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트왕 김번트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현대판타지

완결

pacta
작품등록일 :
2024.07.27 15:09
최근연재일 :
2024.08.28 08:44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1,225
추천수 :
65
글자수 :
95,550

작성
24.08.24 21:23
조회
44
추천
3
글자
12쪽

환희

DUMMY

한국에 유명한 속설 중엔 그런 것이 있다.

수능이 되면 수험생들의 음기가 모여 유독 추운 날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그 말이 진짜기는 한지, 어느덧 11월을 바라보는 10월의 하루, 매일같이 떨어지는 기온을 체감하며 저녁질이 되어 해가 저물기 시작한 경기장은 관중들마다 두터운 외투를 걸친 채 오늘의 경기가 시작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가자! 오늘만 이기면 드디어 한국시리즈다!"


사직에서의 2연전을 모두 이긴 채 다시금 대구로 돌아온 오늘의 5차전.

어느덧 엠퍼러즈 선수들에겐 이틀 전까지 보이던 여유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오늘 경기를 지면 끝장이라는 불안감이 잔뜩 엄습했다.

플레이오프에서의 역스윕, 그건 또다시 역사가 반복되며 언급될 기록이기도 했기에 더욱 불안하리라.


반대로 타이탄즈의 선수단에게는 잃었던 자신감이 북돋으며 경기에 대한 기대, 또한, 앞으로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차오른 상태였다.

다들 말로는 절제한다지만, 훈련하는 모습들을 보면 날이 추운 것도 잊은 채로 발바닥이 공중에 붕붕 떠있었으니.


하여, 주장인 구현우 선배가 선수들을 소집하여 경기 전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결코 빠지지 않았다.


"다들 이때까지 잘했고, 너희 말대로 오늘만 이기면 한국시리즈다. 하지만 너무 긴장을 풀고 흥분하지 마라. 오늘 지면 그대로 끝이다. 항상 긴장하고, 또,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지? 자, 가보자. 타이탄즈! 파이팅!!!"

"파이팅!!!"


한 차례 손바닥을 모아 화이팅을 외친 우리는 경기 시작을 위한 준비를 끝마쳤고, 그렇게 엠퍼러즈의 2선발 외국인 투수, 카르피나가 마운드에 오르며 오늘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




"드디어 이 날이 왔습니다. 엠퍼러즈와 타이탄즈의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건 벼랑 끝 승부. 드디어 5차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엠퍼러즈가 2차전까지 모두 이기며 손쉽게 시리즈를 끝내나 했지만, 결국 타이탄즈가 사직에서의 2경기를 모두 잡으며 순순히 물러나지를 않았네요."

"그런데 재밌는 것이 오늘 선발 맞대결인 것 같습니다. 엠퍼러즈는 2선발 카르피나 투수를 올렸지만, 타이탄즈는 이진 선수를 선발로 올렸어요. 사실 이진 선수가 엔트리에 진입한 것도 상당히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 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 부분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타이탄즈의 선발은 멜라니 크로넨 박권호 김지민 모용석 순서로 이어졌고, 가을야구에서는 모용석 선수가 롱릴리프로 활용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이진 선수. 사실 이진 선수가 2군에서 선발수업을 받기는 했지만, 올시즌 1군에서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어요. 과연 신경선 감독의 묘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오늘 경기를 지켜볼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네요."


"자, 말씀드린 순간 카르피나 선수가 오늘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초구를 던질 준비를 합니다. 이번 시즌 190이닝동안 14승 2패를 기록하며 방어율 2.88을 기록한 카르피나 선수. 자, 제 1구⋯."



--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것 중 하나는 '키'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농구나 배구에서는 키가 곧 선수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도 불린다만, 야구에서는 그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다.

185가 넘는 내야수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있지. 키가 크면 무게 중심이 높고, 그렇다보니 땅볼을 처리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포수로서 가장 적정한 피지컬 또한 170대 중후반의 키라는 말이 있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블로킹과 관련된 이야기. 예컨대, 야구는 키가 작은 것이 유리하지는 않지만, 크다고 좋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

허나, 투수의 경우엔 또 다른 이야기다.



슈우우욱- 파앙!!!



"왜, 쫄았냐? 저번처럼 삼진먹을까봐?"

"⋯⋯."


카르피나의 위력적인 초구가 한가운데로 꽂혀 들어왔다.

허나, 내 눈에는 그것이 단순히 한가운데 공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키 2미터의 극단적인 오버스로우. 게다가 하필이면 릴리스 포인트(투수가 공을 놓는 지점)의 높이까지 감안한다면 정말로 아파트 2층 높이에서 공을 던지는 것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카르피나의 공은 150이 넘는 직구 자체도 위력적이지만, 그 공이 직구인지, 아니면 변화구인지조차 확실하게 깨닫기가 힘들었으니.



