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기형도의 복수가 시작된다.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박준기형도
그림/삽화
박준기형도
작품등록일 :
2024.09.04 23:38
최근연재일 :
2024.09.12 01:29
연재수 :
7 회
조회수 :
246
추천수 :
0
글자수 :
41,069

작성
24.09.11 01:42
조회
27
추천
0
글자
12쪽

<5편> 군자의 복수

DUMMY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고서나 무협지에 간혹 나오는 말이다.


나는 뭐여, 김명수한테 당한 게 이십 년이 넘어가는데.


그런데, 나는 때가 때인지라 저 문장에서 ‘복수’란 단어에 꽂혀야 하는데, 유독 ‘군자’에 방점을 찍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아니.


각성의 희열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차원을 넘어 일종의 자정 작용을 하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지.


복수라니, 말 좋다. 맞은 만큼 때려 주는 게 응당 필요하고 그게 원천적인 복수 아니겠나.


내가 검사라도 되었다면, 어쩌면 그 놈은 소식을 듣고 진작에 내 앞에 찾아와 바짝 엎드려 빌었을지 모르는 일이지.


내가 의사가 되었다면? 그야 공권력하고는 별 상관이 없으니 쳐다 보지도 않겠지만.


사실 복잡한 복수라는 게 있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거지.


정말 죽을만큼 억울해서 죽일만큼 강해지고 싶다면 피나는 노력을 통해 뭔가를 이뤄내는 게 인간사의 흔하디 흔한 서사다.


누구는 최고 검객이 되고, 누구는 판검사가 되고.


판에 박힌 인물들 말고 내게 최고의 군자는, 지구상에선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곽정이란 사람이다. 소설영웅문의 주인공 곽정, 곽대협 말이다.


짤막한 에피소드 하나.


양과가 주인공인 신조협려(2부)에서 곽정의 딸 곽부가 화를 참지 못하고 양과의 팔을 숙녀검으로 잘라버린다. 곽정은 친자식처럼 여긴 양과가 팔을 잘렸다는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 곧장 곽정은 곽부를 혼내키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아비로선) 좀 막힌 명분을 갖다 붙이며 큰 딸의 팔을 자르려고 한다. 다행이 곽정의 소신을 잘 아는 황용이 눈치채고 곽부를 내빼는데...


물론 소설을 쓴 김용이라는 작가의 역량이 워낙 탁월해서 가능했겠지만, 곽정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생존자로 느껴질만큼 그 소신이 대단했다.


특히 친딸의 팔을 마음 먹고 잘라버리겠다고 다가서는 장면에서 나는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


허나 나는 그때 중학생이라 너무 어렸다. 곽정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깨닫고 거기다 배우 익히기엔 너무 어렸던 것.


서른을 훌쩍 넘은 어느 해.

우연히 다시 읽게 된 소설영웅문에서 그 부분을 읽다가 나는 곽정이란 사람의 소신에 가슴이 얼얼해지고 만다.


와 소설이 아무리 잘났더라도 결국 싸그리 다 허구인데, 나를 그렇게 탄복하게 만들다니....놀라웠다.


더 깊게 생각해보니 이건 캐릭터의 탁월함이라기보다는, 소설에서 내보인 그같은 소신 자체의 올곧음이 아니었을까.


마땅한 일이라면 응당 당연히 해야 함을 몸소 실천해서 보여준 그 곽정의 소신을 고등학생 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열일곱살 때 김명수란 아이으로부터 그같은 괴롭힘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


침이 묻은 슬리퍼로 내 우측 뺨을 가격했던 김명수.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까?


- 명수야 친구 때리는 거 아니다. 봐라 이 새끼야, 겁나 아프잖아 이 새끼야.


아니면, 양반 자제 스타일.


- 김명수 자네가 이리 내 우측 뺨을 자네의 재빠른 발차기로 맞아보니 상당히 아프구려. 자네는 내게 왜 그같은 짓을 벌인단 말인가?


하긴 말이 문제가 아니었겠지. 실력(實力)이 모든 것을 좌우할 때였으니까.


최나연도 마찬가지.

