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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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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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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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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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DUMMY

「왜 그러세요...? 아는, 이름인가요...?」


「아는 이름이지.」


소녀의 물음에 남자는 더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남자는 확실히 그 이름을 알고 있다.

그 누구도 들어보았을 수 없는 이름.

그러나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오두막의 여주인, 키르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키르케는 빙긋 미소 지으며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머, 저를 아시나요?」


「이름 뿐이라면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요.」


「그런가요. 그래, 어디서 들었나요?」


「흘려들을 뻔한 시와 한 여자에게서 들었소.」


「시와 여자?」


남자의 말에 키르케의 얼굴에 오묘한 표정이 피어오른다.

설마 그런 의외의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들어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시와 여자라, 남자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매개체가 아닌가.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는데요.」


「내게는 그 무엇도 어울리지 않을거요.」


그러나 남자는 그 또한 알고 있다는 듯이 긍정한다.

키르케가 더 할 말이 없도록 만든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 대답에 오두막의 여주인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둬들인다.

남자의 말이 기분 나빴던 걸까.

자학에 가까운 말이 숙녀를 기분 나쁘게 했을까.

키르케의 고혹적인 얼굴에서 점차 아름다움이 사라져 간다.

대놓고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얼굴에 자신을 비난한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두 사람에게서 풍겨오는 미묘한 분위기를 깬 것은 크리스틴의 목소리였다.


「저어...」


「무슨 일이니, 크리스틴?」


크리스틴.

키르케는 소녀의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이 말한다.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 이름만은, 이 소녀의 것만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어두워진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일 테지.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혹시, 유명한 분인가요...?」


「음,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 변화를 알지 못하는 크리스틴의 악의 없는 순수한 질문에 키르케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긴다.

어렵지 않은 질문일 텐데 괜히 어렵게 느껴진다는 듯이 당황한 얼굴이다.

망설이는 여주인의 모습을 보던 남자는 생각 외라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연다.


「내가 들은 사람과는 너무나도 다르군.」


「그, 그런가요...? 하지만, 그...」


「사실대로 말하기 곤란하오?」


「그야...」


남자의 말에 키르케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만을 삼킨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조차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하라고 여주인에게 권하고 만다.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버리면 편할 텐데 말이오.」


「말은 쉽죠...!」


「하지만 언젠가는 말해야만 하잖소.」


「당신도 이 아이에게 다 말하진 않았잖아요?」


남자의 말에 키르케가 그는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듯이 항변한다.

두 사람 사이에 낀 크리스틴은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다.

남자는 그런 소녀에게 다가와 손을 자연스럽게 잡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할 것을 믿는다는 듯이 맞잡는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다는 듯이 잡는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말하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재주는 그리 갖기 쉬운 솜씨가 아니다.


「대체, 무슨 얘기인가요...?」


「말하기 곤란하군.」


「어째서...?」


크리스틴은 남자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그 재주를 그녀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키르케는 상황이 변했다고 생각했는지 장난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남자를 도발한다.

설마 추잡한 자인 줄은 몰랐다는 듯이 가볍게 말한다.


「어머, 혹시 어린아이가 좋은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소.」


「정말로요?」


「다 알면서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오.」


「그런가요? 제가 알고 있는 건 그 아이가 요정이라는 것 뿐인데요.」


요정.

키르케는 분명한 목소리로, 크리스틴이 요정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는 듯이 답했다.

그 말에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녀의 앞에 선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상황에 크리스틴은 그저 멍하니 남자의 넓은 등을 쳐다볼 뿐이다.


「당신은 속이는 방법이 너무 서툴러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 마녀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마녀.

남자는 키르케를 마녀라고 부른다.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종족의 일원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 말에 키르케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오두막 안이 순식간에 차가운 한기로 가득 찬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남자를 노려보며 손을 휘적거린다.

몇 번이고 찢어 죽이겠다는 듯이 으르렁댄다.


「어째서 나를 마녀라고 하는 거야!」


천둥치는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가 좁은 집 안을 가득 채운다.

그 굉음에 크리스틴이 손으로 두 귀를 막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비를 맞지 않는 건 아니니까.

소리의 폭력이 크리스틴의 귀를 그대로 강타한다.

그 바람에 소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린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잖소.」


크리스틴의 상황을 남자도 알고 있을까.

애석하게도 남자는 등 뒤에 눈이 달려있지 않다.

지금은 소녀를 볼 수 없다.

그녀의 옆에 다가갈 수도 없다.

마녀의 앞에 서서 그녀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자여왕 키르케.」


그의 앞에 선 자는 무시무시한 이명을 가진 마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굳이 맞서 싸우지 않았어도 될 자.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 결과는 눈앞에 다가왔다.

그렇다면 맞서 싸울 수밖에.

용사였던 자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있다.

크리스틴을 지키고, 그 자신을 지킬 도끼가 당연하다는 듯이 들려있다.


「어째서...」


그 순간이었다.

소녀같기도 하고, 숙녀같기도 하고, 할머니같기도 한 목소리가 우울하게 흘러 내려왔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천천히 오두막을 덮어나갔다.

태초부터 자리한 비탄의 독주가 끊어지지 않는 실로 연주되었다.


「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슬픔은 나누어도 그대로다.

기쁜 일로 잊으려고 해봐도 그대로다.

그 녀석은 말을 듣지 않는 청개구리처럼 그 자리에서 그저 울고만 있다.

나눌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조금 나으련만.

그런 존재가 마녀에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마녀라고 불릴 일이 없다.


「나는 그대를 책망하지 않소.」


남자는 절망의 목소리를 쏟아내는 키르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너무 늦은 말로 위무한다.

그 말을 할 거였다면 더 일찍 해야 했다.

지금 해 봐야 오히려 상대의 화만 돋울 뿐.

그리고 그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한 번 해보자는 거야?!」


더욱 매서운 한파가 남자를 몰아친다.

한층 사나운 분노가 남자에게 닥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그 파도에 휩쓸려 생명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거다.

남자가 이렇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건, 그가 평범한 여행자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어떤 슬픔도 견뎌낼 수 있는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터다.

또한 밀려오는 격랑에 맞서 지켜야 할 소녀가 있기 때문일 터다.


「내가 사과하기에 너무 늦었소?」


그렇기에 남자는 피를 덜 볼 수 있는 선택지를 택한다.

이미 흘러 나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그 말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피해를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한때 용사였을 뿐, 완전무결한 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을 키르케도 이해하면 좋으련만.


「어째서 내가 사과받아야 하지?!」


그 진실이 오두막의 여주인에게 닿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그녀에게 진심을 닿게 하거나, 그녀를 도끼를 휘둘러 죽이거나.

말 한 마디가 불러온 파장은 이렇게나 크다.

남자가 완벽한 자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남자가 전능한 자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터다.


「그럼 이대로 싸울 수밖에 없소?」


「네놈...!」


「이대로 결판을 내야만 하겠소?」


그러나 상대도 완벽한 자가 아니다.

마녀로 불린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을 터.

남자는 그 점을 파고든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야만 하겠느냐고 설득한다.


「싸움을 걸어온 쪽은 당신이잖아!」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 뿐.

오갈 데 없는 분노가 분출되어 사방으로 흩어질 뿐.

흩어져 좁디 좁은 오두막을 가득 채울 뿐.

혹시 그 어떤 말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바라는 일이 헛된 망상일까.

모든 것이 한겨울 밤의 꿈일까.

남자는 천천히 도끼를 손에서 놓는다.

금세라도 파묻힐 자신의 육신처럼 내려놓는다.

그 모습을 키르케 또한 보고 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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