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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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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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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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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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DUMMY

「그럼... 어떡하면 좋죠?」


「잘 모르겠소. 나는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그렇겠죠...」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이곳은 누군가에겐 고향이고 집이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단 하나뿐인 휴식처다.

그런 곳을 잠시 쓰고 내다 버릴 자들에게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남자는 집을 강탈당한 자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양에게서부터 답은 가지고 왔소?」


「아, 네. 답은 들었는데...」


「유의미한 말이었소?」


하지만 그 고향을 지키기 위한 해결책은 아직 없다.

그저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들여보내고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

그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기다리고 있다.

아무런 의미없이 허비하고 있다.


「아무 말도 없었소?」


「네...」


「그럼 방법이 없소. 이것 참, 이런 상황은 그리 좋지 않은데 말이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엘리자베스 언니를 탓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겠지요.」


따뜻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남자도 모르지 않는다.

그에게 크리스틴이 있듯이, 앤에게도 엘리자베스란 든든한 우군이 있는 것일 터다.

그 사람이 지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지켜온 사람일 테니까.

그러니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앤은 기꺼이 언니와 손을 잡고 캄캄하고 어두운 강을 기꺼이 건널 거다.


「난감하군.」


하지만 남자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약속한 것이 있고, 남자는 그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다.

앤이 엘리자베스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그도 그래야 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하고 가라앉을 수는 없다.

아무런 빛도 없는 곳으로 굴러떨어져 익사할 수는 없다.


「방법이 없을까요?」


「그걸 나한테 묻는 거요?」


「달리 물어볼 사람도 없잖아요.」


「달리 대답할 방법이 없소.」


그러나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들 사이에서 절망을 이야기한다.

그에겐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햇빛이 동쪽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남자에겐 닿지 않는다.

그에게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듯이 외면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야 그렇겠지만, 뭘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어떻게든 숲을 탈환해서...!」


「어떻게 말이오?」


「그건...」


남자의 되묻는 말에 앤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가 이내 사그라든다.

어떤 길을 택해도 죽음 뿐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는 거다.

성벽에 의지해 생명을 억지로 이어나가다 산화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지금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그러니 그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손님일 뿐인 자에게 모든 운명을 맡기고 요행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남자 또한 이곳에 있는 한 똑같은 운명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것 참, 어떻게 한다.」


그러나 행운은 언제나 그의 편이 아니다.

그 녀석이 남자와 함께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가 크리스틴을 따라갈 이유조차 없었을 거다.

어쩌면 남자가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어떻게 죽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일 테니까.


「앤 양도 방법을 생각해 주시오.」


「저는...」


어떻게 사느냐.

그 기로에서 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허둥대고 있다.

그녀의 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소녀 또한 뚜렷한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일 텐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진리를 앤 또한 모를 리가 없는데.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됐소.」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일을 누군가는 해결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남자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소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발버둥쳐보는 것 정도일 거다.

자기 발을 옭아매는 쇠사슬을 어떻게든 끊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일 정도다.

남자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열매를 보며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나설 자는 단 한 명.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남자 또한 잘 알고 있다.


「역시 이 방법 뿐이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시 생각하던 남자는 단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내고 다시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신이 있다면 이것 또한 그의 인도일 것이다.


「뭘 하시게요?」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구려.」


「무슨...?」


앤의 말에 남자는 대답 대신 자신의 무기를 가리킨다.

금방이라도 밤이 찾아올 것만 같은 흑빛의 도끼가 햇빛을 받아 본 적 없는 빛으로 반짝인다.

그 모습이 전쟁을 바라는 광전사의 모습 같았다.

죽을 것이 뻔히 보이는 전장으로 나가기를 원하는 미치광이의 모습 같았다.


「말도 안 돼요!」


그 모습에 기사 소녀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나무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자가 홀로 여기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남자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우선시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를까.

소녀는 그 사실에는 눈을 가리고 화를 낸다.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감정 뿐인 것처럼 화를 낸다.


「미친 거예요?!」


「미치지 않았소.」


남자는 혼자.

저 많은 무법자를 혼자 이겨낼 수 없을 거였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자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일 터였다.

그것이 소녀에게는 상식이다.

남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상식이다.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없으면 크리스틴은...!」


「알고 있소.」


「그럼 어째서...!」


그러니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일 터다.

이해를 뛰어넘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그래, 그 말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이다.

그 누구라도 수천 명의 적에게 둘러싸여 싸움을 벌이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 누구라도 수천 명에 적에게 난도질당해 최후를 맞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 외에는 방법이 없소.」


그러나 그 외에 방법은 없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 보아도 남자처럼 용감한 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길이 있다면 당연히 그 길로 갔을 거다.

그렇지 않으니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죽치고 앉아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남자는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그러니 그런 무모하면서도 당연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거겠지.


「그건 너무 무모해요!」


「그럼 어떻게 하겠소? 이대로 굶어 죽겠소?」


「그건...」


「아니면 뭐라도 해보겠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요?」


「저, 저라면...」


그렇기에 앤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설득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결국 남자를 말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해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기적과도 같이 생환한다면, 그것은 이 성채의 안전과 평화와 함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사 소녀는 더 이상 그를 말리지 못한다.

다만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당신은... 할 수 있나요?」


남자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답하고 싶지 않았을까.

답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어느 이유에서건, 남자는 그 무거운 입술을 움직여 말하지 않는다.


「할 수 있나요?」


앤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한다.

겨우 발견한 희망이라는 듯이 되묻는다.

어두운 미래를 몰아낼 단 하나의 별빛이라는 듯이 추궁한다.

그 말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단어 하나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거짓과 진실이 혼합된 현실 속에서 단 하나의 길은 어둠에 가려져 있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믿어주겠소?」


「저는...」


대신 그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이어 담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말할 필요도 없는 공리를 입에 담았다.

증명할 필요도 없는 원리를 입에 담았다.

그러니 그 답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을 말해야 당연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럴 거요.」


그래, 이것이 남자가 원하는 답이다.

평범하고 당연한 답.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들을 수 있는 말.


「하지만... 어떡하면 당신께서 마음이 편하실까요?」


그러나 앤은 뒤이어 남자의 생각과 조금 다른 답을 내밀고 회신을 기다린다.

아니, 어쩌면 그가 생각한 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다.

이 성채를 위해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다.

용기를 불어넣는다면 그의 뒤를 이어 숭고한 의미를 지킬지도 모르는 자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는 다른 답안지를 내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남자는 그 말에 어떤 점수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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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 24.09.10 3 0 9쪽
36 36 24.09.09 4 0 10쪽
35 35 24.09.09 4 0 10쪽
34 34 24.09.09 6 0 9쪽
33 33 24.09.09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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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 24.09.08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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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 24.09.07 5 0 9쪽
27 27 24.09.07 6 0 9쪽
26 26 24.09.07 5 0 9쪽
25 25 24.09.07 5 0 9쪽
24 24 24.09.06 5 0 10쪽
23 23 24.09.06 6 0 9쪽
22 22 24.09.06 5 0 9쪽
21 21 24.09.06 5 0 9쪽
20 20 24.09.05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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