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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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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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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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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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DUMMY

「나 또한 사과해야겠구나.」


그리고 또 한 사람.

이곳에는 어른이 한 사람 더 있다.

크리스틴을 이해해주는 또 한 명의 어른이 있다.


「네...? 어째서...」


「저 사람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구나.」


「그,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크리스틴이 손을 내저으며 말려도 남자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

그다지 상관없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깊이 숙이는 사람이 있다.

그 모습에 소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한때 용사였던 자를 쳐다본다.

그 시선이 닿자 남자는 숙인 머리를 천천히 들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라는 양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어째서...」


크리스틴은 그 표정이 보고 싶지 않았을 터다.

그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서 나약한 모습을 보기 싫었을 터다.

하지만 이미 그 표정은 소녀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끝없는 슬픔이 되어 두 귀를 막아버렸다.

기쁨이 슬픔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즐거움이 분노가 되는 것 또한 한 순간이다.


「어째서...!」


「늘 말하고 싶었네.」


「하지만, 왜 지금...!」


「늘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세.」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금의 크리스틴이 그렇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다.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고, 언제나 이해해줄 사람이 옆에 있다.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버팀목이 지금, 자신의 무능함을 스스럼없이 성토하며 조금씩 발을 빼고 있다.

그 이유를 소녀는 알 수 없다.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지금일까.

어째서 지금이어야만 할까.


「이것 참, 납득이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순례자는 그 이유를 조금 눈치챈 듯하다.

어째서 지금이어야 하는지를 알아챈 듯하다.

그래, 남자에게는 지금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크리스틴의 버팀목에서 그녀의 도구가 되도록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당신, 정말 모진 사람이구려.」


「어쩔 수 없소. 나 또한 이러고 싶지 않소.」


「그렇다면 왜 지금이오?」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기 때문이오.」


언젠가는 남자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까운 미래인지 먼 미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가 언젠가는 크리스틴을 두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 상실이 얼마나 슬플지 남자는 알 수 없다.

그 이별이 얼마나 큰 여파를 남길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연습해두는 것이다.

몇 번이고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그래야 남자가 없어져도 조금은 덜 슬퍼할 테니까.


「나는 그대의 사정은 잘 모르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겠소?」


「조금이라면...」


「그렇다면 충분하오.」


어둠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영원히 세상을 지배할 것만 같은 절망의 순간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순간이 지난 후에 해가 떠오른다면.

크리스틴이라는 등불을 따라 세상에 빛이 드리워진다면.

갈 길 없는 슬픔을 붙잡아두고 행운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남자는 그 감정을 몇 번이나 바쳐서 크리스틴의 자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이러시는 이유가, 다 있으시겠죠...?」


그리고 남자에겐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슬픔 속에서도 무릎을 털고 일어나 그를 쳐다본다.

그녀 또한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일어난다.

지금의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든다.

다만 자신의 백색 도화지에 드리워진 침울한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이유가 없는 행동을 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


「역시, 그렇겠죠...?」


「그렇네. 받아들이는 건 자네 몫이지만.」


「그렇죠...」


하지만 그것도 그 뿐.

크리스틴이 얼굴색을 바로 하고 그를 쳐다본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듯이 입술을 살짝 깨문 채로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는 남자의 마음은 어떨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마 남자조차도 알지 못할 터다.


「이것 참.」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순례자가 작게 중얼거리며 혀를 찬다.

비난의 의미일까,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여행자의 얼굴 또한 남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더러워져 버린 세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사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참 슬픈 일이야.」


「그, 이제... 이 주제는, 그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그 슬픔을 덮는다.

어지러운 세상에 맞서는 음성이 기쁨을 몰고 온다.

성장의 목소리다.

다행히도 소녀는 남자의 뜻대로 오늘도 한 뼘 더 커진다.

그것을 본 남자의 얼굴에도 미미하지만 확실하게 미소가 드리워진다.

안도인지 기쁨인지 모를 긍정의 미소가 깊이 새겨진다.


