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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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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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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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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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DUMMY

「저더러 어쩌라는 건가요?! 나가 죽으라는 건가요?!」


남자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자베스가 소리를 빼액 지르며 씩씩댄다.

그 모습은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으리라.

하지만 남자는 그 정도는 감내할 자신이 있다는 듯이 미숙한 성녀를 쳐다본다.

모든 성녀가 처음부터 신실하고 견실한 자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깨우친 것이 있고 난 뒤에야 자신의 길을 깨닫고 그 길을 걷는 자가 더 많았다.

그렇기에 남자는 엘리자베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또한 어떤 소녀에게서 그 끈기를 배웠다.


「나가 죽으라고는 하지 않았소.」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전혀 다르오!」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입씨름할 이유가 없다.

처음부터 모른 척 지나갔다면 이런 싸움을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말도 물과 같아서,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소.」


자신의 치부를 조금이나마 드러내며 상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뿐.

그 성장을 잊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뿐.

그렇게 성장시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흘러가는 운명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듯이 이 행동에는 의미가 없다.

이미 내뱉어버린 말을 이어 나가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 끝을 어떻게 예단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말을 뱉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더없이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


「그럼 대체 뭘 위해서...!」


「자신을 위해 죽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라도 찾아야 할 것이 아니오.」


「그러니까 기도를...!」


「기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소!」


증오다.

생명을 죽이는 사람을 증오한다.

죽음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혐오한다.

그 감각을 남자는 입에 담는다.

아무런 순화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단어로 이야기한다.


「기도는 겁쟁이나 하는 것이오. 그걸 모른단 말이오?」


「전 겁쟁이가 아니에요!」


「겁쟁이요!」


엘리자베스의 항변에 남자가 호통을 치며 그녀를 노려본다.

그 눈에는 확실한 의지가 담긴 분노가 담겨있었다.

그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았던 눈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 눈에는 그 어떤 마음보다도 강렬한 감정이 있다.


「기도를 올릴 시간에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 방법을 구하시오!」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기도를...!」


「그대가 나에게 뭐라고 하였소?」


「제가 무슨 말을...」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 분노를 엘리자베스가 감당할 수 있을까.

성녀의 옷을 입고, 성녀의 마음가짐으로 전쟁을 임하는 무기력한 한낱 소녀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남자의 답은 확고하다.

그는 더 작은 몸으로 위험한 여행을 떠난 자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 그건...」


「그런데 갑자기 말을 바꾸지 않았소!」


그리고 또 한 가지.

엘리자베스는 남자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선 안 되는 상황인데도 그를 속였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니 단단히 야단을 쳐야만 한다.

그가 없는 순간에도 그릇된 희망을 믿고 죽어 나갈 기사들을 위해서라도 그 버릇을 고쳐놓아야 한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기에 최선의 결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건, 그...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한 것은 아는 모양이구려.」


「그야...」


다행히 엘리자베스도 자신의 죄를 피하지 않았다.

조금 주저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일 터다.

까딱 잘못했다간 파멸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음을 그녀 또한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에 남자는 잠시 성녀에게서 눈길을 거둬들이고 먼 하늘을 쳐다본다.

그는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을 숨기면서 내보일 수 있을까.

멀고 먼 동토의 이야기를 하듯이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왔던 종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까딱하면 앤 양까지 휘말리게 할 뻔했잖소.」


「앤을...?」


「그렇소.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저, 저는...」


그래, 소중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자.

엘리자베스에게 더없이 소중할 사람의 이야기를 하자.

너무나도 소중해 잃어버릴 수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하자.

그렇다면 이 성녀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아무리 이해력이 모자란 자라도 이렇게까지 들은 후에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지 않을 수는 없겠지.


「앤...」


그래서였을까, 남자의 말은 커다란 꼬챙이가 되어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후벼 판다.

금방이라도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더없이 고통스러운 형벌이 되어 아직 성녀가 되지 못한 소녀의 감정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제 행동이, 그런... 내가, 무슨 짓을...」


그렇기에 두 줄기 눈물이 엘리자베스의 두 눈망울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다고 씻겨질 원죄는 아니었다.

씻겨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촉촉하게 만들 수는 있다.


「죄송해요, 제가 화낼 입장이 아니었어요...」


「괜찮소.」


인간은 실수한다.

가끔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어이가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일련의 흐름으로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행운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남자는 엘리자베스를 지나치는 대신 깨우치게 하려고 생각했을 터다.

성녀와 성기사.

그에게는 퍽 마음에 들지 않는 족속들이지만, 그들 또한 생명이다.

남자는 생명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누군가는 역설이라고 생각할 터다.

손에 수많은 피를 묻히고도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보지 않은 자는 삶의 특별함을 알 수 없다.

산 자는 죽은 자의 간절함을 알 수 없다.

산 자는 죽은 자의 소원을 알 수 없다.

산 자는 그저 살아갈 뿐, 어떻게 죽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생명의 종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남자는 알고 있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런 거겠죠...?」


「그렇소.」


「이럴 때는 좀 위로해 주시라고요...」


「난 그런 말을 배우지 못했소.」


「배우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재주는 없소.」


그리고 남자는 모른다.

그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감각으로도 느끼지 못한다.


「한 마디도 지지 않으시는군요.」


그래서였을까,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는 빠르게 평화를 찾는다.

그 평화가 남자에게로 날아와 힐난의 말이 되는 건 성녀가 아직 믿고 따르기에는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모든 것이 안정되었다면 굳이 그것을 깨뜨릴 이유는 없다.

그 사실을 저 소녀가 알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걸어온 싸움을 왜 피해야 하오?」


그러나 뭐 어떤가.

저 말로 소녀가 다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저 힐난은 그를 비난하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닐 테니까.

새침한 저 표정 또한 남자를 아니꼽게 여겨 짓는 표정이 아닐 테니까.

그러니 아무래도 좋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할 터다.


「정말... 지금도 적당히 흘려넘길 수도 있었잖아요.」


「나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소.」


「당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뚝뚝하네요.」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정의일 거요.」


성장은 껍질을 깨야만 하는 나비처럼 고통스러운 일들의 연속.

그렇기에 그 껍질을 깨고 조금 더 성숙해진 사람을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삶이란 것은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격류의 장.

그 당연한 진리에 인간은 눈을 돌리고 있지만, 남자는 그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두 눈을 오롯이 진실에 맞추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곧아서였을까, 엘리자베스의 날카로운 농담이 그에게 날아온다.

이제는 그녀의 죄를 다 알겠다는 듯이, 그렇기에 나아갈 길을 안다는 듯이 날아온다.


「금세 꺾일 것같은 모습이네요.」


「부러진다라.」


「네. 오래된 나무들도 거센 바람을 맞으면 꺾이는 법이잖아요?」


「흠.」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가 작게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남자는 꺾여선 안 되는 존재.

자신의 옆에 지켜야 할 존재가 있기에 꺾여선 안 되는 존재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을 거요.」


그렇기에 남자는 당당하게 성녀의 말을 맞받아친다.

그는 용사.

이 세상에 단 두 명밖에 없었던 위대한 자.

그런 자 옆에, 우물쭈물하며 성녀와 용사의 기색을 살피는 한 소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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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9 24.09.15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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