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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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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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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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DUMMY

띠링!


알림 소리에 스마트폰을 열자 블랙아고라 애플리케이션에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현재 블랙아고라에 오퍼를 넣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메시지를 확인한 천만근은 곧바로 백수범을 호출했다.


잠시 뒤 노크도 없이 대표실 문이 열렸다.


“대표님?”

“너는 노크도 할 줄 모르냐!”


똑똑!


백수범은 그제야 문을 두드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두통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됐죠?”

“아··· 빨리 와서 앉기나 해!”

“무슨 일인데요?”


백수범이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오퍼가 왔다. 결정된 건 아니고 신인을 찾고 있더라. 상대도 신인인데, 거물이야.”

“누군데요?”

“아론 가르시아.”

“예? 제가 아는 그 아론 가르시아가 맞나요?”

“그래. 맞아.”


백수범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상대는 복싱 세계 챔피언이었다.


“근데 이런 거물이면 랭커들도 하려고 달려들 텐데 신인만 찾는다고요? 큰판이 벌어질 기회인데 웬일이죠?”

“블랙아고라는 처음이라 이거겠지. 후후···.”


굳이 속에 든 말은 하지 않고 가식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백수범은 금방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데뷔전은 쉽게 먹고 가겠다 이거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론 가르시아에게 던져주는 떡밥?”

“그리고 더블H까지 오퍼가 왔다는 건, 주주들이 피하고 있다는 뜻이겠고요?”

“누가 봐도 불리한 경기니까. 아무리 블랙아고라라고 해도 복싱 세계 챔피언과 비교할 만한 신인이 있을까? 게스트로 들어와 돈만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겠지.”

“그런데 왜 이런 말을 꺼내시는 거죠? 우리 쪽 신인이면 지금··· 아, 안 돼요, 안돼! 그 생각 당장 접으세요!”


손을 흔들며 말리자 천만근도 수긍한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오는 말은 전혀 달랐다.


“호들갑은··· 나도 알아. 하지만 블랙아고라에서 오퍼가 오면 선수에게 알려야 해. 그리고 강혁이 의향도 들어봐야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나?”

“아니 대표님! 그럼 선수가 한다고 하지, 빼겠어요? 강혁이 입장 난처하게 왜 당연한 걸 물어보려고 해요?”

“나도 분명히 말할 거야. 이거 블랙아고라에서 세계 챔피언에게 던져주는 떡밥 매치고 사람들은 널 희생양이라 생각한다고.”


백수범은 어이가 털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신경을 사포로 긁는 말인가?

선수가 이런 말을 듣고도 빼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 말을 듣고 누가 피하겠어요?”

“그렇지만 사실이지. 현실 그대로를 알려줘야 해.”

“아, 안됩니다! 결사반대라고요!”

“솔직히 나도 걱정되고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강혁이가 결정해야 해. 이미 상대를 찾아달라고 블랙아고라에 오퍼를 넣은 상태이기도 하고, 규정상 주주로써 들어온 오퍼를 선수에게 알려줄 의무도 있어.”


그럼에도 백수범은 계속해서 말리며 대화는 진전 없이 끝나 버렸다.


점심때가 지나서 백수범은 강혁을 데리고 대표실을 다시 찾았다.

백수범의 얼굴에는 여전히 수심이 가득했지만, 강혁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걸 본 천만근은 백수범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저 입 싼 놈이 아직 말을 하지 않았나?’


분명 만나자마자 오퍼와 아론 가르시아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강혁을 보면 또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 오퍼 들어왔다면서요? 바로 진행 하시죠. 내일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뭐? 상대가 누군지 모르나?”

“압니다. 복싱 선수라면서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강혁을 보며 천만근은 어안이 벙벙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복싱 세계 챔피언을 무슨 동네 양아치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왜 백수범의 안색이 좋지 못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수범이 답답했는지 입을 열었다.

데뷔전부터 이길 가능성이 적은 경기는 어떻게 해서든 말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냥 복싱 선수가 아니야. IBF 크루저급 세계 챔피언 아론이야! 몰라?”

“아롱이요?”

“그래! 으, 응?

“옆집 개 이름이 아롱인데 이름 참 개 같네.”

“아, 아니! 아롱이 아니라 아론! 아론 가르시아!”

“아롱이든 아론이든 상관없습니다. 빨리 시합 잡아주세요.”


백수범이 좀 말려보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자, 천만근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선수가 한다는데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또 머리는 불리하다고 하고 있는데, 강혁의 눈빛을 보자 가슴은 이상하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뜨거워지겠는데? 후후···.’


강혁이 사인한 계약서는 그날 바로 블랙아고라로 넘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가 잡혔다는 회신이 왔다.


