을 자처하는 한산동과 아들 한림아였다. 이이는 휘하 장수였고.


마을의 수장이자 스승이며 유일한 식자 가문의 자손인지라 늘 여유로웠던 촌장도 비릿한 피 내음을 잔뜩 묻히고 온 이이의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노, 노부가···! 아니, 소인이 촌장입니다만, 우리 마을은 어인 일이신지···?”


개들이 먼저 꼬리를 감추고 낑낑거리며 도망쳤다. 저들도 맡은 것이다. 찐득한 피 냄새를. 자연의 섭리에 해당하지 않는 이유로 피를 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자들의 향기를.


“이 땅을 강탈한 도당을 몰아내는 일에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 날이 밝기 전에 장정들을 모으라.”

“예···?”

“십육 세 이상. 장남은 제외 차남부터 사십오 세 미만 사내를 보내도록. 단, 독자는 제외한다. 십 세 미만의 독자녀를 둔 아비도 제외.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것이다. 그때까지 채비하라.”


촌구석 무지렁이인 나를 포함 마을 사람들 모두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듯 구경할 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이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심각해진 표정의 촌장이 부연 설명한 뒤에야 전쟁이라는 재앙이 우리 마을을 덮쳤음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지력의 감퇴, 메뚜기 떼, 너무 긴 장마나 가뭄, 소와 염소, 나귀의 난산 정도가 걱정거리였던 마을의 평온은 산산조각났다.


홍건적이 손에 쥔 도검이, 거기 묻은 핏자국이, 얼굴과 몸에 훈장처럼 새겨진 칼자국이 순박한 마을 사람들을 옭아맸다. 아무도 거부하거나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민 대다수가 일자무식인 마을은 징집 대상을 가리는 일에서부터 난항을 겪었다. 누가 맞다 아니다,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의 정리는 결국 유일한 식자인 촌장의 몫이었다. 촌장과 씨족 대표들이 마을 한가운데 당산나무 아래 모였다.


확인 결과, 고령자를 제외한 장정의 3할 가까이가 징집 대상이었다. 마을 청년 셋 중 하나가 전쟁터로 끌려간다는 이야기. 그렇게 되면 농사 일손이 부족해지고, 그로 인해 한 해 농사를 망치면 마을이 겨우내 굶주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비의 아비처럼, 어미의 어미처럼 평생 농사만 지어온 노인들은 망연자실. 젊은 사내들은 우왕좌왕. 여자들은 넋이 나갔다가도 물에 빠진 주인을 목격한 개들처럼 울부짖었다.


우리 집도 초상집이었다. 첫째 형과 누이의 조카부터 시작해서 둘째 형과 매형들 그리고 나까지 줄줄이 끌려갈 지경에 놓였다.


결국 촌장이 용기를 냈다. 군량미와 가축들을 내주는 대신에 사람을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했다. 가축은 다시 새끼를 치면 되고 곡식은 다시 수확하면 되는 것. 그러나 일손의 공백은 단시간 내 메울 수 없기에, 딴에는 수를 낸 것이다.


결과는 의외로 성공. 이이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이는 애초에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또 노리고,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한 거라고.


애당초 작물과 가축도 징발할 계획을 갖고 왔지만, 강탈해 가는 모양새가 되면 홍건적이 민가를 약탈한다는 소문이 돌고 홍건적을 향한 민심이 악화할 수 있으니, 일단 무리한 요구를 질러놓고 마을이 협상을 시도하기를 기다렸다는 것.


아무튼, 우리 집도 징집 대상이 크게 줄었다. 기존에 비하면 절반 밑으로. 그랬지만, 누군가 이이를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그것도 다른 사람을 해치러.


밤새 금방이라도 관에 누울 사람처럼 늙어버린 촌장은 부모들이 정해서 당산나무로 보내라고 말하고는 당산나무 한쪽 귀퉁이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앉아서 병든 개처럼 헐떡였다.


열 달 배 아파 낳은 부모에게 사지로 보낼 자식을 고르라는 말. 자식을 둔 부모들에게는 잔인한 폭력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평소 마을을 화평하게 이끌었던 촌장을 이해했다.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잔인한 현실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부모가 무슨 수로 사지에 보낼 자식을 고를까. 보내면 십중팔구는 영원한 이별, 생이별일 것을.


밤은 장맛날 강처럼 속절없이 흘렀고 사람들의 탄식이 유성처럼 꼬리를 늘였다. 검푸른 하늘이 여명에게 자리를 내주고 이내 첫닭이 저승사자처럼 울었다.


