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의사는 영원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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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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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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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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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 전염병을 마주하다 (2)

DUMMY

“알탄의 아들, 바타르다.”

“유그노아. 유노라고 불러.”


덩치는 환자들을 격리해놓은 곳으로 나를 안내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괜히 지고 싶지 않아 반말로 답했다. 내 자존심을 먼저 건드렸으니 질 수 없다. 남자는 기세다.


“원래 이곳에 다들 모여 사는 거야?”

“아니다. 슬롱가르를 뽑기 위해 모인 것이다.”

“슬롱가르가 뭔데. 자세히 설명해줘.”


나의 질문에 바타르가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이 자식이 나보고 겁쟁이라고 했던 게 고도의 작전인가 의심했었는데 지금 확신했다. 이 자식은 그냥 싸가지가 없는거다.


“슬롱가르는 슬롱의 지도자다. 슬롱 중에서 가장 강하면서 현명한 자만이 될 수 있는 명예로운 자리지. 해가 다섯번 바뀔 때마다 이곳에 모여 슬롱가르를 뽑는 의식을 치른다.”


그래서 이곳에 수만 명의 유목민이 모인 거였군. 그리고 하필 이럴 때 전염병이 돌게 된 거고. 적사병이 무슨 병인지 모르겠지만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의식을 미룰 수는 없어?”

“그건 절대 안 된다.”


바타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바타르의 말투만으로도 슬롱가르를 뽑는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병이 더 퍼진다고 해도 의식을 진행할 기세다.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 나대지 말고 조금만 참을걸.


얼마 걷지 않았는데 적사병 환자들을 모아놨다는 구역에 도착했다. 나름 빙 둘러서 줄을 쳐놓고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는 식으로 병이 없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놨다. 이 정도면 이 시대치고는 훌륭한 격리 공간이다.


“근데 환자가 많이 없나 보네? 게르가 몇 개 없는데?”

“이곳은 키요트 슬롱 사람들만 있다.”

“···뭐?”


격리 공간에 게르가 다섯개 남짓해서 환자가 얼마 안 되나 싶었는데 실상은 슬롱의 작은 부족마다 따로따로 격리를 해놓은 것이었다. 아마 제대로 격리하지 않은 부족도 있을 것이다. 머리가 아파온다.


“부족이 총 몇 개가 있는데?”

“이곳을 제외하면 서른여섯 곳이 있다.”


미쳤군. 하루 이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우선 내 앞에 있는 환자들부터 보기로 했다. 우선 무슨 병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다가가자 격리 공간을 지키고 있던 유목민 전사가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비킨다. 나는 게르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어떤 형태로 전염되는 병인지 알 수 없으니 그냥 몸 전체에 신성력으로 막을 치기로 한다. 신성력 보호복이랄까. 나는 신성력 보호복을 입은 후 바타르를 돌아봤다. 밉상이지만 보호를 해주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손을 내밀자 내가 하는걸 보고 있던 바타르가 피식하고 웃는다.


“필요 없다.”


그러더니 휙 하고 게르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죽고 싶어 환장한 건가? 난 황급히 그를 따라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윽.”


게르 안은 죽음의 냄새와 열기로 가득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다. 한눈에 이 병이 왜 적사병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상태가 심각한 몇 명은 엄청난 고열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다른 몇 명은 전신에 붉은 발진이 나타나 있었다. 컨디션이 그나마 나아 보이는 몇은 전신에 수백개의 농포가 가득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덮은 농포. 크기는 비슷비슷하고, 원형이지만 각각의 형태를 유지할 뿐 두세개가 합쳐지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환자들의 면면을 본 순간 어떤 병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천연두.”


그렇다. 그들이 적사병이라고 부르는 병은 천연두였다. 지구에서도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인 질병. 그러나 인류에게 최초로 정복당한 질병. 천연두는 수천년간 전 세계를 횡행하며 10억에 가까운 인간을 집어삼켰었다.


떠오르는게 많았지만 생각보다는 환자를 치료하는 게 먼저다. 나는 바로 고열이 나는 사람들에게 가서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열이 빠르게 떨어지면서 환자의 표정이 편안해지는 게 보인다. 그렇게 고열을 떨어트려 응급처치를 한 뒤 후유증 방지를 위해 신성력을 한 번 더 쏟아부었다.


신성력은 편의성이 좋은 힘이다. 제롬 수도원장에게 했던 것처럼 정확히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쏟아붓는 것만으로 웬만한 질환은 치료가 가능하다. 효율은 떨어지지만, 그냥 빛을 쐬는 것만으로도 병이 치료된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당연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이미 죽어버린 세포를 되살리거나 망가진 장기를 재생시킬 수는 없다. 천연두의 후유증은 고열로 인한 신경 손상. 뇌가 익어 불구가 되거나 사망할 수도 있고 시각신경이 손상되어 실명을 할 수도 있다. 거기에 농포가 생기면 피부가 완전히 뒤집어져 평생을 곰보로 살아가야 한다. 살더라도 팔다리를 절 것이고, 눈이 보이지 않을 것이고, 피부가 이상하다면서 손가락질당할 것이다. 이런 후유증은 신성력으로 완전히 되돌릴 수 없기에 최대한 신성력으로 위험한 곳을 보강한다.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휴.”

어느새 첫 번째 게르에 있던 환자들의 치료가 끝났다. 몸에서 완전히 천연두 바이러스를 몰아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피부와 신경, 장기를 보호하고 면역력을 잔뜩 강화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회복될 것이다. 이미 피부나 신경이 망가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했다고 자부한다.