'침착하자. 침착해야해.'


반드시 살아나가야 한다. 초반의 기세를 가져오는지 못 가져오는지는 오늘 경기를 뒤흔들테니까.



슈우우욱-! 파아앙!


"스트-라이크!"


허나 어느새 뱃 한 번 잡아보지도 못하고 투 스트라이크.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침착? 아니, 침착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쳐야한다. 어떻게든 쳐서 나가야 팀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으니까.

번트? 아니면 스윙? 번트, 번트다. 나를 믿고 친다. 쓰리번트 따위, 신경써서는 안 된다.


카르피나의 왼다리가 들리고 오른팔이 하늘로 솟구친다. 이내, 손가락 끝에서 공이 긁힘과 동시에 순식간에 눈앞으로 공이 다가온다.


딱-!


배트에 공이 맞고 구르기 시작했다. 1루를 향해 박차며 힐끗 보았지만, 이 정도면 완벽⋯.


"파울-!"


허나, 1루에 도착하기도 전, 주심은 타구가 파울라인에 나갔다며 선언해버리고 말았고, 그대로 쓰리번트 아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내 손에는 확실한 느낌이 들었다. 타구의 힘이 죽었고, 얼마 구르지 않아 멈출 정도로 약한 번트였다.

허나, 포수가 잡기엔 멀었고, 투수가 잡기에도 먼 타구. 3루수가 아주 빠르게 대쉬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했던 타구. 그런 타구지만, 라인을 타고 흐를 것 같지는 않았는데⋯.


"대영아. 드가지 말고 있어봐라."

"네?"


코치님의 제지가 있자마자 1루 원정측, 우리의 덕아웃에서 신경선 감독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렸다.


-부산 타이탄즈 측 요청으로 타구의 파울 페어 여부를 비디오 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곧이어 대구 캐슬파크의 앰프를 타고 비디오판독을 중계하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전광판을 통해 타구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내 배트를 맞은 타구는 처음부터 힘없이 굴러가기 시작했고, 라인 위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던 그 순간 3루수가 공을 집어드는 장면이 그대로 흘러나왔고, 양측의 관중석에선 번갈아가며 세잎과 아웃콜이 외쳐졌다.


3분의 시간을 꽉 채운 후, 헤드셋을 벗은 심판은 묵묵히 뛰어나오며 양팔을 넓게 펼쳐보이며 세잎콜을 알렸다.


-와아아아아!!!!


극명히 갈리는 반응, 덩달아 투수 마운드와 대칭된 3루 베이스 위의 3루수는 자신의 실책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였다.


가볍게 손을 들어 당연한 결과라는 듯 세레모니를 펼치기는 했으나, 나 또한 3루수의 마음은 알 것 같았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 경멸. 큰 경기인지라 긴장한 몸이 한 발자국을 더 빠르게 나아가도록 만들었겠지.

허나 그런 그에 대한 공감과는 별개로 동정심 따위는 없다. 그에 대한 동정심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에 한 발이라도 빠르게 움직여 2루로, 그리고 3루로, 홈으로 나아가는 것이 내 임무였으니.




***




"여기서 장휘철 선수의 적시타! 부산 타이탄즈가 1회초, 선취점을 올립니다!"

"이렇게 되면 엠퍼러즈 입장에선 매우 아쉽겠네요. 조금만 더 지켜봤다면 파울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 타구였는데 그걸 집어든 바람에 출루를 허용했고, 곧장 김대영 선수에게 도루까지 허용해버리고 말았어요. 큰 경기에선 이런 부분 하나하나가 정말 아쉽게 다가오거든요. 조금 더 집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 여기서 병살이 나오네요. 3번타자 구현우 선수의 유격수 땅볼, 그리고 5-4-3으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 타이탄즈에게는 아쉬운 결과입니다."

"예, 이런 경기에서는 아무래도 더 집중을 하는 것이⋯."



--



출루한 자의 의무. 홈으로 들어오는 것.

그 임무를 수행하기는 했으나, 그 뒤로 이어지지 못한 공격으로 덕아웃의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다.

뭐,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기는 했다. 가을야구는 모두가 전력을 다하는 무대. 강팀의 에이스급 투수들이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을 짜내어 던지는 투구를 타자들이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탓에 정규시즌은 타격이 좋은 팀이 유리하나, 단기전은 투수가 좋은 팀이 유리하다는 말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좋은 수비겠지만 말이다.


딱-!


"센터!!!"


