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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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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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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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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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DUMMY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자였건만!」


그건 아마 훔반도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일 거다.

사람의 형체를 한 생물이 아닌, 진정으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자를 조우했기 때문일 거다.

생각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저 살아있을 뿐인 고깃덩이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악의로 가득 차 믿을 수 없는 적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세상 속으로 남자가 왔다.

그는 운명의 장난질 속에서도 몇 번이나 고깃덩이와 적을 도려내었다.

거대한 불의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도록 애를 썼다.

간과 쓸개가 분분히 갈라져 피를 토하고 싶어도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기 위해서 도끼를 들었다.


「미안하군.」


그러나 그 모든 노력도 부질없이, 남자는 단 하나의 핏덩이만 남긴 북쪽숲과 함께 몰락했다.

그 대가로 처절히 부서진 북쪽숲은 이제 그 자리를 아는 존재가 없다.

그 자리에서 삶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조차 첩첩이 쌓인 세월의 무게 위에 살고 있다.

한때 숲이 무성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신조차도 그런 곳이 있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곳을 향해 힘껏 나아가고 있다.

자신의 원죄와 그 속에서 맞을 부활을 위해 앞으로 향한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네 운명이 그곳에 있는 것을 어떡하겠나!」


운명.

드디어 훔반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을 절망의 낱말이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 그 또한 알고 있다.

이 운명을 벗어날 방법은 희미한 빛을 향해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막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가며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목숨줄을 부여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온몸이 찢기고 각혈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자각도 없이 이런 길을 선택할 바보는 없다.


「내 운명이라.」


그리고 남자는 이 길을 골랐다.

그런데도 남자는 이 길을 골랐다.

도시의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생을 마감하는 대신 희망의 끈을 잡고 살아나가는 것을 택했다.

크리스틴이라는 등불의 빛을 따라 다시 걷는 것을 택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남자는 알지 못한다.

미래를 알 수 있는 필멸자는 존재하지 않으니.


「아마 내 운명은 다른 곳에 있을 거다.」


그러나 남자는 훔반의 말에 씁쓸함을 얼굴에 띄우며 중얼거리듯이 반박한다.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눈치다.

그는 이미 한계를 뛰어넘어 무언가가 되었다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 사이에 틀어박혀 버둥거리고 있지는 않을 거다.

도대체 남자는 누구인가.

무엇이길래 자신의 종착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걸까.


「그건 무슨 소린가!」


「글쎄. 나중에 다시 볼 때는 알게 되겠지.」


훔반의 물음에 남자는 늘 그렇듯이 답하지 않고 천천히 떠나간다.

소중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고 숲을 빠져나간다.

멍하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무법자 몇몇이 정신을 차리고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수호자의 일갈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길을 내어준다.

그리 멀지도 않은 길.

남자는 천천히 크리스틴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말이야.」


돌아오는 길은 정돈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남자는 듣는 이 하나 없는 중얼거림을 흩날리며 크리스틴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갈 때는 혼자, 올 때도 혼자.

남자의

시체가 끝없이 쌓여있는 성채가 보인다.

세상의 끝이 있다면 분명히 이곳이리라.

희미한 등불로 밝힐 수 없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곳이리라.


「그 사람이에요! 어서 문을 열어요!」


그러나 세상을 밝힐 수 없다고 해서 등불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소중하고 각별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을 몸뚱아리로 감내하는 것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만으로 헤쳐 나가기에 이곳은 너무 광활하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가까운 곳에서 밝게 빛나는 존재가 있는 것은 큰 안심이 된다.

여전히 앞을 볼 수 없다고는 해도 그 빛에 취해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테니까.


「수고하셨어요! 당신 덕분에...!」


「미안하지만 지금은 피곤하군. 나중에 들어도 괜찮겠소?」


활짝 열린 성채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온 남자는, 두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를 맞이하러 나온 엘리자베스에게 한 마디 툭 던지고 지나쳐 버린다.

그 목소리에 성채의 무능력한 여주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는 듯이 도움을 구걸한다.

그러나 기사들은 그저 그녀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들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거겠지.

남자는 그 얼굴들을 헤치며 크리스틴에게로 향한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얼굴을 찾는 사람처럼 향한다.


「아...!」


그리고 만나게 된다.

유구한 시간을 홀로 지내다 용사를 만난 공주님처럼, 침대에 앉아 졸린 눈으로 창 밖을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 온다.

이 소녀가 등불이요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이라,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째서...?」


「미안하네.」


「하, 하지만... 미안하실, 것까진...」


남자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에 크리스틴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답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신 때문에 남자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숲으로 보내졌다.

그러니 사과한다면 크리스틴이 그에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미안하네.」


그러나 남자는 사과를 받는 대신 그녀에게 자신의 죄를 사하고 있었다.

대죄를 지은 자가 따뜻한 여신의 품을 찾고 구제를 구걸하는 것처럼 참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던 소녀는, 이내 두 팔을 벌리고 작은 품에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가 어째서 이러는지 알지 못한다.

왜 이렇게 슬퍼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남자가 바라는 것은 분명 다른 사람의 따뜻함일 것이고, 소녀는 그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따스한 품에서 맞이하는 시간의 흐름은 어째서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눈치도 없이 빠르게 흐르는 격류는 금세 씻겨 내려가 버린다.

그러나 조금 짧으면 어떤가.

행복할 수 있다면 잠깐이라도 좋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삶을 살아가지 않던가.


「이제, 괜찮으신가요...?」


「고맙네.」


부드러운 크리스틴의 말에 남자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앞에 섰다.

차갑게 식어 비릿한 적색 혈액의 냄새가 온 방을 덮는다.

남자는 그제야 그 냄새가 자신에게서 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소녀에게 미안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는 듯이 눈을 감는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크리스틴은 자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그녀에게 그는 한낱 몸짓이 아니다.

잊히지 않는 한낱 눈짓이 아니다.

잿더미에 파묻혀 굳어버린 회색 생명이 아니다.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남자는 크리스틴에게 하나의 생명이다.

무뚝뚝하고 웃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지만, 소녀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절망과 희망의 뒤섞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렇기에 생명이다.

고결하지만 고개를 꺾지 않는 들꽃이다.

크리스틴은 자기 고향에서 눈을 헤치고 피어나는 은색 꽃의 향기를 안다.

거센 겨울 바람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그 꽃의 은은한 향취를 안다.


「고맙네.」


그렇다면 베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소녀는 남자를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주 먼 옛날에 누군가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안아주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피어본 적 없는 생명.

그 생명이 지금, 한 소녀를 향해 피어나고 있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피와 눈물을 먹고 자라는 생명은 이제 크리스틴의 미소를 먹고 산다.


「별 말씀을요...!」


남자에게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자신이 그 덕분에 살아있음을 말하며 미소 짓는 것 정도다.

기껏해야 자신이 그 덕분에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정도다.

그 외에 그녀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크리스틴은 이 순간, 자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한다.

이렇게나 힘없는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론에 도달하려던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크리스틴에게로 천천히 스며들어온다.


「진심일세.」


한 단어일 뿐이다.

특별하다고 보기 어려운 낱말일 뿐이다.

하지만 그 고맙다는 말은 소녀의 가슴에 스며들어 은색 향기를 낸다.

잃어버리지 않을 등불이 되어 마음 속을 잔잔히 적신다.

그 말에 크리스틴이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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