첫닭 우는 소리에 홍건적이 깨어날 때까지도 아버지 어머니는 결정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몸져누웠고 아버지는 건넛집 아재에게 빌려 생전 처음 입에 문 담뱃대를 놓지 못했다. 밤새.


그때 왜 그랬을까. 정녕 한 번도 보지 못한 마을 밖 세상이 궁금했던 걸까. 닭이 세 번째 울던 그때,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아버지를 불렀다.


“제가 가렵니다.”


매캐한 탄식을 마시고 뱉기를 반복 중이던 아버지는 물론 몸져누운 어머니, 얼이 빠져서 멍하니 있던 형들, 울다 지쳐 쓰러진 누이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다들 토끼 눈이 돼서 나를 보다 아버지가 신음처럼 뇌까렸다.


“···막내야···”

“셋째 형수 뱃속에 조카가 있잖아요.”


셋째 형수가 살짝 부푼 배를 감싸 쥐고 눈물지었다. 버티고 버티던 제방이 무너져 가까스로 잡아뒀던 물을 놓아버리듯. 형수의 눈물을 기억한다. 아직도.


“···도련님···”


그 눈물이 신호였다는 듯 입을 연 셋째 형의 목소리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네가 왜? 형이 간다. 너는 네 형수나 잘 챙겨. 형이 자리를 비우면 동생이 형 대신인 거 알지?”

“뭔 소리야, 형이 남아. 형수 이제 막 입덧 시작했는데. 형수 혼자 어떻게 조카 낳고 키워. 형수 뼈대도 약한데.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사돈댁 식구들 다 있다고 해도 서방 하나만 못하지. 안 그래? 셋째 형수.”


형수는 타는 울음을 삼키느라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네, 네. 도련님.”

“나 어릴 때 열 올라서 펄펄 끓을 때 어머니도 몸져누웠을 때 형수가 밤새 업어 줬던 거 기억해요? 형한테 시집오기 전이었잖아요. 평생 고생해서 허리 아픈 어머니 대신 형수가 나 많이 업어줬죠.”

“···도련님.”

“이번에는 조카 차례에요. 그때 형수가 불러줬던 자장가도 불러주고 많이 업어줘요.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있었고 형들 누이들도 있었고 형수들도 있었어요. 조카가 아비 어미 보러 나왔는데 아비가 없으면? 그건 좀 경우가 아니잖아요. 우리 조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셋째 형이 가든, 내가 가든 어차피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상처일 터. 나는 홀몸이라 문제가 생겨도 나 하나 문제지만, 셋째 형에겐 아내와 태어날 자식까지 있으니, 형에게 문제가 생기면 형수와 조카에게도 문제가 생기는 셈이고, 그 문제들은 고스란히 아버지 어머니의 문제가 될 거라며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눈 고랑에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헛구역질하는 어머니의 뒤꿈치가 보였다. 가뭄에 시달린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뒤꿈치가. 고단함이, 잔인한 세월이 그제야 보였다.


그래서 더 고민하지 않았다. 소화가 머릿속 한쪽 구석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소화에게는 다른 사내를 만날 기회가 있다고. 그러나 몇 달 뒤 태어날 조카에게 아버지는 셋째 형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겁이 났다. 마을을 떠나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죽고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의젓하게 보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었다. 어쩌면 들켰을지도. 그래서 그렇게 다들 하염없이 눈물 흘렸는지도.


“셋째 형. 여러 말 마. 내가 가. 이제 형들도 나한테 팔씨름 안 되는 거 잊었어? 나 이제 겨우 열여섯인데, 지금 이 집에서 나만큼 힘쓰는 사람이 누가 있어. 이참에 세상 구경 좀 하지 뭐. 마을 사람 중 최초가 되겠네. 중원 십팔만 리를 다 돌아본 사람. 기다려, 돌아와서 천하가 얼마나 넓은지, 내 열흘 밤낮 자랑해 줄 테니까.”


그렇게 얼마 뒤 동쪽 지평선 위로 노란 해가 고개를 디밀었을 때, 잠시 혼자만 부엌에 있겠다던 어머니는 먹을 것과 이것저것 보따리를 한 아름 들고 왔다. 그때의 어머니는 결전을 앞둔 병사 같았다. 싸우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한 눈빛으로 돌아와서는 내 손에 바리바리 들려주기 시작했다.


