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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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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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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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이대로는 안 되겠군.」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끝없이 펼쳐진 검은 적을 내려다본다.

성벽에 서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거다.

초록빛 숲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무법자들을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는 거다.

이때야말로 최선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때다.

그 어떤 노력도 무의미해 보이는 때다.

절망만이 지배하는 시간.

이 시간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방법이 없는데.」


답은 단 하나라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다.

분연히 떨쳐 일어나 기치를 휘날리며 분전하는 영웅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렇게 할 자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단 한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영웅.

어려운 시대에 홀로 일어서 핍박받는 자들을 이끄는 자.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겠지.

그리고 그가 아는 자 중에 단 한 명, 그런 사람이 있다.


「그것이 옳은 일일까.」


그 영웅은 길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물론 손을 움직여 바로 앞에서 죽일 듯이 달려오는 무법자를 처치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죽이지 않는다면 죽는 것은 그일 테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다.

이 거지같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교양이다.


「흠.」


그러나 남자는 이렇게 죽여봐야 파멸만이 기다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영웅은 실패자로 기억되겠지.

남자는 그런 실패자를 하나 알고 있다.

목적 없이 산화한 낙오자를 알고 있다.


「방법이 없군.」


다시 실패할 수 없다.

크리스틴을 위해서도 그럴 수 없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강렬해서였을까.

남자는 자신에게로 돌진하는 두 명의 무법자를 해치우고 주변을 둘러본다.

마침 근처에 튼튼한 밧줄과 단단한 기둥이 있었다.

남자는 그 밧줄을 몸에 감더니 기둥에 묶은 다음 성을 내려갔다.

나는 듯이 하강해 적의 한가운데로 무모한 돌격을 했다.

성 아래에 있던, 저마다의 무기를 꼬나쥐고 성벽에 오를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적들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이 온통 다른 쪽에 쏠려 있던 까닭이었다.


「뭐, 뭐야?!」


그렇기에 남자는 너무나도 수월하게 무법자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들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었다.

검은 도끼를 들고 홀로 일어선 자가 되어 적을 처단할 수 있었다.

남자는 무심히 도끼를 휘두르며 자신이 설 곳을 만든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오면 무기를 짧게 쥐고 상대가 무기를 놓게 만든다.

그 어떤 자도 할 수 없을 영웅적인 전투다.

그래, 여기에는 오랜 세월을 넘어 다시 현현한 영웅이 있다.

죽음과 삶을 결정하는 사신이 있다.


「끄아아악!」


남자의 손에 무법자는 선혈을 흩뿌리며 차가운 땅 위에 쓰러진다.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이미 생명을 다해 대지에 흩뿌려진 무법자 뿐이겠지.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죽은 자를 보지도 않고 다시 도끼를 휘두른다.

그 도끼질에 한 명의 무법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가 으깨진 채로 절명한다.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한 무리의 저급한 영혼들이 불나방처럼 그를 향해 달려든다.

그들의 운명 또한 정해져 있다는 듯이 차례차례 하강한다.


「저놈부터 죽여! 저놈부터!」


무법자들의 날카로운 외침이 성채 주변을 머물다 남자에게로 파고든다.

그와 함께 어둠이 붉은 별의 광휘로 물드는 것처럼 흑색이 적색으로 물들어 간다.

붉다 못해 피비린내 나는 색으로 적셔진다.

무법자들은 벌떼같이 그에게로 달려들어 무기를 내리꽂는다.

남자가 막아보려 했지만, 그 또한 한 인간.

팔이나 다리에 자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붉은 피가 땅으로 하염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윽...!」


별 하나로 밤하늘을 수놓을 수는 없다.

홀로 어둠을 밝히는 등대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저문다.

사방이 적뿐인 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희망을 잃지 않고 달려와 줄 아름다운 이다.


「이랴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길이 성문에서부터 날아들었다.

길고 얇은, 날카로운 창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 무법자의 등에 정확히 꽂힌다.

