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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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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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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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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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DUMMY

모든 전쟁은 끝이 난다.

하지만 그대로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은 아니다.

전쟁은 이야기가 되고, 다시 전설이 된다.

다만 영웅적인 대서사의 주인공은 대의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대서사의 마지막에 있었던 전투를 기억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음... 이곳을 곡괭이질하면 되겠어.」


붉은 피와 검은 돌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한 용사의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역사에 길이 남을 한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남자가 지워낸 이야기도 있다.


「끄응...」


한 숲이 사라졌다.

그곳에 살던 거주민들의 이야기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의 이야기도 사라졌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리고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사라졌다.

잊히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지만, 사라진 이야기는 너무나도 빠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


그리고 지금 이곳은 머나먼 서쪽에 자리한 한 광산.

광물이 풍부한 이 광산은 특히 품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광맥을 따라 이어지는 굴 어딘가에, 한 중년의 남자가 일하고 있다.

중년의 남자는 옷이 땀에 흠뻑 젖었음에도 묵묵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어이, 늙다리. 열심히 일하네.」


그리고 광산에는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세 사람.

중년의 남자와 친구인 것처럼 보이는 껄렁한 두 청년이었다.

그리고 시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설렁설렁 일하던 두 양아치는 이내 그것마저도 재미가 없어졌는지 열심히 일하는 남자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고맙군.」


그러나 남자의 반응은 영 시원찮다.

목석보다 나을 것이 없는 짧고 간결한 대답을 한 그는, 두 사람을 잠시 훑어보더니 다시 일하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기가 찬다는 얼굴을 하는 청년들.

그리고 이내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걸쭉한 단어들로 입을 연다.


「나 원, 딱딱한 새끼네.」


「그러게 말이야. 나이를 엉덩이로 쳐먹었나.」


족히 열댓 살은 많아 보이는 남자였지만, 두 청년은 그런 사소한 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되는대로 지껄였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남자가 계속 곡괭이질을 한다.

그로 인해 찾아온 잠깐의 침묵.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의외로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남자 쪽이었다.


「미안하군, 사람들과의 대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야.」


시선은 곡괭이에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과묵해 보이는 두 입술 사이에서는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청년들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오히려 그의 사과로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더 험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면 다냐?」


「아주 그냥 날로 먹으려고 하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면 호의를 베풀지 말아야 하는 법.

그것을 다시금 깨우친 남자는 눈가를 실룩이더니 그들에게 다가왔다.

곡괭이는 아직 그의 손에 들린 채였다.


「미안하면 성의를 좀 보여야 하지 않아, 꼰대?」


「사죄의 성의 몰라? 어서 내놔!」


그러나 두 청년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지 저열한 발언들을 늘어놓는다.

그 말에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곡괭이를 내려놓고는 다시 묻는다.


「가지고 있는 것이 달리 없다만, 무엇을 원하는가?」


「간단해. 네 녀석이 캔 것을 우리한테 좀 나눠줘.」


「늙다리가 너무 많이 가져가도 이상하게 볼 거 아니야? 조금만 받아갈 테니까 그러도록 하라고. 어때, 괜찮은 조건이지?」


두 청년 중에 조금 더 품위가 없어 보이는 껄렁한 청년이 중년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자기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시시덕거리며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는다.

들을 가치도 없는 저급한 말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사람은 수도 없이 만나보았다는 듯이 청년을 지긋이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흐음,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제안이로군.」


「뭐야?」


「미안하네만 그 제안은 사양하도록 하지. 자네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곡괭이질도 하지 않았잖나.」


「그야 우리는 인생을 즐겁게 살자는 주의니까 말이야. 이런 데에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우리 젊음이 너무 아깝잖아?」


「맞아. 당신 같은 꼰대는 부양할 애새끼가 있는 모양인데, 그럼 빨리 미안하다고 하던지.」


「그래, 가족들 품에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우리 말을 따르라고.」


「뭐, 꼬라지를 보면 애가 있을 리가 없지만 말이지!」


청년의 말에 남자가 멈칫하며 그를 쳐다본다.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분노와 함께 뒤섞여 있다.

그 눈빛은 꽤 흉흉했지만, 청년들은 그런 것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입을 놀리며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한다.


「하하! 이 꼰대 보게! 진짜 애새끼도 없냐? 이거 완전히 헛살았네!」


「그럼 자네들은 있는가?」


「없지! 하지만 우리는 젊다고! 당신 같은 늙다리는 마을 여자들이 봐주지도 않잖아! 하하하!」


쓸모없는 대화와 게걸거리는 웃음소리가 또 한번 들린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금을 어떻게 넘겨야 하는가.

