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기형도의 복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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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기형도
그림/삽화
박준기형도
작품등록일 :
2024.09.04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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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2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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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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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너 때문에 내 인생에 빨간 줄 그어질 뻔 했다고! -2

DUMMY

“실장님, 담배 한 대 시원하게 피시도록 창문 좀 열어드리겠습니다.”


어떤 말들은 그때 하지 못하고, 몇 년이고 입에 남기도 한다.


7년 전 겨울 초입의 무렵.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가 국내 모 도시에서 개최될 예정으로, 나는 행사 개최 관계로 직장에서 직급이 꽤 높은 실장급 공무원을 모시고 운전한 적이 있다.


대개 실장급 정도 되면 담배를 거의 안 피우는데, 이 분은 아직 끊지 못했는지 전자담배를 피우셨다.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약 3시간의 여정. 출발 후 1시간 정도 지나 서울 근처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고 식후땡을 같이 했다. 물론 맞담배는 아니고 나는 먼 발치에서 허겁지겁 피웠다.


이후 서울로 들어서자 하필 퇴근시간과 맞물리며 1시간 이상의 꽤 많은 시간을 정체 구간에서 허비했다.


가다 서다 반복하면 운전자도 답답하지만, 동승자도 비슷할 터.


담배란 게 그런 게 있다. 가령 초단기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일원이라면, 한 구간을 마무리하다 같이 담배를 피며 우정을 나누고, 구간이 때로 막히면 막히는 대로 담배는 서로 힘이 된다고.


나처럼 그분도 아마 그때부터 담배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간헐적으로 출렁이는 몸이 담배를 부르는 거지.


한데 나는 고위 공무원을 모시는 입장이라 안전 운전에 특히 집중하며 담배란 걸 까먹고 있었다.


막힌 도로를 지나 외곽 도로를 올라타자 차도 거의 없고 시원하게 뚫리며 세단을 묵직하게 치고 나가게 하자, 약간의 성취감에 딱 담배 생각이 떠올랐다. 그분도 마찬가지 였겠지.


하지만 웬일인지 눈을 감고 계셔 내가 준비한 멘트를 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살짝 예감이 좋질 못했다.


워낙 나랑 직급 갭이 커서, 말을 튼 사이도 아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심정이었으니까.


그렇게 5분이나 지났을까. 나야말로 막힌 도로에서 벗어난 이후 담배 한 대가 절실했지만, 고위 상사가 있는데 언감생심 담배는 꿈도 못꿨으니 뭐 기대도 안했다.


그런데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밀폐된 차 안에서 내가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으니 이 분은 이 분대로 그 몇 분인가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나 보다.


갑자기 자신의 우측 창문을 버튼으로 누르며 직 하고 내리더니, 침을 서너 번 꿀꺽 삼키더라. 그러더니 내게 어렵사리 그러는 것이었다.


- 거, 있지, 내 담배 하나 피우자.


아뿔싸. 아차 싶었다. 내 눈치를 보는 거였다. 그렇게 내가 나름 성심성의껏 준비했던 멘트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안전 운전을 한답시고 앞만 보고 정주행 하느라 나름 핑계를 대면서도 여기만 지나면 해야지 해야지 했는데, 그 몇 분이 지나자 그분으로선 인내의 한계점이 지나 버린 것이다.


그 직전에, 망설이지 말고 바로 그때 실장님! 시원하게 담배 한 대 피시도록 창문 열어드리겠습니다! 라고 감초 역할의 조연처럼 대사를 부담없이 쳤어야 했는데...


와, 그분이 담배 피우는 내내 그렇게도 불편할 수가 없었다. 나야 하급 직원이나, 요새 세상이 어디 군사 정권아래 조인트 까던 시대인가. 자신은 앞으로 차관이고 장관이고 치고 나가야 하는데, 사소한 거 하나라도 발목을 잡을 수 있으니 조심스러운 거지.


내가 그럴 놈이 전혀 아니지만, 오늘 처음 본 직원이 나중에 딴소리를 할지 안할지 모르니까.


이게 내가 먼저 치고 나와서 그분이 담배를 피우는 그림과 내가 아닌 그분이 손수 챙겨서 담배를 피우는 그림은 그야말로 천양지차 인거다.


내가 좀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분이 한 대씩 빨며 내뱉은 연기에 덧붙여지는 작은 숨소리마다 나를 타박하는 언성이 환청처럼 들릴 지경이었으니.


자네는 왜 그리 눈치도 없고 센스도 없어. 내가 꼭 이렇게 말을 해야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거야. 휴게소에서 내가 담배 맛나 게 피우는 거 뻔히 봐 놓고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에휴, 쯧쯧.


