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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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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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DUMMY

「네, 그럴게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에 그러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가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다.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자리한 상자를 열어보는 모험을 굳이 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엘리자베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맙소.」


「별말씀을요.」


용기가 없다면 닿지 못할 진실이 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수녀는, 혹은 성녀는, 용기를 내지 않는다.

낼 수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한번 잘못 발을 잘못 디디면, 심연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거의 없으니까.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부탁?」


대신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가 도와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을 터다.

하지만 그녀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가지고 있었다.

남자가 도와준다면 더더욱 좋겠지.

단 한 명의 손이라도 더 빌릴 수 있다면,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렇게나 상황이 어렵소?」


「네...」


「흐음.」


괴로운 듯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남자는 눈을 감는다.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맞이해 보았다는 듯이 눈을 감는다.

볼 수 있는 것이 슬픔뿐이라면 눈을 뜰 이유가 없다는 듯이,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피난민 분들은 몰려오고, 성 안에는 식량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어요.」


아무 말도 없는 남자에게 엘리자베스는 성토하듯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몰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남자가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리라.

다만 어째서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으니.


「무법자들은 이곳을 포위하고 우리를 말려 죽이려고 해요. 피난민들이 있는 걸 아는 거죠.」


「우리가 운이 좋았구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운이 나쁘셨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네. 이곳으로 오지 않으셨다면... 무법자들에게 걸리지만 않는다면 더 편한 여행을 하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는 작게 혀를 찬다.

이곳은 절망만이 지배하는 땅.

그는 그것도 모른 채 스스럼없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을 고른 것이다.

운명의 장난질에 또 놀아난 것이다.


「정말로 운이 없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해야 할 역할이 있다.

운명의 신에 저울질당할 시간이 없다.

남자가 살아있는 이유는 그 일을 끝내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다.

그러니 스쳐가는 인연의 일을 도울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조금은 행운이 따라줄 거라고 생각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려.」


「그렇지 않아요. 당신께선 분명히 도움이 되실 거예요.」


「나 같은 힘없는 자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하는 거요?」


「부탁드릴게요. 부디 저를, 이 도시의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도 끈질기게 남자를 설득한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단단한 동아줄이라는 듯이 절실한 목소리로 종용한다.

허름한 마구간에서 맞이한 손님이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했던 때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응답을 바란다.


「이렇게 부탁드려도 안 되나요?」


「나는 그런 힘이 없소.」


「거짓으로 진실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사실을 말해도 믿고 싶지 않은 거잖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그렇게 믿지 않으니까요.」


「이것 참.」


두 사람 모두 물러날 생각이 없으니 시간 낭비일 뿐인 싸움.

누군가는 한 명의 의견에 따라야만 끝날 싸움.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엘리자베스를 쳐다본다.

그녀는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고, 그렇다면 그가 물러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선택일까.

남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부탁드릴게요.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말에 무슨 말을 하려던 남자의 입이 굳게 닫힌다.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의 눈을, 그는 그저 흘려보낼 수가 없다.

하지만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안 되오.」


「어째서죠?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는 불행한 자기 때문이오.」


남자가 나서는 순간 모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엘리자베스조차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공격할 수도 있다.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은 상관없다.

이곳에서 그의 운명이 다한 것이고, 인간으로서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 하나.


「딸아이를 행복하게 해준 적도 없소.」


크리스틴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남자가 죽더라도 소녀만은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고 의지다.

마음속 제단에 삶의 횃불을 다시 한번 당긴 자다.

그런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크리스틴만은 살려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실패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사랑하는 이들도 많이 죽였소.」


「당신께서 죽이신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소.」


「하지만...」


「나는 더 할 말이 없소. 부디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오.」


「하지만 당신께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힘이 있으시잖아요...!」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말한다.

누구에게도 없는 힘.

단 세 글자일 뿐인데, 그는 그 말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린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짓고 있다.

크리스틴에게는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을 표정을 짓고 있다.


「부탁드려요. 이 상태라면 저희는 이 성 안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아사해야만 해요.」


「그러니까 나는...」


「제발...!」


끈질기고 악착같은 부탁에 남자도 방법을 찾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뱉을 뿐.

희극과도 같은 이 상황을 이끌 별은 나타나지 않는다.

비극과도 같은 이 상황을 끝낼 구원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

게다가 한 사람은 역운을 타고나, 세상에 닳고 닳아 문드러질 것만 같은 자다.


「부탁드릴게요. 이번 한 번만...」


「뭘 하시는, 거죠...?」


그러나 그 또한 한낱 인간일 뿐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에 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그 목소리에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를 이렇게 만들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다.

이제는 단 하나밖에 없다.


「아, 크리스틴...」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이름.

남자가 부르다가 죽을 이름.

죽음도 허락하지 않은 이름.


「두 분,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부탁해, 크리스틴...! 한 번만 아버지를 설득해줘...!」


「무슨 일이신데요...?」


엘리자베스는 그 이름의 소유자에게 기어가듯이 다가가 자신의 상황을 호소한다.

피와 눈물로 뒤섞인 얼굴로 소녀에게 다가가 빈다.

그 얼굴을 본 크리스틴은 난감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본다.

당연한 일이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말씀, 이신가요...?」


「응, 부탁이야...!」


「그, 그건... 제가, 어떻게...」


「하지만 크리스틴이 말한다면 들어주실 수도 있잖아...!」


「그...」


그리고 크리스틴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돕지 않는다면 마음의 짐을 떠안게 될 것이다.

돕는다면 남자에게 괜한 짐을 얹게 될 것이다.

소녀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


「저는...」


하지만 선택해야 한다.

인생이 늘 그렇듯, 그녀 또한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불행의 씨앗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어느 쪽을 골라도 행복하게는 되지 않을 테니까.


「그만하시오.」


그렇다면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크리스틴이 고를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거다.

모든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았던 때처럼 자신이 결정하면 되는 거다.


「아...」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군.」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마시오.」


다만 이 행위가 호의가 담겨 있을 수는 없다.

크리스틴의 따뜻한 마음씨를 이용해 결과를 얻었다.

그렇다면 남자로서는 좋은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오늘 나는 인간의 모진 모습을 하나 더 목격했으니.」


「상관없어요.」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 또한 이겨낼 거라는 듯이 답한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편한 미소와 함께 답한다.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시선을 오롯이 미소로 받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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