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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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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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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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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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DUMMY

그리고 소녀는 꿈을 꾼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깊은 잠에 들어 꿈을 꾼다.

초록빛의 숲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는 꿈을 꾼다.

소녀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

그러나 어째선지 아무런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는 곳.


「――」


기억나지 않는 어떤 목소리가 소녀를 부른다.

똑똑히 들리지도 않고, 안개에 가려진 듯이 형체마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녀는 알 수 있다.

자신을 부르는 그 형체와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


부르고 싶었다.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상대다.

그래서 부르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성장한 자신의 목소리로 불러 보고 싶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름답고 고귀한 목소리에 답할 수 없다.


「아...」


그래도 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그녀 자신의 몸짓으로, 그녀 자신의 마음으로 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곳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닿을 수 없다.

조금 전까지 초록빛을 띠었던 숲을, 거대한 불이 삽시간에 삼켜 버린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단 하나.


「아, 아...!」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불이 다가온다.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거라는 듯이 넘실거린다.

그녀의 종족을 완전히 삼켜버린 징벌이다.

아마도 소녀 또한 그 화염에 삼켜지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겠지.


「아, 안 돼...!」


크리스틴은 그 타들어 가는 운명에 굴복하기 전에 겨우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작은 벽화로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옆에는, 그 옆에는.


「악몽을 꾸었나 보군.」


「아...」


잠에서 깬 소녀의 허기를 달래줄 요깃거리를 만드는 남자의 모습이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모습.

크고 듬직한 등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있다.


「죄송해요... 조금, 시끄러웠죠...?」


「괜찮네. 누구에게나 악몽을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소녀의 기분을 받아준다.

고집스럽지만 안심이 되는 존재처럼, 남자는 그녀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참, 사과할 일이 있군.」


「사과요...? 당신께서, 제게...?」


「그래.」


그의 뜬금없는 말에 소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이제 알겠는가?」


소녀가 마지막에 두 눈으로 본 광경과는 전혀 다른 광경.

그녀 또한 이 광경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잠을 청했던 곳과 전혀 다른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겠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게 되었네.」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남자의 말에 크리스틴은 그 말을 작은 목소리로 되읊는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지, 괜히 화로 안의 모닥불을 한 번 더 쳐다본다.

불은 그 사이에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남자는 주변을 정리하고는 부러뜨린 나뭇가지를 천천히 화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불씨가 된 나뭇가지들은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녹아내렸다.


「더 자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앗, 네...」


남자의 목소리는 투박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그러나 충분히 의미를 알 수 있는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감정.

겉보기로 봐서는 알 수 없는 것.


「그런가. 참, 먹을 텐가? 시장할 텐데.」


「아, 그...」


「눈치 볼 필요 없으니 배고프면 사양하지 말게나.」


크리스틴의 마음 정도는 알고 있다는 듯이 요깃거리가 담긴 나무 그릇을 내미는 손.

그녀는 그 손을 멍하니 쳐다본다.

크고 투박한 손.

크리스틴의 시선은 이내 자신의 손으로 향한다.

작고 가녀린, 아직 성장을 끝마치지 못한 소녀의 손.


「그,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소녀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녀는 아직 더 성장해야 한다.


「저어...」


「왜 그러나?」


「제가 자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일 없었네.」


「저, 정말요...? 하지만, 그...」


「정말로 별일 없었네.」


그렇기에 소녀를 위해 남자는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래,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너지는 양심의 무게감을 느끼면서도 그래야만 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럴 때였다.


「그럼 다행이지만요...」


그의 대답에 순진한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에 담긴 것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음식들은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영양분이 되어 그녀의 성장에 보탬이 되리라.


「...잘 먹었습니다.」


소녀의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기 전에 먹은 것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적게 먹는 습관이 밴 것일까.

이유는 몰라도 크리스틴의 그릇에는 내용물이 반 정도 남아있었다.


「맛이 없나 보군.」


「아, 아뇨...! 요리는 정말 훌륭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조금은 씁쓸한 남자의 목소리가 텅 빈 폐가를 울린다.

화로의 불은 이제 점점 생기를 잃고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위태로운 모습을 소녀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을 안고 가는 것 또한 그녀의 운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북쪽숲을 되찾고 싶다고 했나?」


그리고 모닥불이 완전히 꺼지자, 남자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리스틴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여도 괜찮았던 것일까.


「앗, 네...! 부탁드릴게요...! 제게는...!」


「돌아갈 집이 필요하겠지.」


담담하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폐가를 천천히 훑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크리스틴에게로 돌아와 내리꽂힌다.

집, 돌아갈 집.

그녀에게는 그 소중한 공간이 없다.


「저, 저는...」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내가 그대를 도울 수 있게 해 주게나.」


「네...?」


「자네가 있을 수 있는 곳을 되찾아 주겠네.」


「아...!」


뜻밖의 말이었다.

크리스틴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순간, 남자는 그다운 담담함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희망조차도 없던 그녀에게 한 줄기의 희망이 되어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크리스틴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넘쳐흐른다.

그 희망찬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중얼거린다.


「감사를 받을 수 없는데.」


누군가에게 말하는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래, 만약 단 한 명만 운명이 허락했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이봐, 여기 누군가 있는 것 같아!」


운명이 허락한다면, 잠깐만이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맞선다.

이제는 자신의 한 몸을 불태워 맞서야 할 때다.


「아무래도 빠져나가야겠군. 걸을 수 있겠나?」


「앗, 네...! 발걸음은 느리겠지만, 걷는 것 정도라면...!」


「그런가...」


크리스틴의 말에 남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눈 깜짝할 새에 둘러업는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이내 그녀의 시야로 보이는 몇 명의 건장한 청년들의 무장을 보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만약 여기서 자신이 남자를 방해한다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눈치챈 듯했다.


「누굴 업고 도망치는 것은 오랜만이군. 자, 그럼 가세나!」


남자의 귀에 소녀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숲을 헤치며 부지런히 뛰어가는 남자의 등을 쫓는 무리가 보일 뿐.

그 사이에 그들을 따라오는 청년들은 수가 늘어나 몇십 명이나 되어 보였다.

그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멀리서도 남자나 소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활 같은 무기가 그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 또한 운명의 장난일지도 몰랐다.


「저, 저 사람들은 대체...?!」


「이 도시의 경비병들일세!」


「그, 그럼 우리는...!」


「걱정하지 말게!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네!」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도시를 울린다.

이곳에 그 음성이 울려퍼진 것이 얼마 만이었을까.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목소리.

그러나 지금, 남자는 세상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저쪽이다! 저 녀석을 쫓아!」


「사람의 수가...!」


「알고 있네!」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달린다.

목표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성문.

그곳으로 가면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경비병들이 평소대로 근무를 서다 그를 놓칠 것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

그 기회를 놓친다면 다른 가능성은 없다.


「성문이에요! 바깥이 보여요!」


그렇기에 실패해선 안 된다.

이 소녀를 위해서, 또 그 자신을 위해서도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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