왕복 6시간에 이르는 긴 운전을 마치고 강남 모처에 있는 웅장한 아파트 정문 앞에 그분을 내려 드리고 긴장이 풀리는데, 찝찝함이 쉽게 가시지 않더라.


운전 풀타임 6시간 중 불과 그 5분을 놓치며 센스를 가동하지 못한 게 유죄라면 유죄.


그 유죄로 인해 나머지 5시간 55분이 허탕이 된듯한 기분은 더럽기도 했지만, 내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할 말을 따박 따박 하지 못하는 이 노예근성 비슷한, 머뭇거리는 주저함이 그렇게 싫더라고.


허 참. 근데 아니나다를까.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그 분은 차관급 승진을 하시더만, 또 6개월이 지나서 차관이 되고, 1년이 지나서는 장관이 되는 거였다.


뭐 워낙 직급이 높았던 분인지라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 신경이 크게 쓰인 것은 아닌데, 두고 두고 그때 말을 못했던 게 왜 그렇게 씁쓸한 것이었는지...


모르긴 몰라도 금번 기형도식 복수전의 배경엔 이때 땅을 친 경험도 알게 모르게 작용했으리라. 이렇게 한 번 당기니 고구마 줄기처럼 나오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이젠 할 말이 생기면 하는 거다. 무조건적인 직진은 아니다. 혹시 타이밍이 정말 맞나? 지금 아니라면 또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판단 기준에 의문이 따른다면 내 ‘자존감’을 지키거나 확보시키는 차원의 성질을 따져보면 어떨까 싶었다.


- 너 그때 나한테 왜 그랬니?


나는 명수한테 그랬듯 같은 멘트로 최나연에게 물었다.


한 번 해보았다고 그새 나름 요령이 붙었다.


티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너, 그때, 나한테, 왜 , 그랬니, 식으로 텀을 두며 힘을 주었다. 굳은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까.


물론 김명수에게 했던 것처럼, 내가 누군지 먼저 밝히지 않는다.


이건 딱 보아도 둘 다 장기전일 수 밖에 없다. 그간 쌓인 세월이 얼마인가. 천천히 풀어나가면 된다.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나도 모른다.하지만 이왕지사 첫 발을 내딘 이상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나는 근거 없이 자신감이 충만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별거 아니더라.


나는 미혼이라 돌볼 가족도 없고, 잃을 것도 없었다. 이놈의 직장? 생계수단이니 고맙긴 하지. 하지만 내가 장차관이 될 것도 아니고. 적당히 현금자산 모아놓았지, 연금 나오지, 나 혼자 되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까.


한참이 지난 것은 아니었고 한 3초, 5초 지나자, 오랜만에 듣는 최나연의 목소리가 아 이렇게도 옥구슬이었나?


- 누군데?


우와, 우와, 이거 초장에 분위기가 이상했다. 오밤중에 누군지도 모르는 남정네 한테 전화가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일말의 경계도 없이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거지? 혼술 했나? 똥인지 된장인지 알고서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목소리를 부리는 건가?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끝자락엔 거대해지듯, 최나연의 한 방이 내 마음속에서 지진을 일으키기시작했다.


‘누군데?’라는 한 방.


나는 망치가 아니라, 도끼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쪼개지고 있었다. 쩍 하고 갈라졌을 판인데, 뇌의 단면 마다 그녀의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긴 가뭄에 쩍쩍 갈라진 호숫바닥에 스며드는 단비처럼 스며들더니 촉촉하게 젖어 버리게 하는데...


미친 놈. 나는 그렇게 당하고도 똑같은 자리에서 몇 년간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같이 느껴졌다.


애증에서 증오가 크다고? 줘도 먹기가 싫다고?


최나연은 외모도 독보적인 매력이 충만했지만, 목소리 또한 예의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학교때부터 15년이나 흘렀는데, 그 긴 세월 성숙미를 옹골지게 비벼 놓았네.


끈적거리는데도 너무 담백해서 두 귀뿐만 아니라 온 몸을 즐겁게 하는 목소리.


음 이미 댐은 무너지기 직전. 나는 최나연의 목소리 정체가 무엇인고, 설명을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게 띨장님 같이 혀 짧은 소리나 코맹맹소리 같은 귀여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하게는 말해, 성숙미와 귀요미의 배합에 섹시미와 지성미가 황금비율로 붙은 느낌인데, 거의 뭐 설명 불가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고소영 얼굴에 붙은 복점(점이지만 목소리라고 여기자)이, 최나연 육체의 어디쯤일까? 고소영처럼 얼굴 부분은 아니고. 그래 지구의 관점에서 하와이나 코타키나 발루같은 섬이 있는 열락의 위치 그곳에서 최나연의 목소리가 나온다... 비키니를 입고서 폭풍의 언덕(혹은 플라톤)을 읽으며, 붉은 와인을 입술에 적시며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지.


