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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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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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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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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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DUMMY

「그래서 뭘 도와주면 좋겠소?」


그 미소를 본 남자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며 중얼거리듯이 입을 연다.

운명을 직감한 사람처럼 낙담하며 중얼거린다.

이번에도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영웅의 모습으로 선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크리스틴은 그런 남자에게 다시 한번 귀여운 딸을 연습한다.

그도 알고 있듯이, 이 소녀는 너무나도 마음씨가 곱다.

그것을 지켜주기 위해 남자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그 마음을 지켜줄 수 있을까.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는 그런 불길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듯이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지켜준다고 약속했다.

약속했으니 이행하면 그뿐.

만약 마지막까지 이행할 수 없다면 목숨으로서 갚으면 될 뿐이다.

한 가지 알 수 없는 건 그 자신의 목숨이 그만한 댓가가 되는지 뿐이다.


「하지만...」


「저, 죄송하지만 제가 말해도 괜찮을까요?」


복잡한 심경의 남자를 뒤고 하고, 엘리자베스는 상황이 다급하다는 듯이 말을 건다.

그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쳐다본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해 보여서일까, 엘리자베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소녀를 인질로 얻은 귀중한 기회다.

그러니 양심이 있다면 그 얼굴을 쳐다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크리스틴은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듯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소녀를 쳐다본다.

그녀에게 크리스틴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찬란하게 빛나는 형상의 형태를 엘리자베스 외의 사람은 알 수 없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천사 같은 소녀를 보는 시선은 당연히 우러러보는 동경의 시선일 테니까.


「그래, 그래서 부탁할 것이 뭐요?」


「아, 네. 저,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 응. 고마워, 크리스틴.」


따뜻한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기운을 내어 성채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곳의 상황은 들은 것보다 처절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부족한 식량은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며칠 굶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특별한 때가 되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던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무법자의 침략으로 갑작스럽게 맞이한 상황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소?」


「그들을 막아주셨으면 해요.」


간단명료한 엘리자베스의 말.

그 말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어떻게 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막을 방법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혼자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그녀의 부탁은 무모했고 또 불합리했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군.」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


「네.」


「그런데도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오?」


「네. 저에겐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될 때까지 무엇을 한 걸까.

엘리자베스의 말에는 애써 덮으려고 했던 무능과 무기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남자의 얼굴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이라는 희망이 없다면, 저는...」


「난감하군. 너무나 터무니없는 부탁이고.」


「하지만...」


「진실을 외면하려고 하지 마시오.」


남자의 반박에 엘리자베스가 잠시 우뚝 섰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리한 요구를 해 온다면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헌신하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 진리를 그녀 또한 이해 못할 수는 없겠지.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도움받을 곳은 없소?」


「도움... 아, 한 곳, 있긴 한데요...」


「어디요?」


「엘리자베스 언니!」


남자의 물음에 엘리자베스가 대답하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날아들어 왔다.

크리스틴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는 듯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기사 소녀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앤?」


「무법자들이...!」


「어째서...」


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괴성이 성채를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빨리 결론을 내야 할 시간이다.


「어쩔 수 없군. 일단은 도와주겠소.」


「아, 감사합니다!」


「이 노고에 대한 청구는 나중에 하겠소. 그리고 크리스틴.」


「아, 네...!」


「안전한 곳에 잘 숨어 있으렴.」


크리스틴이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남자는 분명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터다.

그러나 그의 몸은 두 개가 아니고, 전진하면서 후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크리스틴의 안전을 살피는 것뿐.

그를 위해 엘리자베스에게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크리스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용서하지 않겠소.」


「최선을 다할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가 눈가를 실룩인다.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 말로는 부족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남자는 특별한 방법을 엘리자베스에게 내민다.


「선혈의 맹세를 해주시오.」


「선혈의 맹세...」


남자의 중얼거림이 아주 느리게 울려 퍼진다.

그 내용에 엘리자베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본다.

하지만 그녀 또한 남자에게 크리스틴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별말 없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자기 손가락을 긋는다.

하얀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피가 방울져 흘러내린다.

잠시 그 피를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단도를 남자에게 건네준다.


「이거면 되나요?」


「생각보다 강단이 있구려.」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하잖아요. 아닌가요?」


「잘 알고 있구려.」


시간이 없다.

단도를 받아든 남자는, 그 끝에서 조금씩 말라가는 생명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천천히 굳어져 가는 생명의 실증.

완전히 굳는다면 그는 맹세를 받지 않은 것이고, 엘리자베스 또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제 선택은 남자에게로 넘어왔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맹세를 받아들이겠소.」


「감사합니다!」


「맹세를 어기지 않기를 바라오.」


「최선을 다할께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답으로 다시 한번 최선을 말한다.

그 대답은 남자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최선이라는 애매한 말로 회답한다.

그 말에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고 엘리자베스를 쳐다본다.

싸울 시간은 없다.

어서 상황부터 살피고 대책부터 강구해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남자지만, 마음속에 한 번 불피운 의심을 꺼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 또한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엘리자베스 언니가 맹세까지 했잖아요! 뭘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앤은 남자의 의심 따위는 어쨌든 좋다는 듯이 그를 재촉한다.

그 말에 남자는 잠시 앤을 노려보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묻는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 가만히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늘 그랬듯 시간은 남자의 편이 아니다.

그의 운명의 그의 것이 아니듯이.


「앤 양, 성채의 상황은 어떻소?」


「모두 다 힘을 합쳐서 무법자를 막아내고 있어요. 하지만...」


「수가 모자라오?」


「네...」


앤의 말에 남자가 그럴 것 같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먼 옛날의 영웅처럼 일어서서 먼 하늘을 쳐다본다.

그 모습이 매우 웅장하고 장엄하다.

그의 손에 무기가 없을 뿐, 그 기세만으로도 무법자 몇은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성벽으로 돌아가 지휘하시오. 바로 따라갈 테니까.」


「하, 하지만...」


「찾아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앤의 반응에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그녀를 보낸다.

남자에게 격전지를 찾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가장 큰 함성과 비명이 뒤섞인 곳으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양.」


「네!」


「이번 침입을 막아내고 다시 찾아오겠소.」


인사를 마친 남자가 잠시 손에서 놓았던 무기를 집어 들기 위해 숙소로 향한다.

그의 무기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벽에 기대어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곳에서 이 힘을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건만.

옛날처럼,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때처럼 무기를 들고 어두컴컴한 피바다의 현장으로 향한다.

그가 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크리스틴이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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