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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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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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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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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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그런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다면...」


남자의 말에 조금은 답을 찾은 듯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소녀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강행군 때문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소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자신의 손으로 크리스틴을 쓰다듬는 것이 좋은 판단이었을까.

남자의 손에서는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의 냄새가 날 터였다.


「잘 자렴, 크리스틴.」


씻는다고 씻겨질 냄새가 아니다.

감춘다고 감춰질 냄새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그녀의 옆에 있는 것조차 그에게는 사치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없다면.


「저는...」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어깨에 너무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소녀의 등을 지지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남자가 아니라면, 그가 아니라면.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무서워요...」


「뭐가 말인가?」


「당신께서, 저를... 지켜주실 것은, 알고 있지만...」


그리고 지금, 크리스틴의 입술 사이에서는 공포의 감각이 아무런 여과 없이 흘러나온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무섭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이 요새인지, 몰려든 피난민인지, 끝없는 호의를 보여주던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대는 혼자가 아니네.」


「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크리스틴이다.

그 어떤 것도 그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결코 용서받지 못 할 일을 저지른 두 손으로 크리스틴을 안심시키고 있는 거겠지.

그 외에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남자는 소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다


「언제까지라도 지켜줄 거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치만...」


「죽는 순간까지 자네를 지키겠네. 그걸로는 부족한가?」


「저는...」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한 번 고장 난 감각은 고쳐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까.

아니면 이 무모한 일을 시작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고 싶을까.


「당신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아,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외로웠고 고통스러웠던 거다.

혼자가 되어 온 세상을 떠도는 슬픔은 참기 어렵다.

주인도 모를 어느 돌담에 기대어 서서 눈물을 참으며 걷는 일은 너무나도 아린 일이다.

게다가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감각을, 이 모진 감각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테지.

남자 또한 오래전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알 수 있다.


「크리스틴.」


「부탁, 드릴게요... 어떻게, 들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남자는 그 감정에 함부로 답할 수 없다.

크리스틴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두 줄기 눈물에 함부로 답할 수 없다.

주룩주룩 내리는 물줄기는 하얀 피부를 타고 내려와 검은 돌바닥으로 떨어진다.

천천히 내리꽂힌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크리스틴을 끌어안고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토닥여주는 일.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가는 거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가 크리스틴을 온전히 지켜줄 수 없을 테니까.


「안정될 때까지 있어 주겠네.」


「감사, 합니다...」


「감사할 일은 아니네.」


행복은 아스라이 멀다.

별들이 저 하늘에 쳐박혀 내려오지 않는 것처럼 멀다.

그러니 조금씩 가까워지려고 하는 거다.

가까워지지 않으면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을 테니까.


「크리스틴?」


피로와 슬픔에 힘을 다 소진한 소녀는 어느샌가 잠들었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면, 고른 숨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다.

얼마 만에 느끼는 편안함일까.

남자는 이 순간을 위해 노력해 왔다.

작지만 알찬 결실도 보았다.

이렇게만 해 나가면 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슬픔에 지배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잘 자렴, 크리스틴.」


크리스틴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침대에 눕힌 남자는, 이내 천천히 하늘로 시선을 돌려 아무것도 없는 돌천장을 쳐다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흔한 낙서조차도 없다.

무미건조한 돌천장이다.

마치 자기 모습 같다.


「음?」


그 순간,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그곳에는 하얀 사제복을 입은 엘리자베스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럼 밖으로 나가지 않겠소? 아이가 잠들어서 말이오.」


「네!」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명랑한 대답과 함께 밖으로 그를 안내한다.

잠든 크리스틴을 잠시 쳐다보던 남자는, 흰옷의 소녀와 함께 숙소를 나선다.

잠시 복도를 걷던 두 사람은, 이내 널찍한 공간으로 들어가 두 개의 의자에 나누어 앉는다.


「죄송해요, 다과는 준비 못했어요.」


「괜찮소.」


「방은 어떠신가요? 묵기에 괜찮으신가요?」


「아직 누워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소. 다만 호의에는 감사드리는 바요.」


「별말씀을요!」


자리를 잡고 앉은 엘리자베스의 입에서는 소소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이런 문답을 하기 위해 그를 불러낸 것은 아닐 터였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을 묻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일 터였다.


「으음, 그리고...」


「무엇이오?」


「한 가지, 민폐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드릴 텐데요.」


「무법자들에 대한 것이오?」


「아...」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정곡을 찔렸는지 한숨을 내뱉는다.

그래, 그녀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묻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엘리자베스의 입장에서 그들이 무법자의 끄나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다면 그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깨가 무겁겠구려.」


「아뇨, 그렇지는...」


「내게는 그래 보이오.」


그 마음을 남자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나날들.

의심하고 싶지 않아도 의심해야만 하던 날들.

행복과는 거리가 먼 날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던 순간들.


「그리고 미안하오.」


「네? 뭐가...」


「그대들에게 우리들을 증명할 방법이 없소.」


「아...」


남자는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 피어나는 일말의 안쓰러움을 솔직하게 말한다.

자기 자신을 숨기면서 내보일 수는 없는 법.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을 때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방금 말씀으로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알 것 같다?」


「네. 어째선지는 몰라도요.」


그러나 눈과 귀가 있는 자는 진실의 단편이나마 볼 수 있다.

통찰의 힘으로 상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남자가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럼 외람되지만 한마디 거들어도 되겠소?」


「아,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고맙소.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구려.」


「너무 많은 것을...?」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남자의 조언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일 터다.

진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자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몰랐을 사람이다.

잠시 머무를 뿐인 곳이었고, 금방 지나칠 한때의 바람 같은 소녀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간다.

비극의 결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이어 나간다.

듣고 판단하는 것은 상대의 몫.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라는 듯이, 혹시 있을지 모를 한 명의 용사를 위해서 말한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소.」


힘들 때는 도와달라고 말해야 한다고.

슬플 때는 슬프다고 말해야 한다고.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생물이기에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대체 뭐죠...?」


그리고 그 모든 법칙을 전해 들은 엘리자베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낸다.

그 정도로 열정적인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 없을 테니까.

차가운 말들로 따뜻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남자는 분명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듯이 묻는다.

그러나 남자는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오.」


「그럴 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게 해주었으면 좋겠소.」


엘리자베스가 그를 알 방법은 없다.

알고 싶다고 해도 말해 줄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행동에서 묻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남자의 말에서 묻어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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