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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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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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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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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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DUMMY

「죽은 자에게 물을 수는 없잖은가.」


「대체...」


「말하지 말게. 상처가 깊네.」


만약 이 자가 고대의 신수라면 무언가 아는 것이 있을 터다.

단편적인 말이나마 들은 것이 있을 터다.

남자는 답을 듣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를 살리고 있다.

이 괴물이 정말로 숲의 수호자라면 실마리라도 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거처가 어디인가?」


「이 숲이 나의 집이다.」


「아무데서나 잠을 청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건...」


남자의 말에 숲의 괴물이 말을 흐린다.

그 모습에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만일 지금 무법자가 그를 덮쳐 온다면,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질 수도 있다.

수많은 적이 그에게 칼을 들이댄다면 그대로 꿰뚫려 절명할 수도 있다.


「음.」


하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무법자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꼬나쥐고 서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다.

그 모습을 본 남자의 입에서는 약간의 안도가 담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두려운가?」


그런 그에게 숲의 괴물이 나지막이 묻는다.

아무것도 아닌 무법자들이 그렇게 두렵느냐고, 그 도끼로 한 번 쓸어내면 죽을 자들이 아니냐고 묻는다.

남자는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는 자는 없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수많은 적에 둘러싸이면 죽을 수밖에 없다.

수백 개의 창칼을 이겨낼 자는 없다.

묻는 자 또한 그런 끝없는 두려움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답하지 않는다.

묻는 쪽도 답을 바라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 됐군. 움직여 보게.」


「네 녀석은 뭐 하는 놈이지?」


「불행하게도 길을 잘못 들은 여행자일세.」


「여행자?」


대신 남자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준다.

숲의 괴물에게는 턱없이 갈증 나는 답이겠지만, 물어보았으니 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답에 훔반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렇다면 그대가 북쪽숲의 수호자인가?」


남자는 그 물음에 눈가를 실룩인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호칭이라는 듯이 찌푸린다.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되는 호칭이라는 듯이 훔반을 노려본다.

남자는 결국 지키지 못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쫓겨 내려왔다.

그런데 수호자라니.


「말을 삼가시오.」


「소문을 들었다! 그래, 분명히 들었어!」


「말을 삼가라고 하였소. 기껏 살려놓은 목숨을 빼앗고 싶지 않소.」


남자는 더 이상 말하면 가차 없이 죽이겠다는 듯이 도끼를 들며 날카롭게 속삭인다.

무겁고 외로운 목소리에 숲의 괴물은 더 말을 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법자들을 쳐다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훔반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움직임이 꽤 일사불란해서, 남자는 다시 한 번 눈가를 찌푸리며 괴물에게 묻는다.


「어째서 무법자들을 거두었나?」


「무법자?」


「저 자들이 무법자가 아니면 무엇이오?」


「불쌍한 영혼이 아닌가!」


남자의 말에 훔반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투로 답한다.

괴물의 말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말이 틀리지는 않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법자가 되고 싶은 자는 없다.

황야를 떠돌다 생을 마감하고 싶은 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돌아갈 집과 자신을 사랑해 줄 가족이 있다면 당연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소중한 것들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정처 없는 삶을 보내는 거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법자들은 그런 것들이 없는 걸까.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이 아닌가!」


빼앗겼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고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크리스틴과 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소녀와 다른 점은, 그렇게 잃어버리고 분노만이 남아 다른 힘없는 자의 것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법자들만의 문제인가.

남자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결국 무법자, 황야를 떠도는 자기 때문이다.


「그대는 확실히 북쪽숲의 그 자가 맞군!」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네.」


그리고 모든 무법자가 그렇듯이 남자에게도 사연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이 있다.

알아채지 못했으면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챘다면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용사로군!」


「용사라.」


「나는 북쪽숲의 수호자가 용사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훔반은 남자의 기분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듯이 소리 높여 한 이름을 부른다.

남자를 향해 용사라고 부른다.

그는 전혀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자인데도 말이다.


「나는 용사가 아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나를 아직도 바보 취급하는 건가!」


「아니다.」


「그럼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나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의 말에 숲의 괴물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용사는 용사다.

용기를 내어 운명을 극복하고 세상을 구하는 자다.

하지만 남자는 어떤 업적을 이루었던가.

그는 눈이 휘날리는 척박한 땅 하나도 구해내지 못했다.


「나는 어려운 것은 모른다.」


「그런가.」


「그렇다. 그러나 또 하나, 들은 것이 있다.」


「뭔가.」


「다른 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용사에 대한 이야기.

남자 외에 다른 용사는 없을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자가 있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리가 없다.

하지만 남자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듯이 눈가를 살짝 찌푸린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훔반은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입을 연다.


「기억이 맞다면 북쪽숲을 유린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역시 그런가.」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알고 있는 이가 없을 과거의 이야기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흘러나왔다.

훔반의 말에 남자는 천천히 허물어진다.

그렇게 허물어지면서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를 꺼낸 자를 아무런 말도 없이 노려본다.


「묻겠다. 그대는 용사인가?」


「아니오.」


「그럼 그대는 무엇인가?」


「이름 없는 자요.」


잊고 싶었다.

북쪽숲에는 그 외에 다른 자가 있었음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이 기억하는 한 그 자는 잊혀지지 않으리라.

또한 그 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용사.

그 용사가 황제의 옥좌에 앉아있는 한, 더더욱 잊혀질 수가 없을 거다.


아, 그렇다.

이렇게 과거를 들추기 전에 그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래, 휘몰아치는 과거 속에서도 지금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

남자는 지금 이 순간을 잃지 않기 위해 이곳에 왔다.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인가?」


「그 외에 북쪽에서 들은 소식은 없소?」


「없다.」


그리고 그 지금은 남자에게 아무런 회신도 들려주지 않는다.

현실이 늘 그렇듯 과거의 메아리만이 휘몰아칠 뿐, 미래에 대한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노력해야만 하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그저 걸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밤하늘에 떠 있는 작은 별 정도의 빛은 있어야 하건만.

그 빛조차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 크리스틴이 곁에 없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틴.」


그래서였을까, 남자의 입에서 소녀의 이름이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빛이며, 생명이며, 미래며,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존재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가 담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의미가 있는 존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남자가 지켜내야만 하는 존재다.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군.」


그리고 괴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단 한 순간의 방심이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지 알려주겠다는 듯이, 괴물은 괴물답게 남자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약점을 잡았다는 듯이 혀를 낼름거리며 그의 그림자를 잡는다.

꼬리는 붙잡히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스멀거리며 올려온다.

그 모습이 뱀 같다.

영웅조차도 이기지 못할 뱀의 모습이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졌다.

남자는 소중한 것을 도둑질당할 영웅의 그림자를 남긴다.


「더 말하지 마시오.」


「분명히 어디선가에서 들었다!」


「입을 다물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는, 훔반의 목에 도끼를 겨누고 표정을 굳힌다.

그가 더 말해서는 안 된다.

이 괴물이 그 이름을 말하게 해서는 안된다.

다시 한 번 내뱉게 해서는 안된다.

훔반이 남자가 누구인지 거의 알아챘을 지금에도 그 명제는 유효하다.

그 누구도 알아서 안 되는 것은 끝까지 알아서는 안 되는 것.

그러니 남자는 조금은 감정적으로 괴물의 목에 도끼를 댄다.

가장 날카로운 도부수의 감각으로 도끼를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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