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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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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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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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DUMMY

식사를 마치고, 남자는 크리스틴에게 지금까지의 일대기를 요청했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일생을 산들바람처럼 흘려보냈다.

산들바람에 섞인 고요한 태풍의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그랬군.」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남자의 표정은 명백히 흔들리고 있었다.

돌처럼 단단해야 할 목소리가 눈에 띄게 요동치고 있다.

태풍은 거세게 휘몰아쳐 칼날 같은 비를 내린다.


「네...」


「고생이 많았군.」


「아뇨... 저는, 도움만 받았는걸요...」


「자네가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이었어.」


「그건...」


죽음에 대해 피부로 느끼는 것은 소녀가 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잃고 방랑하는 것은 소녀가 할 일이 아니다.

가족의 품에서 행복을 맛보고 느끼는 것만이 소녀가 할 일이다.

그러나 이미 태풍은 크리스틴에게 찾아왔고, 힘없는 아이는 그저 비바람을 맞으며 견뎌낼 뿐.


「미안하군. 내가 괜한 것을 물었어.」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건 무슨 소린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하길, 잘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순간.

아직 비바람이 그치지 않은 이 순간에, 그녀는 웃고 있다.

그저 웃는 것이 아닌, 감정과 마음을 다해 웃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향한 것이겠지.


「그런가.」


「네... 당신이라면, 슬픔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해라...」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이해를 말한다.

그 목소리를 남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좋겠군.」


남자는 중얼거림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에게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을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이 된 악몽이 있을까.

답하지 않는 남자는 그저 입을 다물어 버릴 뿐이다.


「저, 그보다...」


「음?」


「드시지 않는, 건가요...?」


「아.」


크리스틴의 말에 남자가 자신의 손에 들린 고기를 쳐다본다.

따뜻했던 양식은, 긴 이야기의 끝에 차가운 한 조각의 살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 또한 괜찮다는 듯이 한 입 베어 문다.

그조차도 자신에겐 과분하다는 듯이 씹어 삼킨다.


「물, 필요하신가요...?」


「고맙네.」


무슨 원한이라도 진 것처럼 식사하는 남자의 모습에, 크리스틴이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을 건넨다.

나무를 해 오며 떠온 신선한 샘물이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불이 지펴져 있는지는 몰라도, 이 생명수라면 잠시나마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다.


「잘 마셨네. 눈치가 매우 좋군.」


「그야, 필요해 보였는걸요...」


「그 말대로였네.」


소녀의 말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물을 마신다.

차갑고 서늘한 액체의 감각이 그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크리스틴은 잠깐이나마 그에게 안식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자, 그럼 슬슬 움직이세.」


「지금요...?」


「그래. 조금 더 쉬고 싶은가?」


「그건, 괜찮은데요...」


「그럼 문제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남자의 말에 크리스틴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떠날 준비를 마친 자는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괜찮네. 고기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


「그래도...」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남자의 말에 크리스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쳐다본다.

얇은 담요 두 장으로 만든 잠자리였기에 그녀가 묵었던 자리라는 것이 전혀 남지 않는다.

그것이 조금 슬펐던 걸까, 소녀의 얼굴이 조금 우울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출발하도록 하지.」


「...네.」


그들의 여행은 외로움을 향해 떠나는 여정.

그리고 도착한 곳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지금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담담하게 넘어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모험의 끝에서 맞이하는 것이 괴로움의 덩어리일 수도 있다.

괴로움과 어려움.

그것을 생각하던 남자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고개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연다.


「참, 그 전에 어딜 좀 들렀다 가지 않겠나.」


「들렸다, 가요...? 어디를...?」


「그리 멀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렇다면, 괜찮아요...」


「허락해줘서 고맙네.」


그의 말에 크리스틴이 껄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허락하자, 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선다.

길이라고 해 봐야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숲속에는 분명히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

그저 숨겨져 있을 뿐, 분명히 그 앞에 있다.


「여긴...?」


얼마나 걸었을까, 소녀는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동굴 앞에서 멈춰 선 남자를 보며 묻는다.

그녀는 처음 와 보는 곳.

그는 대답 대신 동굴 앞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가리켰다.

더러운 피의 냄새가 흩어지지 않고 작은 웅덩이가 되어 그들을 반겼다.


「죽은, 건가요...?」


「그렇네.」


소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나 남자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추악한 자들이 추악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죄를 고하고 싶어서였을까.

그 의도를 알 수는 없다.


「내가 이들을 죽였네.」


「아... 그렇, 군요...」


남자의 말에 크리스틴이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는 그 이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녀도 이해할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그녀만을 위해 한 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미안하다.」


그렇기에 남자는 사과한다.

현실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자와 현실을 보아야만 하는 자.

그는 어쩌면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 닥칠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지 크리스틴을 시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어주세요...」


그러나 소녀는 강했다.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자애롭고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본다.

동쪽 하늘에서부터 조금씩 얼굴을 내미는 햇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만큼 그 얼굴이 빛나 보였기 때문일까.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태양의 찬란함처럼, 크리스틴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빛나고 있었다.


「당신께선,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주셨어요... 저는 그런 당신에게, 뭐라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물론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 사람들... 아무리 봐도,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이해해 주는 것인가?」


「네... 당신의 선택이니까, 아마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나의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남자가 했던 모든 것의 연장선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있고, 현재와 미래는 이어져 있다.

그 간단한 진리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지옥 같은 어제에서 길을 잃고 구원의 손길을 찾고 있었을 뿐.

그러나 크리스틴의 말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래.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알고 있던 것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라네.」


「다시 확인하시다뇨...?」


「내가 그대를 시험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 말이야.」


남자의 말에 크리스틴이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 그녀는 그가 겪은 일들을 알기 전까지는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확인한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주어도 된다.

그보다 먼저 알려주어야 할 것은 촛불을 켜는 법.

촛불을 하나씩 밝히다 보면 언젠가는 어둠이 물러날 것이다.

칠흑과도 같은 밤에도 태양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그때를 위해 남자는 한 줄기 빛도 없는 동굴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한 걸 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자, 그럼 들어갈까.」


「앗, 네...」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고분고분한 목소리로 그의 의견에 따른다.

그 대답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동굴 안으로 안내한다.

시체와 주인 없는 보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

그곳에서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남자의 손이 인도하는 대로 걷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맞이한 거대한 시체를 보았을 때, 크리스틴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엄청나네요... 다른 사람이라면, 분명 이렇게까지는...」


「대단한 일도 아니네. 모두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대단해요... 당신이라면, 분명 제 고향을... 되찾아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확답할만한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남자의 목소리는 시간처럼 차갑고 뭉툭했다.

그리고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듯이 시간보다도 날카로웠다.

그 목소리에 소녀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본다.

그렇게 말할 이유는 없지 않냐는 듯이 쳐다본다.

그러나 남자는 그 시선에는 답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곳으로 눈을 옮겨 무언가를 쳐다본다.

그 시선의 끝에, 저번에는 보지 못했던 예리한 빛이 남자에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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