내가 그 타겟이 되었다는 상황이 된다면 게임 끝난 거다. 그리고 노리개 아니 조무래기가 되어 자존감이 박살날 것을 알면서도 최나연에게 바짝 엎드리는 거지.


우와 이런 한심한 생각은 15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다. 나는 최나연으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최나연의 이혼 소식을 듣고 나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생각도 없이 그냥 흡수하듯 받아들였는데, 나도 내 감정을 모른다? 설마 이혼 소식을 듣고 머릿속에 폭죽이 펑펑 터졌더라면 아싸 하고 좋아했을 판인데, 애써 꾹꾹 누르다 사라졌을까.


나는 잘 포장된 최나연의 음성 메시지, 그것도 몇 마디 뿐이라 단출하기 짝이 없는 작은 주크박스에 한방에......


으, 으, 벽이 없다. 답이 없다. 나는 무너져 내릴 뻔 했다. 큰 일 날 뻔했다. 나는 착각을 한 것이다. 그녀가 20년 전 그 지질했던 ‘나’란 존재를 안다면 저런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겠지.


하지만 승부는 이미 결판이 난 거나 다름 없었다. 나는 선전포고가 아니라, 넋두리 같은 하소연을 보냈는데 그게 꼭 항복 메시지 같았다.


- 너 너 때문에 내 인생에 빨간 줄 그어질 뻔 했다고.


.....그래서 나는 더욱 나를 밝힐 수가 없더라.....


.......너 너 라고 하지 않고 나연 선배란 호칭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나는 나연 선배로 굳이 말하지 않고, 그냥 너 너 라고 했다......


명수와는 확실히 전개의 양상 자체가 달랐다.


난감했다. 찝찝했다. 복잡했다. 아니 내가 과연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 같은 기형도의 복수전을 왜 치러야 하는지 의문부호까지 따라 붙더라.


- 아니 그러니까 누군데?


게임이 끝나가고 있었다. 최나연 이게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혼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능구렁이를 수십 마리 삶아서 갈아 마셨나. 왜 이리 부드럽고 촉촉한 거야. 아니 이젠 남자라면 사족을 가리지 않는 건가.


15년 전 영영동파출소에의 그 사단? 그걸 기억할리는 만무하지. 거기다 나란 존재란 게 워낙에 그녀에겐 사소하니까.


이렇게 전개가 되고 보니 그녀 집앞과 영영동파출소에서 내가 겪은 일은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어이없게도 모래알 같은 희망을 보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혼녀와 노총각 이란 한 셋트. 나이는 동갑.....


아 나는 아직 잃을 게 없는 게 아니었다.


잃을 게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불혹의 노총각이라도 총각은 총각이잖아.


그래서 그랬을 거다.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뚝.


최나연과의 한 판 승부에서 나는 완전히 패배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기형도의 복수전에 나름 전개 계획을 마련해 놓았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입에 담지 못할 욕까지도 필요하다면 그녀에게 쏟아부어야 했기에 연습도 한 번씩 하고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최나연 그 불여시 같은 여자의 목소리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넉다운이 된 거다.


최나연에게 전화하기 전까지, 영영동파출소사건은 추억에 대한 경멸*이었다. 기억에 대한 능멸, 능지처참까지 내릴 정도로...


이렇게 순식간에 반전이 되니 15년전 그날은 이제 추억이 되더라?


15년 전 그날.

반말을 일삼는 택시 운전사를 뿌리치며 사라지려고 하는데, 끝까지 나를 쫓아오는 택시 기사와 멱살 잡이 수준의 다툼이 아파트 경내에서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이 택시 운전사. 나랑 무슨 웬수가 졌다고 찰거머리처럼 들러 붙는 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거기다 최나연이 바로 집 앞이라 막상 보러왔지만, 혹시 이때 그녀가 나타나서 이런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싶은 막막함에 걱정만 앞설 뿐.


아니나 다를까, 하필 그때 현대아파트 경내까지 순찰을 도는 영영동파출소 순찰차 한 대가 떡 하니 들어오는 거였다.


멱살을 잡고 있던 나와 택시 운전사는 눈에 지진이 일었지만, 자존심이 어떻게 얽혔는지 멱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도망치기는커녕, 외려 서로의 모가지를 더 굳게 잡고 있었다.


경내 광장을 지난 순찰차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지 우리쪽을 발견하자마자 순찰차를 가깝게 대더니 경찰 두명이 내렸고,서로 놓지 않는 우리를 갈라놓았다.


- 아니 아파트 경내에서 무슨 쌈질들인가요? 신고가 계속 들어오고 난리도 아닙니다.


* 입 속의 검은잎. 기형도 시집(문학과 지성사.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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