“여자 눈에는 삐쩍 곯은 사내처럼 미덥잖은 사내가 없는 법이여. 자기 배 채울 수 있는 사내가 제 마누라 제 새끼 건사하는 것이지. 가다 허기지면 먹어라. 조카들도 주고. 나이는 조카들이 위여도 네가 숙부고 어른이여. 막내야.”

“예, 어머니.”


어머니는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죄지은 사람이 변명하듯 자기 할 말만 했다. 그 외면도 기억한다. 여전히.


“네 아버지랑 기다리련다. 행여나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거든, 아니면 참한 색시라도 만나거들랑 애써 오지 말고 거기서 살어. 오순도순 새끼도 낳고 기별할 수 있으면 하고. 색시랑 새끼랑 살다가 보고 싶으면 한 번 들르련. 아이고 내 새끼, 내 귀한 내 새끼. 다음에는 못난 이년의 자식 말고 천자의 자식으로 와야 할 내 새끼. 이제 가면, 이리 가면 언제 또 볼거나···!”


그 대목에서 나도, 어머니도 우리 가족 모두 완전히 무너졌다. 울음소리가 마을 어귀에 다가온 아침 햇살을 지평선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동트는 아침, 형제자매들에게 잡혀서 울다 울다 실신한 홍소화를 뒤로 하고 떠났다. 순박한 우리 마을은 그렇게,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늑대 아가리에 목을 내준 사슴처럼 반항 한번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갔다. 떠나면서 빌었다.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혹독한 겨울의 시작이었다. 당시 내겐 천하나 마찬가지였던 마을이 쌀알보다 작아진 뒤에도 걷고 또 걸었다.


이이는 날마다 아침에 봤던 지평선 너머로 우리를 이끌었다. 농사일에 이골이 난 나였지만, 행군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날마다 수십 리씩 어떤 날에는 백 리도 넘게 걸어대는 통에 늘 지쳐 있었고, 발바닥에서는 물집이 생멸을 반복했다. 겨울이 끝나갈 때쯤엔 굳은살 덕분에 언 땅을 딛고 서도 냉기를 느끼지 못했다.


죽음은 빠르게 찾아왔다. 첫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촌구석 무지렁이들이 예상치 못한 적의 이름은 동상이었다.


가끔 제때 제대로 된 숙영지를 정하지 못한 날에 혹한까지 겹치면 다수가 동상에 걸렸다. 풋내기 병사에게 동상은 저승사자나 마찬가지. 열에 여덟아홉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심하면 손발을 잃었고 죽는 것보다야 병신이 낫다며 손발을 자르면 생살과 뼈를 자르다가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다.


차라리 손발을 자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은 추위를 견디느라 앙다문 이가 부러진 밤. 부러진 이를 뱉으면서 빌었다. 봄을 달라고, 봄까지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그처럼 전쟁은 그 시작부터 참혹했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하였다. 며칠 밤낮을 걸어도 끝없이 펼쳐지는 땅, 천하.


나는 비로소 천하의 광활함을 깨달았다. 마을 밖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선조의 선조에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상 한쪽 귀퉁이쯤은 되는 줄 알고 살았던 마을과 뒷산이 얼마나 가소로운 땅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군사 훈련은 행군 중에 종종 이뤄졌다. 간단한 대형 훈련과 조악한 도법 훈련이 주였다. 마을을 떠날 때 지급된 건 붉은 두건 한 개, 이가 빠진 수도(手刀) 한 자루가 전부. 그때부터 낡은 칼 한 자루는 하늘이 됐다. 칼이 내 두 번째 운명이었다.


이름도 없는 도법은 초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단순하고 조악한 베기, 막기, 찌르기의 연계가 전부였지만, 행군 중에도 수시로 반복했다. 잘 드는 낫 한 자루만 있으면 눈을 감고도 매번 똑같은 높이로 벼를 벨 수 있었듯, 허기지고 피곤해도 손을 조금 다쳤거나 땀방울에 눈이 쓰라려도 정확하게 휘두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휘둘렀다.


그외에도 부대에서 무언가를 가르칠 때 나는 내 손으로 첫 송아지를 받던 때보다 집중했다. 하나라도 더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봄이 되도록 황군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이 이이를 의심했다. 황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적단을 결성하려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니냐며, 너도나도 낄낄거렸다.


그렇게 조금씩 풀리는 날씨처럼 마음속 긴장도 느슨해지던 어느 날, 우리는 서주성으로 들어갔고 모두 잔인한 겨울이, 지겨운 행군이 끝났다며 며칠 희희낙락하던 그날이었다.