남자는 그 방법을 안다는 듯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묻는다.


「쓸모없는 짓을 다 하는군.」


「쓸모없는 짓이라니! 이게 달려있지 않으면 남자 구실을 할 수가 없잖아! 뭐, 네 녀석 같은 꼰대 늙다리는 분명히 그것도 쪼그라들어 있겠지만!」


「하하하! 그것도 그렇네! 하하하하!」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온 광산을 덮는다.

그 누구라도 그 소리를 들으면 분노를 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그는 그런 저급한 농담은 관심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별 대꾸를 하지 않고 다시 곡괭이를 든다.

그것이 그들의 심기를 뒤틀리게 했던 걸까.


「뭐야. 꼰대, 우리가 우스워? 야, 이 새끼가 우리 말을 씹는데?」


「꼰대잖아. 뭘 신경 쓰고 있어? 그냥 우리끼리 놀자고.」


「야, 지금 우리를 무시하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와? 이 새끼는 손을 봐줘야 한다고!」


되는대로 지껄이는 껄렁한 청년의 목소리 사이에 돌을 캐는 곡괭이의 소리가 섞여 들어간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청년의 손이 곡괭이를 움켜쥐더니 남자를 향해 무섭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들리는 파열음.

하지만 그것은 쇠가 살을 파먹고 들어가는 쐐기음이 아니었다.


「악!」


「이, 이 새끼가...?!」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서 있는 것은 의외로 남자 쪽이었다.

눈가를 찌푸린 채로 선 남자는, 역시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좌시할 수 없었는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두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죽음을 선고받은 사형수를 쳐다보는 집행인의 것이었다.

하지만 두 청년은 그 안광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 새끼, 순순히 넘어가 주려고 했더니...! 야, 저 새끼 죽여버려!」


「좋아, 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다! 이 새끼, 죽어라!」


화를 참지 못한 두 청년이 곡괭이를 들고 남자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다만 곡괭이가 그의 어깨를 찍으려고 할 순간에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가 양손으로 두 청년의 멱살을 잡을 뿐.

목을 졸린 청년들은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다 이내 힘을 잃고 늘어진다.


「후우...」


두 청년이 기절하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남자.

기절했다고는 해도 외상은 전혀 없기에, 겉보기에는 갑작스러운 탈진으로 기절한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남자에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다.

청년들이 복수랍시고 자신의 친구들을 이끌고 올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그다지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일 테니까.

남자는 기절한 청년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곡괭이를 들어 내리찍었다.

내리찍은 곳에는 날카로운 돌의 파열음이 들렸다.


「아, 수고했소.」


「별일 아니오.」


곡괭이를 내던지고 돌덩이로 가득 찬 자루 몇 개를 진 남자의 눈에 동굴의 출구가 보인다.

바깥으로 나가자 곰방대에 담배를 넣고 있던 늙수그레한 사내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넨다.

남자도 그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대신하고 그에게 땀에 전 자루를 넘긴다.

자루를 건네받은 사내는 미소를 띠며 그를 격려한다.


「웬만한 청년들보다 낫군. 당신이 있어 우리 광산이 그래도 먹고 산다오.」


「별말씀을. 자, 여기 오늘 일한 것들이오. 적철 말고도 몇몇 있을 거요.」


「알겠소. 그럼 좀 살펴보겠수다.」


「그러시오.」


그리 길지 않은 대화.

광산관리자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가 지고 온 것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찾아온 침묵.

무거운 돌덩이들이 바닥으로 내려지는 소리만이 들리고, 그렇게 시간만 하릴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음, 꽤 좋은 물건들이구만.」


침묵을 깬 것은 분류를 마치고 끄응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편 광산관리자 쪽이었다.

광산관리자의 말에 남자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황금색 동전 몇 개가 짤랑거리며 얼마 안 되는 돈이 쥐어졌다.


「오늘 일한 값이오. 조금 더 쳐 줬으니 좋은 것이라도 드시구.」


「고맙소.」


「고맙긴. 그럼 내일도 수고해 주시구려.」


「그리하도록 하겠소. 그럼 또 뵙도록 하지.」


광산관리자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질문 하나가 날아와 꽂힌다.


「아, 같이 들어간 청년들은 어떻게 됐소? 나올 때가 지났는데...」


「묻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광산관리자의 물음에 남자가 짧게 대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의 걸음걸이대로 움직이는 그를 쳐다보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곰방대에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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