그 덕분에 적이 갈팡질팡하는 틈이 생겼고, 남자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잘 훈련된 맹수처럼 상처가 난 틈을 놓치지 않고 물어뜯었다.


「당신, 괜찮아요?!」


창을 던진 사람은 앤이었다.


엘리자베스에게 다녀온 그녀에게 답이 있을 것이다.

그 답을 들으려면 일단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한다.

아무런 의미 없는 답이라도 그 또한 답이 될 테니까.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보아야 한다.


「괜찮소.」


흰 말을 타고 성문을 박차고 나와 당황하는 무법자들을 소탕하는 앤.

그 모습을 보던 남자의 손 또한 빨라진다.

그가 이곳에서 무너질 수 없듯이, 그녀 또한 여기에서 마감하고 싶지 않을 터다.

앤 또한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터고, 그 바람은 남자 못지 않을 테니까.


「쏴라!」


앤의 명령에 끝없는 화살이 날아와 그를 둘러싼 무법자들에게 명중한다.

그 덕분에 그를 둘러쌌던 포위망이 잠시 열렸고,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힘차게 적을 내리찍었다.

한을 풀듯이 휘둘러 댔다.

그러자 스무 명도 되지 않는 기사들이 용감하게 창을 들고 돌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맨 앞에는 앤이 있었다.

늠름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남자가 바라던 아름다운 이만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꽤 용맹스럽고 고결한 모습이었다.

그는 기사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도끼를 휘둘러 한 명의 무법자를 더 끝장내었다.

그리고 먼 시대의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늦었구려.」


고맙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늦지 않게 와줘서 다행이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딱딱한 목소리로,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이 앤을 나무랐다.

그 목소리에 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본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소?」


그러나 남자는 그 시선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영웅이 될 만한 자에게는 더 많은 시련을 주어야 한다.

남자가 그 시련을 내릴 정도로 강인한 자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가 겪은 시련들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죄송해요. 많이 늦었나요?」


말에 담긴 진심을 느낀 것일까.

남자의 말에 앤이 항의 대신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어느 순간보다도 기사다운 순간의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주변을 에워쌌던 무법자를 쳐다보았다.

기사들의 등장으로 성채에서 떨어져 깊은 숲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겁쟁이들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오늘 다시 나타나지는 않겠지.

남자는 그림자가 잔뜩 진 뒷모습들을 보며 속삭이듯이 중얼거리고는 앤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은 아직 그를 향해 뻗어 있었다.


「아니오, 제 시간에 왔소.」


「늦었다고 하셨잖아요.」


「해 본 소리요.」


다른 기사는 어떤지 모른다.

그의 기억 속 마지막 기사는 도의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이 그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그 누구보다도 성결한 모습으로 치졸한 짓을 저질렀다.

다만 여기 있는 앤이라는 소녀는 그 어떤 기사보다도 기사다운 모습으로, 고결함과 도도함을 잃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 같다.

잠깐의 만남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에게 보여준 모습은 완벽한 기사답다.


「그대는 흔들리지 않을 테니.」


완벽한 기사.

혼란한 세상에서는 필요 없는 존재.

하지만 영웅이기에 있어야만 하는 존재.

그는 그 존재의 단편을 앤에게서 보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고맙소.」


「별 말씀을요. 그보다... 그 녀석들을 어떻게든 막아냈네요.」


「그렇구려. 고생 많았소.」


「당신만큼은 아니예요. 하지만, 그...」


남자의 말에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앤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 이유를 그는 알고 있다.

그녀가 듣고 싶을 답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허상일 뿐.

그렇기에 남자는 앤에게 닥칠 그대로의 미래를 아무 감정도 없는 부품처럼 입에 담는다.


「다시 올 거요.」


「그렇겠죠?」


「틀림없소.」


이 성채를 노리는 겁쟁이들에게 이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면서도 폭력적인 존재고, 쓸데없이 고집이 세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작은 성채에 저렇게나 많은 무법자가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얻어도 아무런 이득도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상자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듯이, 미래 또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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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 24.09.07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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