「이것 참, 아무래도 성장해야 하는 사람 우리인 듯싶소.」


그 옆에는 너스레를 떠는 순례자가 있다.

곧 떠날 사람이지만, 어째선지 계속해서 기억날 것만 같은 사람이 있다.

떠나고 나면 그 무게가 조금은 느껴질 것 같은 인물이 있다.


「고맙소.」


남자를 도와준 친구.

크리스틴을 도와준 위인.

이 시대에 맞서야 한다면 같이 서 줄 사람.

남자는 옛날 생각이 나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떼고는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조금은 뜬금없는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별 말씀을. 나는 그저 말 많은 한낱 여행자일 뿐이오.」


그리고 순례자의 입에서는 겸양의 말이 흘러나온다.

온화한 본성을 다 덮을 수 없는 겸손의 말이 물 흐르듯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남자와 크리스틴은 알고 있다.

그런 말로 순례자의 존재가 옅어지지 않음을 알고 있다.


「자, 그럼 나는 정말로 가봐야겠소.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소.」


「가시게요...?」


「갈 길이 다르다면 헤어질 수밖에 없단다.」


「그건, 그렇겠지만...」


순례자의 이별 인사에 크리스틴이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본다.

조금만 더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를 바라며 헤어지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한 약속, 잊어버리지 말고 있으렴. 알겠지?」


「아, 네...! 잊지, 않을게요...!」


「그렇게 말해준다면 고맙구나. 당신도 부디 조심히 여행하시구려.」


「걱정해줘서 고맙소.」


떠나가고 있다.

떠나갈 사람이었지만, 어째선지 붙잡고 싶어지는 사람이 떠나가고 있다.

따뜻함과 미소를 두 존재의 가슴 속에 묻고 향기롭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아...」


이내 동료를 만난 순례자는, 잠시 크리스틴 쪽을 향해 시선을 주다 해가 지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방향으로 사라져 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모든 순례자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약속 하나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남자와 크리스틴 뿐.


「크리스틴 양, 이제 가지.」


「아, 네...」


「오늘은 이 산길을 올라야 하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네...」


남자의 목소리가 감정에 젖어 있는 크리스틴을 향해 딱딱한 말을 건넨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 텐데도 겨울 바람처럼 날카롭게 대화를 시작한다.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러나 남자는 굳이 따뜻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듯이 딱딱하게 말한다.


「슬픈가?」


「네...?」


「아니면 외로운가?」


「갑자기, 그건 왜...?」


「어쩐지 물어보고 싶었네.」


아니, 아니다.

그는 순례자처럼 할 수 없기에 일부러 딱딱하게 말하는 것이다.

말 또한 수많은 연습이 필요한 행위다.

마음을 울리는 대화 기술은 특히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남자에게 그 기술을 연마할 만한 시간이 없다.

그는 앞으로 나아갈 시간도 부족하고, 소녀를 지킬 시간은 더더욱 부족하다.

그러니 하던 대로 딱딱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하던 대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미안하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한 그 말을 또 입에 담을 수밖에 없다.

크리스틴의 손이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아줄 때까지 홀로 있을 수밖에 없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더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나 남자의 손을 소녀가 잡아주지 않을 리가 없다.

그 누구보다도 의지가 되는 사람의 손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존재가 잡지 않을 리가 없다.

남자가 크리스틴을 아끼는 만큼 그녀도 그를 아낀다.

그 마음을 남자 또한 알고 있다.


「고맙네.」


외롭고 고단한 길.

그 길을 두 존재가 걷고 있다.

겨우 발을 디딜 정도로 위험했던 절벽길을 건넜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날카로운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비 온 뒤 땅이 굳어져 단단해지듯이, 두 존재의 서로를 향한 마음도 단단해졌다.

그러니 이 길을 함께 나아가고 있는 거겠지.

이 험난한 길을 올라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것일 터다.

이곳에서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아직 멀다.

그러나 눈이 푹푹 날리는 고향까지 함께 있을 사람이 있기에 더는 무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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