황군을 이끈 장수는 승상 탈탈이었다. 커다란 체구에 목덜미가 어지간한 장정 허벅다리만큼 두꺼운 장사였다. 마치 먹구름처럼 서주성을 뒤덮었다.


탈탈은 자기 이름처럼 서주성을 탈탈 털었다. 직접 이이의 목을 벴고 서주성 내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이는 정해진 결과였다. 애초에 홍건적은 여러 파벌로 나뉘어서 사사건건 대립했고 이이가 주장을 맡기는 했지만, 지휘체계가 느슨하게 작동했다. 무장도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도 열등했다.


마을 사람 다수가 죽었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에는 매형들과 조카들도 있었다. 첫째 형네 조카는 배 한복판에 칼을 맞았고, 둘째 형네 조카는 목이 잘렸다. 둘째 매형은 먼저 다리를 잘렸고 비명 중에 목이 베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를 심고 밭을 갈던 농부들. 피는 간간이 가축 잡을 때나 봤던 촌부들은 그렇게 죽었다. 간단하고 허무하며 비참하게.


그 전투에서 나는 깨달았다. 생은 손등이고 사는 손바닥이라는 사실을. 생사가 낮과 밤에 빛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더불어 어렴풋이 인식했다. 내가 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전투가 벌어지자, 그전까지만 해도 터질 듯 뛰던 심장 박동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적병들이 성벽을 넘어 짓쳐 들던 때,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멋대로였던 호흡도 정갈해졌다. 낡아빠진 칼 한 자루에 모든 걸 맡기자고 다짐했을 때, 얼른 휘두른 수도가 두정갑으로 무장한 적장의 목을 베었을 때, 나는 기이한 편안을 느꼈다.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온이었다.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놀라울 정도로 쉬웠다. 칼을 휘둘러 적을 죽이는 일은 낫으로 벼를 베는 일보다 훨씬 쉬웠다. 수확할 때의 편리를 위해 벤 벼를 눕히는 방향을 고려할 필요도, 간격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멋대로 베어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희열이었다. 살인에서 오는 희열이 아니라 어떤 일을 너무도 쉽게 수행할 수 있음을, 자기 능력을 깨달은 데서 오는 희열.


아무 생각 없이, 베고 찌른다는 의식마저도 없이 무념무상. 달려드는 적을 베고 또 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주변만 비워둔 적군과 꽁무니 빠지게 달아나는 홍건적이 보였다. 재빨리 팽대와 조균용이 지휘하는 패잔병 무리에 합류해서 서주성을 빠져나갔다.


나는 서주성이 지평선에서 사라졌을 때, 타는 듯 붉은 저녁노을을 보며 빌었다. 두 번째 전투에서도 살아남게 해달라고.




간신히 적의 추격을 뿌리친 우리는 호주성에 도착했다. 호주성의 주장들은 홍건적의 군벌 수장들이었던 곽자흥과 손덕애였다.


그런데, 서주성 패배의 후유증을 채 떨쳐내기도 전에 사달이 벌어졌다. 곽자흥, 손덕애, 팽대, 조균용으로 나뉜 군벌들이 주도권 다툼을 벌인 것. 원인은 곽자흥이 지략이 뛰어난 팽대를 우대하고 산적 출신 조균용을 홀대한 것이었다.


줄곧 곽자흥의 지위를 노렸던 손덕애가 분해하는 조균용을 부추겼고 꾐에 넘어간 조균용은 밤중에 곽자흥을 기습, 포박해서 손덕애에게 넘겼다. 곽자흥은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손덕애와 조균용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렇게 손덕애를 수장으로 한 동계 홍건적의 지휘체계가 세워지는가 싶었는데, 그 녀석이 나타났다. 내 세 번째 운명.


호주 종리현 사람. 곽자흥의 사위. 나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들. 성은 주(朱), 아명은 중팔(重八). 태조 홍무제 주원장. 그 녀석이 내 세 번째 운명이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서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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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5화 +20 24.08.08 9,776 363 18쪽
25 24화 +21 24.08.07 9,571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32 369 21쪽
23 22화 +23 24.08.02 9,660 430 21쪽
22 21화 +14 24.08.01 9,905 367 18쪽
21 20화 +15 24.07.31 10,109 379 21쪽
20 19화 +21 24.07.30 10,054 440 18쪽
19 18화 +16 24.07.29 10,414 409 21쪽
18 17화 +32 24.07.26 10,331 548 20쪽
17 16화 +16 24.07.24 10,540 42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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