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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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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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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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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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DUMMY

그 시각, 남자와 크리스틴은 성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신음과 고통에 찬 지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희생자가 된 자들과 희생자가 될 자들이 있는 세상을 지나치고 있다.

성벽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전의를 잃은 무법자들이 고통스럽게 헐떡이다 생을 마감한다.

그들 또한 그 결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닐 터였다.

남을 공격하면 자신 또한 공격받을 수 있음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 또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일 터였건만.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와 아직 치우지 못해 성벽에 걸려있다시피한 생명들이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황망한 배경이 더는 보기 싫었던 걸까.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작게 메아리친다.

자신도 생각할 수 있는 당연한 진실을 왜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그 속삭임은 너무나도 서글퍼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답해야만 한다.

이 세상이 과연 노력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말해 주어야만 한다.


「언젠가는 답을 찾을 걸세.」


그래야만 하는데, 남자는 애매한 답을 하곤 입을 다문다.

굳게 다물고 가야 할 길을 간다.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란 옛길을 따라 걷는다.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라는 듯이 움직인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한다는 듯이 발걸음을 서두른다.


「그럴까요...?」


그리고 크리스틴은 남자에게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다시 한 번 묻는다.

정말 그런 삶이 찾아올 거로 생각하냐는 듯이 물어본다.

그 답은 방금 전과 같다.


「그래, 언젠가는 말이야.」


남자에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없다.

아마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을 거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두는 그저 살아갈 뿐.

남자조차도 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믿으면, 이루어질까요...?」


「그걸로는 부족하지.」


그러나 목표에 도달할 방법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에겐 이 세상을 바로잡을 방법이 있다.

오래 전의 누군가가 남자를 붙잡고 몇 번이고 알려주었던 방법이 있다.

너무나도 괴롭고 힘든 방식이지만, 그 길이 아니라면 이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방법이 있다.


「그 미래를 믿고 나아가야 하네.」


「나아간다...?」


「그렇네. 멈춰 있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


「그건, 알고 있지만...」


남자의 말에 크리스틴 또한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를 쳐다본다.

그녀에게 그의 존재는 수단이자, 결론이자, 답 그 자체다.

남자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미 크리스틴이란 작고 희미한 존재에게 그는 이미 크고 위대한 동반자다.


「두려워요...」


그렇기에 스스럼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물론 크리스틴도 스스로 용기를 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몇 번이고 되뇌며 길을 나섰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또한 거짓이기도 했다.

그녀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말씀해 주세요... 저는, 무서워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네.」


남자는 그 감각을 모를 거다.

자신의 약함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그 감각을 그가 알고 있을까.

남자는 강자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만한 힘과 경험을 갖추고 있다.

적어도 크리스틴에겐 그렇게 보일 터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테지.


「힘 닿는 데까지 돕겠다는 것 외엔 말이야.」


그러나 그 또한 인간이다.

어떤 존재에게는 한낱 미물로 여겨지는 무의미한 존재다.

때가 되면 땅 속에 묻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한낱 인간이다.

죽은 뒤에 어느 기도사를 찾아가도 애도따위 해주지 않을 불쌍한 인간이다.

자신이 묻힐 땅 한 뼘조차 바랄 수 없는 외로운 인간이다.

그런 사람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마음 속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기회를 노리고 있는 공포까지 없애달라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는 그럴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약속하지 않았나.」


죽을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는 일 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남자는 크리스틴의 옆에 서 있다.

그녀가 위험에 처할 때면 스스럼없이 앞으로 나서서 화살받이가 된다.

그녀가 용기를 낼 때면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 준다.

크리스틴은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 아버지가 있다면 그가 가장 가까운 존재일 거다.

그 사실은 세상을 잘 모르는 요정 소녀 또한 잘 알고 있다.


「네, 그랬죠...! 죄송해요, 괜히 말을 꺼내서...」


「괜찮네. 누구나 그럴 수 있어.」


「그래도...」


「자네는 자네답게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거야.」


그러니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간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저 너머로 항해한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오직 죽음과 절망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처럼요...?」


「그렇네. 자유로운 영혼으로 말일세.」


「자유로운...」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기에 노력할 수 있다.

아직 완전히 희망이 끝나지 않았기에 노력할 수 있다.

그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아직은 죄라고 판명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적대적인 신조차 그것만은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네...! 조금, 기운이 났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직, 조금 두렵지만요...」


「당연한 일이야.」


미래는 보이지 않기에 두렵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어떤 난관이 있을지 모르기에 두렵다.

그래, 겁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렇죠...?」


「그렇네.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렇겠죠...?」


두려움의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면, 그 어떤 과실보다도 달콤한 희망이라는 과육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 희망으로 모든 생명은 살아간다.

죽지 않고 살아가는 힘이 된다.

눈앞의 두려움은 살아있기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존재는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자, 그럼 잡담은 이만 하고 가도록 할까. 아직 갈 길이 머네.」


「네...!」


마지막에 웃을 수 있도록, 승리자의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크리스틴은 남자의 보조에 맞춰 뒤를 따른다.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로 생각한다는 듯이 쫓아간다.

남자는 그런 소녀가 걱정된다는 듯이 몇 번이고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괜찮아요...!」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이 크리스틴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남자와 같이 있는 한 두려워할 것은 없다고, 꿈이 이루어질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터다.

하지만 그 또한 그녀처럼 생각할까.

한 번 실패한 삶이 두 번 실패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두 번 실패한 삶이 몇 번이고 실패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남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두려워해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그러나 이미 그는 길을 떠나왔다.

돌아오기에는 너무나 머나먼 길을 떠나왔다.

그러면서 수많은 목숨을 강바닥에 처박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죽음의 강바닥 아래에 처박아주고 왔다.

이제는 실패할 수 없기에 더 많은 목숨을 희생시켰다.

그래, 한때 용사였던 자는 이제 실패하고 싶지 않다.

실패하고 싶지 않기에 더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신은 그런 남자를 가만히 둘까.

분명히 그에게 더욱 무지막지한 고난과 시련을 내릴 것이 뻔하다.

그것이 남자의 삶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다.

무한한 슬픔의 늪에서 유영하는 미래만이 있을 터다.


「네...?」


「아니, 그저 혼잣말이었네.」


「그런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자는 나아간다.

한때 용사였던 자였기에 나아간다.

미래는 그렇게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

그 믿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니 나아간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밟는 발자국마다 신중히 처리하는 것 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을 잃어버리게 될 터다.

그래, 지금 말을 걸고 있는 자들처럼 길을 잃어버리게 될 거다.


「형제여, 어딜 가시오?」


「음?」


두 존재가 대화하는 사이, 어느샌가 한 무리의 여행자가 나타나 발걸음을 재촉하다 그들을 발견하고 살가운 말을 한다.

여행자들의 모습 또한 크리스틴과 마찬가지로 깊은 후드 속에 얼굴을 숨기고 있다.

눈빛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심연 속에 의도를 모르는 말로 두 존재를 현혹하는 듯한 모습에 크리스틴이 남자를 쳐다본다.

그는 소녀의 입에서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답을 내뱉는다.

좋은 일을 알려주지 않는 까마귀를 조우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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