경기는 사흘 후였다.


약물 이슈로 뉴스에서 나오는 아론가르시아의 현재 상황으로 보아 돈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잡히는 경기는 천만근도 처음이었다.


* * *


JH백화점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기를 무슨 백화점 지하에서 한다는 말인가?


백화점 후문으로 가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전용 엘리베이터로 지하 13층에서 내렸다.

JH백화점에는 지하 8층까지 밖에 없었다.


계체도 없이 대기실에서 한 시간 정도 몸을 풀며 대기하자 스피커에서 복도를 따라가라는 말이 나왔다.

어렵지 않았다.


길지 않은 복도였고, 나오자마자 환한 조명과 함께 케이지가 보였다.

조금 이상한 것은 관중석이 없었다.


그저 케이지를 밖에서 크게 둘러싸고 있는 둥근 유리만 보일 뿐이었다.

겉이 시커먼 유리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3층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아마 유리 뒤에서 주주들이 경기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케이지는 체육관이나 티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컸다.

기분 때문이 아니라 진짜 두 배는 큰 거 같았다.


상대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강혁은 제자리에서 탕탕 뛰며 몸을 데웠다.


* * *


유리 안, 2층의 어느 방.


그런 강혁을 보며 놀라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의 뒤에 서있던 장년의 사내도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김 실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노인이 묻자 대한그룹 비서실장 김선우도 당황스러운지 안경을 고쳐 써야 했다.


“알아보겠습니다.”

“모르면 됐어. 굳이 알려고 하지 마.”

“네···.”

“그 후로 연락은 없었던 거지?”

“없었습니다.”

“그놈 참··· 어찌 그리 지 애비랑 똑 닮았는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김 실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병실에 명함을 두고 왔다.

명함에 찍혀있는 대한그룹이라면 한 번쯤은 연락할 법한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왠지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역시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모시는 대한그룹 이강철 회장의 핏줄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 사이 아론 가르시아도 입장했고, 잠시 간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베팅을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룸 벽면 스크린에 나오는 베팅시간은 채 백 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얼마나 할 예정이었지?”


노인이 묻자 김선우 실장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좀 많습니다.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경기라···.”

“JH 판돈이 얼마라고?”

“오백억입니다.”


그럼 게스트들도 오백억 원까지 베팅할 수 있었다.


“허허! JH가 작정을 했군. 최고위에서는 왜 이런 경기를 허용한 거지? 어쨌든 오늘 블랙뱅크가 파산하는 거 아닌지 몰라.”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계획대로 아론에게 베팅할까요?”

“아니. 내 손주를 두고 그리할 순 없지.”


갑작스러운 말에 김 실장이 놀라 노인을 쳐다봤다.


“회장님, 백억입니다.”

“나보고 손주 대신 양키놈을 선택하라고? 안될 말이야. 마음에 계속 남는 것보다 차라리 돈을 잃는 게 나아. 손주 놈 얼굴 본 값을 비싸게 치렀다고 생각하면 돼.”

“차라리 돈을 따서 그냥 도련님께 드리는 것이 어떠십니까? 이건 그냥 돈만 잃을 뿐입니다.”

“대한그룹이 찍힌 명함을 줬는데도 연락 한번 없는 놈이야. 돈을 준다고 받을까?”


김 실장도 인정하는 부분이라 할 말이 없었다.

무거운 손으로 베팅을 끝낸 김 실장은 노인을 보며 다시 물었다.


“회장님,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도련님이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은 거의 하지 않던 김 실장이었다.

노인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무슨 생각이 있으니 나왔겠지. 아무 대책 없이 나왔다면 그건 그것대로 스스로가 책임져야겠지.”


손자 때문에 백억을 태우면서 하는 말치고 너무 냉정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손자의 모습이 기꺼운 듯 이강철 회장의 얼굴에서만큼은 온화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병상에 누워있었던 손자가 너무나 건강해진 모습으로 케이지 안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 * *


베팅 시간이 끝나자 경기는 바로 시작되었다.


아론은 의외로 주먹을 쭉 내밀며 다가왔다.

글러브 터치는 ‘서로 최선을 다해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뜻이었다.


내려다보는 아론의 눈빛에서 오만함이 느껴졌지만, 강혁도 손을 내밀며 글러브 터치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론의 앞발이 슬쩍 들어오며 뒤에 있던 주먹이 송곳처럼 찔러 들어왔다.

명백한 비매너 행위였지만, 여기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블랙아고라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론은 더 공격하지 않고 뒤로 빠졌다.

강혁이 가볍게 막아 내자 아론도 조금은 놀란 모양이었다.


상대를 더 흔들려는 생각으로 아론은 입을 털기 시작했다.