하여, 평정심을 유지한 채 천천히 뛰어가 잡아낸 타구에 동료들의 얼굴이 더욱 밝아지는 것은 단지 기분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여나 점수를 주게 된다면 경기의 패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한 점을 낸다면 이걸로 인해 경기를 이길 수도 있다.

배트를 쥘 때나 글러브를 낄 때나 선수들의 긴장감은 잔뜩 고조되는 것이 당연할 일이었고, 그런 가운데 나만큼은 그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것도 그 상태창의 스킬 탓인가? 외려 처음으로 경기를 나오던 그때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펜스 밖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오직 타구음이 청명하게 들리고, 동료들의 콜이 확실하게 들린다.


"센터!"


조금 먼 타구도 빠르게 박차고 달려가 잡아낼 수 있고, 평범한 타구는 말할 것도 없다.


공격, 수비, 공격, 수비. 그렇게 1대0의 팽팽한 승부는 어느덧 7회에 도달했고, 양팀 선발의 투구수가 100구를 넘기며 마운드를 넘겨주게 된 어둑해진 밤.

다시금 이닝의 시작은 내 타석부터였고, 이전의 실책을 만회하겠다는 듯 3루수는 한층 더 집중한 모습을 내보이며 글러브를 연신 탕탕대었다.

허나 그런 것은 오히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일 뿐.


따악-!


투수의 한가운데 초구 직구를 받아치자, 느릿하게 휘청거리며 날아간 공이 3루수의 머리를 살짝 넘어간다.

이런 타구, 내게는 담장을 맞추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타구니까.


순식간에 1루 베이스를 넘었고, 3루수가 공을 집어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2루베이스까지 절반이상을 내딛은 차였다.

급한 마음에 3루수가 공을 잡고 송구를 했지만, 내 손이 이미 2루베이스에 닿은 후였다.


"세잎!"


야구는 집중력, 큰 경기는 더더욱 큰 집중력.

일전에 나를 휘감았던 그 전능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나로 하여금 자신감을 채워주어 집중력을 향상시켜주었으니.

어느덧, 나는 '야구의 신'이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




"삼진! 이렇게 경기 종료됩니다. 스코어 2대0! 모든 득점은 김대영 선수에게, 모든 타점은 장휘철 선수에게서 일어났습니다. 타이탄즈는 이대로 광주로 향합니다!"


캐스터의 간단명료한 콜, 허나 그 누구도 이 상황을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30년. 무려 30년이다. 타이탄즈가 우승이 아닌,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것만 해도 30년이라는 말이다.

당신이 타이탄즈의 팬이 아니라도 한국야구를 사랑하는 이로서 이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애써 침착을 유지한 채 떨리지 않게 내뱉은 목소리 뒤로 그들의 표정은 잔뜩 놀라 그 고조감을 애써 숨기는 것에 급급했다는 말이다.


그들 또한 그러한데, 부산과 대구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타이탄즈의 팬들은 또 어떤 마음일까.

그것은 그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온갖 감정의 잡탕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바야흐로, 11월을 바라보는 10월의 어느 밤이었다.


작가의말

본디 예정했던 내용보다 많이 끌어졌습니다. 곧장 연재할 글을 두고 고민하며 시간이 많이 끌어지고 있느라 죄송하다는 말씀밖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사실상의 제대로 된 구상을 하고 연재하며, 독자님들께 인사드릴 첫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아직은 하찮기만 한 작가 pacta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 올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번트왕 김번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 30년의 주인공 +4 24.08.28 28 2 20쪽
» 환희 24.08.24 45 3 12쪽
15 주인공 24.08.20 49 2 12쪽
14 낭떠러지의 앞에서 24.08.16 63 3 15쪽
13 가을야구로 가는 길 24.08.13 60 2 12쪽
12 악?동 24.08.12 65 3 12쪽
11 악동의 탄생 +2 24.08.10 69 3 13쪽
10 팀을 믿는 법 +2 24.08.08 77 4 12쪽
9 또라이 24.08.07 78 5 11쪽
8 열심히 해주세요. +2 24.08.05 82 4 12쪽
7 새로운 보금자리. 24.08.03 79 4 12쪽
6 인터뷰 마스터로의 길? +4 24.08.02 88 4 12쪽
5 싸이클링 스틸 +4 24.08.01 87 5 12쪽
4 내달리다. +2 24.07.31 82 6 11쪽
3 누가 외야에 미친개를 풀어놨어? +2 24.07.30 85 4 12쪽
2 대전에서 서산으로, 서산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부산으로. 24.07.29 83 5 12쪽
1 번트마스터의 각성 24.07.27 106 6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