“오래 걸리는군.”


바타르는 내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세 시간.”


열 명 남짓한 사람을 치료한 것 치고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열을 내리거나 면역력을 강화하는 정도에 그쳤으면 더 빨랐겠지만, 치명적인 후유증을 방지하려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다. 게르 하나에 세 시간. 슬롱의 부족은 총 서른일곱개이고 이 곳에만 다섯 개의 게르가 있다. 다른 부족 상황은 전혀 모르지만 이 곳보다 좋을리는 없다. 이대로는 신과 다시 만날 때까지 절반도 치료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천연두의 잠복기에 있는 사람들이 발병할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중과부적이다.


나는 우선 게르 밖으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느새 해가 낮아져 가고 있었다. 하긴, 새벽부터 반나절 동안 말을 탄 데다가 환자를 치료한다고 세 시간이나 쏟아부었으니 저녁나절이 되는 건 당연했다. 생각해보니 밥도 제대로 못 먹었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가방에서 딱딱한 빵을 꺼냈다. 천연두 환자가 있던 게르에 메고 들어갔던지라 신성력으로 대충 소독한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야, 물 좀 줘.”


바타르는 나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더니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휙 하고 던졌다. 음. 물은 맛있네. 배가 차니 머리가 다시 돌아간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다음 환자를 치료하고 싶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눈앞의 환자에게만 집중했다가는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다섯명, 열 명의 환자가 죽어갈 것이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염병에 맞서려면 철저하게 효율적이어야 한다. 구할 수 있는 환자는 구한다. 구하지 못할 환자는 포기한다. 더 이상 환자가 생기지 않도록 전염은 철저히 차단한다.


우선 환자의 치료. 환자를 한 곳에 모아야 한다. 한 곳에 모아서 당장 치료가 필요한 환자, 치료가 급하지 않은 환자,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환자, 치료가 의미 없는 환자로 분류하고 분류에 따라 적절히 치료해야겠지. 한 곳에 모아놔야 분류하기도 편하고 내가 이동에 시간을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전염의 방지. 천연두는 주로 공기로 전파된다. 제대로 격리만 할 수 있다면 전파는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다. 잠복기에 있는 환자가 문제겠지만 열이 나려고 하면 바로 격리하면 될 일. 추가로 백신을 만들어서 접종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교과서에서 봤던 제너의 종두법 같은 건 당장 불가능하다. 백신은 당장 필요한데 우두에 걸린 소를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분명히 종두법이 발명되기 전에 천연두 예방이랍시고 하던 게 있었는데···


"충분히 쉬었다."


뭔가 생각나려고 한 순간 바타르의 말 때문에 날아가버렸다. 아니, 이 자식은 나한테 무슨 원수를 졌나. 밥이나 제대로 주고 말하던가. 근데 정말로 이 녀석은 뭘 믿고 게르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높으신 분 처럼 보였던 노인이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꽤나 무서운 병인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야. 혹시 이전에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나? 그렇다면 이 녀석의 피를 뽑아 신성력으로 여차저차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야. 근데 너는 뭘 믿고 게르에 들어온 거냐? 옛날에 한 번 걸렸었냐?”


바타르는 내 물음에 피식하고 웃었다.


“난 강하다.”

“뭐?”


바타르는 현대에 가져다 놔도 웬만해서는 꿇리지 않을 거구. 그런데 힘이 세다고 병에 안 걸리나? 어릴 때 천연두에 걸려서 뇌가 익은 건지 의심이 들려고 할 때 갑자기 바타르가 기합을 내질렀다.


“하!”


바타르 주변의 공기가 끓어오른다. 몸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며 바타르의 존재감을 키운다. 에너지가 역동한다. 몸집을 불리던 푸른 에너지는 어느 순간 바타르의 몸으로 들어갔다.


“퉤.”


푸른 에너지가 몇 번 바타르의 몸을 순환하더니 바타르가 검은 침을 내뱉는다. 무협지에서 고수들이 내공으로 몸에 들어온 독을 제거한 듯한 느낌이다. 바타르가 기운을 갈무리한 후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본다.


“난 강하다. 병 따위에 지지 않는다.”


이 녀석. 마법사였구나.


이 세계에는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가 존재한다. 이름은 마법사지만 로브를 입고 번개나 불을 뿜는 건 아니고 흔히 말하는 초능력자에 가까운 존재다. 마나를 다뤄 인간을 초월한 자들. 수천, 수만 명 중 하나가 마나의 축복을 받을까 말까라고 하니 바타르 정도면 슬롱 중에서도 한 손안에 드는 전사일 것이다. 하긴, 그랬으니 아까 높으신 분들이 모인 게르에서 고함 한방에 소란을 잠재웠겠지.


그 순간 바타르가 힘을 보태준다면 일이 정말 쉬워질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환자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도, 내가 만든 백신을 보급하는 것도 이 녀석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가능하다. 그렇다면 해야할 건 바타르를 설득하는 것.


남자는 기세. 뱃심을 끌어모아 바타르에게 말한다.


“바타르. 방금 봤으니 알겠지. 나는 적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면 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타르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나를 믿고, 일 하나만 같이 하자."


당연히 믿을 수 없겠지. 아무리 신성력이라는 사람을 구하는 힘을 사용한다고 해도 오늘 처음 본 사이다. 거기에 같은 유목민도 아닌 제국인. 과연 정체모를 인간을 신뢰한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바타르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10초, 30초, 1분, 5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바타르의 입이 열렸다.


“믿겠다. 뭘 하면 되지?”


작가의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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