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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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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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DUMMY

「남는 솥도 없겠구려.」


「이것도 포션 만들 때 쓰던 솥이라...」


하지만 키르케의 잘못 또한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여주인의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른다.

그러다 이내 홍당무가 되어 빨갛게 되어버린다.


「대충 예상은 했소만 역시 그런가.」


「미, 미안해!」


남자의 말에 키르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과를 건넨다.

어느샌가 그녀의 말투도 부드럽고 온화한 키르케의 목소리로 돌아와 있다.

그는 그 사과에 괜찮다는 듯이 살짝 손을 내젓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본다.

일단 수프를 만들었으니 먹기는 해야 하는데, 담을 곳이 없다.

그렇다고 솥단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잠시 생각에 잠긴 남자는 이내 좋은 방법이 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키르케에게 묻는다.


「혹시 남는 병은 있소?」


「병...? 아, 포션 담는 거라도 괜찮다면...」


「그거라도 줘 보시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남자의 말에 키르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순식간에 병 여러 개가 남자 눈앞에 나타난다.

어딘지 모르게 허술해 보이는 마술에 그가 눈가를 실룩이자, 오두막의 여주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크리스틴이 다가가 손을 꼭 잡는다.

자신은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혼자 사시느라, 그런 거죠...?」


「아...」


「전, 이해해요...」


「고마워, 크리스틴.」


굳이 찾아와 위로하는 모습이 키르케의 냉담한 마음도 녹아내리게 했을까.

정말 조그마한 방울이었지만, 약간의 습기가 모여 그녀의 눈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있었다.

그 자국을 본 크리스틴이 이번에는 더욱 깊숙이 다가와 오두막의 여주인을 껴안는다.

차가운 것은 따뜻한 것으로 잊혀야 한다는 진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포옹한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키르케는 당황했는지 놀란 표정을 얼굴에 띄웠지만, 이내 요정 소녀의 작은 등을 자신의 팔로 감싸주었다.

언제라도 이런 따스한 것은 나쁘지 않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홀로 산 시간만큼 생명의 온도가 고팠다는 듯이 힘껏 품 안에 집어넣었다.


「저, 키르케 씨... 숨, 막혀요...」


「아,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그 감정이 꽤 격해졌을까, 크리스틴에게서 작은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 바람에 온기는 약해졌고, 여주인이 자초한 서늘한 감각이 그녀 자신의 품 안으로 마구 몰아친다.

요정 소녀가 안아주기 전의 키르케가 되어 점차 식어간다.

그래, 오두막의 여주인도 모르지 않았을 터다.

결국 그녀에게 남는 것은 홀로 남아 북풍을 맞이하는 시간 뿐.

따스한 존재에게서 온기를 받는다고 해도 마지막에는 홀로 남아 찬바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


「괜찮으세요...?」


「응? 응, 괜찮아. 고마워, 크리스틴. 덕분에 따뜻했어.」


「별 말씀을요... 그런데, 부족하셨나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지금, 키르케 씨... 눈에서, 눈물이...」


그 운명을 오두막의 여주인이 모를 리 없건만.

키르케의 두 눈에서 천천히 하강하는 이슬은 그 모든 시간을 부정하고 싶다는 듯이 흐르고 있다.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낙하하고 있다.

전능한 자가 의도한 대로 새어 나오고 있다.


「괜찮아요, 감정은... 가끔씩, 자기 멋대로니까요...」


그런 키르케를 그저 두고 볼 수 없는 크리스틴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그녀를 껴안아 준다.

자기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돌아올 거라는 듯이 품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듯이 끌어안는다.

그 다정한 감정이 여주인의 두 눈에 또 한 번의 물방울이 맺히게 한다.


「그러니까,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우셔도... 괜찮으니까요...?」


「난 울지 않았어, 크리스틴...」


그러나 키르케는 어른이고, 크리스틴은 소녀다.

어른이 아이 품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녀를 깎아내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키르케의 입술 사이에서 약하디 약한 허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그것이 키르케의 진심일 터다.