“노란 원숭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는 동물원이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거기 가면 바나나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인종차별까지 하며 강혁을 도발했다.

상대가 흥분할수록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지 강혁은 침착해 보였다.


“뭐래는 거야?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해.”


뭘 알아들어야 타격이 조금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비매너 행위로 화는 이미 나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걸 겉으로 내색할 만큼은 아니었다.


‘저런 놈과 치고받아봤자 시간 낭비다. 빨리 끝내고 운동이나 가자.’


복싱 세계 챔피언을 무슨 동네 양아치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보폭을 넓혀 앞으로 쭉 들어가자 아론이 뒤로 빠지면서도 연속으로 잽을 날렸다.


펀치를 스치듯 가볍게 피하며 강혁이 더 깊게 들어가려 하자 아론도 더 이상 피할 마음이 없었던지 하체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큰 거 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리와 등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며 허리를 틀자 이미 주먹은 회전하고 있었다.


강혁이 들어올 것을 계산하고 날린 펀치였다.

하지만 빠르게 들어올 것만 같았던 강혁은 여전히 펀치 거리 밖에 있었다.


아론의 펀치가 어이없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강혁의 다리가 움직였다.


퍽!


“끄아아아아아악!”


괴성과 함께 양손으로 다리 사이를 잡고 바닥을 구르던 아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실신한 아론의 입에서는 허연 게거품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경기는 고간차기 한 방에 끝났다.

강혁은 실신한 아론을 보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말을 내뱉었다.


“이미 고자 새끼라 그런지 그렇게 미안하지는 않네.”


아론이 들었다면 한 번 더 게거품을 물었을지도 몰랐다.

케이지 밖에 있던 백수범이 뛰어 들어와 강혁을 얼싸 안으며 기뻐했다.


* * *


유리 안, 룸에서 지켜보던 이강철 회장과 김 실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강혁이 이길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강혁에게 베팅한 이강철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먼저 뗀 건 김 실장이었다.


“여, 역시 도련님은 계획이 다 있으셨네요.”


얼굴에서 흐뭇함을 숨기지 못하던 이강철 회장은 갑자기 베팅한 것이 생각났다.


“이거··· 손주한테 받는 용돈이 너무 큰데?”


거의 대부분의 게스트들이 아론 가르시아에게 베팅했다.

역배중의 역배였다.


“회, 회장님···.”


김 실장의 목소리가 떨리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강철 회장도 이런 김 실장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배, 배율이 이십오···.”

“뭐?”

“회장님! 무려 이천오백억을 먹었습니다!”

“허허··· JH는 오늘 속이 많이 쓰리겠어.”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손자에게 받은 용돈치고 너무 컸다.


기뻐하는 이강철 회장과 달리 다른 룸에 있는 천만근의 표정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내가 왜 5억밖에 베팅하지 않았을까! 왜! 도대체 왜! 이런 빠가사리 같은 놈···’


더 많은 금액을 베팅하지 않은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역사가 없을 정도의 역배에서 자신의 선수에게 고작 5억만 걸었다는 것이 너무나 창피했다.

물론 이겼으니 드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자학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백수범이 들어왔다.


“대표님, 빨리 가시죠.”

“강혁이는 어디 가고 왜 너 혼자야?”

“오늘 가슴 하는 날이라고 먼저 올라갔는데요.”

“뭐야? 오늘 시합 뛴 놈이 무슨 운동이야?”

“시합은 무슨, 아까 안을 때 보니까 땀 한 방울 안 흘렸어요.”


경기 내용을 보면 그럴만하긴 했다.

고간차기 한 번에 끝났으니···


“이겼는데 오늘 소고기나 먹죠. 역배라 돈도 많이 땄을 텐데. 얼마나 베팅했어요? 이십억? 삼십억?”

“오, 오···.”


말을 잇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손이 보였다.

백수범은 외삼촌이 얼마나 큰 금액을 땄으면 손까지 떨까 싶었다.


“이야! 역시 대표님! 데뷔전에 그것도 극악의 언더독에게 오십억이나 베팅하다니! 그럼 이게 도대체 얼마야?”

“오··· 억.”

“오십억?”

“오억···.”

“장난치지 마요. JH 판돈이 오백억인데?”


말하는 분위기로 보아 장난이 아님을 깨닫자 백수범은 속에 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아니 뭐 이런 븅ㅅ···.”

“뭐?”

“우리도 빨리 회사로 들어가자고요. 강혁이 운동 끝나면 소고기나 먹으러 가시죠.”


나오는 쌍욕을 급하게 막으며 말을 돌렸다.

아쉬워하는 천만근을 억지로 끌고 나온 백수범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더블H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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