그녀의 과거를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 과거에는 힘이 필요했을 거다.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 필요했을 터다.

하지만 그 힘은 결국 이 여린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을 거다.

그 흐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크리스틴은 알지 못한다.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멀리 나아가버린 사람의 일대기를 알 수 없다.


「그런 걸로, 해둘게요...!」


아무 힘도 없는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껴안아 주는 일.

슬픔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을 껴안고 눈물샘이 텅 빌 때까지 끌어안는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소녀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그 따스한 감각에 키르케는 다시 눈물을 보인다.

아니, 이제는 칠칠맞게 소리까지 내며 울어젖힌다.

그 소리에 솥에 들은 수프를 병으로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던 남자까지도 키르케를 쳐다본다.

하지만 그 눈에는 오직 연민의 감정만이 들어있을 뿐이다.


「많이 힘들었나 보군.」


「나, 나는...」


「응어리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그대로 있어도 괜찮네. 크리스틴 양, 그래도 되겠지?」


「네, 당연하죠...!」


「두 사람 다, 너무 고마워...」


키르케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든다.

슬픔이 기쁨으로 잊히는 것처럼, 천천히 잦아들다 미소 짓는다.

이 기쁨을 알기 위해서 그녀는 이때까지 살아온 거다.

의미도 없었던 삶을 이어 나가온 거다.

그러니 행복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틴과 남자에게는 작은 호의였을 테지만, 키르케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행복한 감각이었을 터다.

그 누구도 선사하지 못한, 이름도 가물가물한 사랑하던 사람조차 주지 못한 감각이었을 터다.


「정말 고마워...」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천천히 잦아든다.

크리스틴과 남자에게 한 번 감사를 표했음에도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자신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두 존재는 그 말에 굳이 딴지를 걸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감사하다는 말로 그녀의 마음을 다 표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마울 일은 없소. 고맙다면 내가 더 고맙지.」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만사가 괜찮은 것 아니겠소. 당신도 크리스틴 양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조절한 것 같고.」


「...정말 분위기를 못 읽는 사람이라니까.」


남자의 말에 키르케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런 것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았냐는 듯이 말한다.

하지만 그 말에는 악의라곤 없다.

좀처럼 솔직해지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말투다.

그리고 남자는 그 목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키르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굳이 그런 말을 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대답과 함께 병에 든 수프를 내민다.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병을 내민다.


「자, 당신 몫이오.」


「이건 또 언제 했담...」


「그럼 잘 먹겠소. 크리스틴 양의 몫은 여기 있네.」


「네...! 잘 먹겠습니다, 키르케 씨...!」


남자의 말에 크리스틴이 활짝 웃으며 키르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다.

오두막의 여주인은 소녀의 말에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미소 짓는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표정보다도 밝게 웃는다.

그 미소를 본 남자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그 누구도 알아볼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살짝 미소가 드리워졌다.


「별 말을 다 하네. 자, 그럼 즐겁게 식사하도록 할까요.」


「네...!」


너무나 평화로운 정경이다.

모든 사람이 바랄 행복한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갈구하는 행복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행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운명은 언제나 행복한 길로만 가지는 않으니까.

불행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고, 괴로움이라는 가시 돛친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녀석의 이중성이다.

행복한 것만 가득하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울 것을.


「맛있어요...!」


「그러니? 후후, 그럼 다행이야.」


「이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려. 꽤 맛이 괜찮소.」


「괜찮은 거야, 정말로 훌륭하다고 말하는 거야?」


「제 생각엔, 정말로... 맛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미 불행은 자리를 잡고 버티고 있다.

행복의 자리를 어떻게든 밀어내고는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인간은 그 폭거에 대항할 수 없다.

그저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 순간 이런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삶에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면.

이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불행도 조금은 뒤로 물러나 지켜볼 수밖에 없을 터다.

그러니 기억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오늘의 식사를 기억한다.

불행이 아무것도 아닌 녀석으로 보일 때까지 기억한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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