만날 장소를 내가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그녀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등신처럼 질질 짜기만 했지.


아우 지금 생각해도 욕만 나온다. 여자를 어디 기다릴 일인가. 오지 않으면 곧장 쫓아가서 고백을 해버리든지 뭘 한번 어떻게 액션을 취해보는 거지.


그럼에도 남자 여자 차이가 있다. 최나연은 여자랍시고 제대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지만, 약속을 건 자체를 썸이라고 치면 그것도 추억이라고 할 있겠지.


그러고보니 김명수 이 자식은 도대체 뭐냐. 그냥 순전히 나쁜 놈인 건가.


(이와 같은 이유가 이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고) 불과 이틀 전까지, 좀 비겁하지만 나는 그놈에게 매일 의문의 전화를 걸어 괴롭히려고 했었다.


한데 최나연이한테 같은 방법으로 전화를 걸었다 심적 변화로 좀 상황이 바뀌고 만 것이다.


김명수에게 복수 같은 것을 꼭 해야만 한다면 근사한 복수여야만 한다.


치졸하거나 비겁하거나 애매하거나 집요해서도 안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방법으로, 그리고 할수만 있다면 최대의 극적효과를.


이런 관점에서, 전형적인 클리셰를 떠올려 본 적이 있다.


녀석의 직장을 알아내어 포지션과 업무를 파악한다. 가령 그가 회사의 구매 수요를 책임지는 구매 과장이라면, 나는 지난 몇 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공급사의 회사 전무가 되어 있는 거다. 뭐 사장이면 더 좋지, 되기 힘들어서 그렇지.


나는 공급사의 전무의 위치에서 공급량을 쥐락펴락 농락하며 녀석의 실적을 바닥치게 만든다. 종국엔 짜잔 하고 나타나 녀석이 손발 닳도록 빌게 하거나, 기분에 따라선 아예 해고 당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지.


생각만 해도 오줌이 지릴만큼 짜릿한 거다.


최소한 복수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나는 전화로 하는 기형도 복수전은 그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웃긴게 뭔가 제대로 한 게 없는데 잠정 보류가 좀 거창한 면이 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인 거다.


응당 해야 할 말을 문제의 상황에서 적시에 올바르게 하려면 실전 같은 연습같은 게 필요하니까.


**********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이 지나갔다.


속이 꽉 찬 만두같은 주말이었다.


내 마음은 갈대처럼 요리조리 좀 흔들렸다.


하지만 곧추세우는 능력이 나는 탁월하다. 운전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업무적으로 운전대를 잡는 순간 만큼은 난 도로만 보거나, 도로 옆을 지나는 차만 본다.


그렇다. 언제나 무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다니는 한 밥줄이다.


돈을 쓸 데 가 없어 현금자산을 쌓아놓긴 했지만, 죽을 때까지 쓰기엔 턱도 없다.


근데 내가 그래서 발전이 없었는가 모르겠다. 20년간....달라진 게 없다. 결혼 근처에도 못가보고. 죽을 때까지 기능직 공무원에 운전사. 하지만 당시 특별채용되었는데, 뒷구멍으로 들어왔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으레 출근하는 월요일이었는데, 확실히 내 사위에 떠다니는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변화가 시작된 게 분명하다. 불현 듯 1Q84가 스쳤다.


내 마음속에서 평생 한 개였던 달이 두 개로 갈라지고 있단 말인가. 이건 소설이 아니다. 내 심장이 뛰는 현실이자 인생이다. 두 개의 달 아래 최나연을 품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이름하여 ‘기형도식 복수전’뽕이다. 솔직히 말 장난 같아서 속으로 창피한 면도 있었다.


이게 정말 될까 싶은 생각에 찜찜했던 거지.


김명수하고 최나연이야 지난 20년간 수십 번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게 서너번쯤 있었다.


대개 몽땅 취한 날 그랬던 것 같다.


내 신세를 한탄하며 비애에 빠지다 화살을 김명수나 최나연에게 돌리는 버릇이 그때 생긴 모양이다.


내 소개 좀 하겠다. 나는 운영총괄과에 속한 공무원이다. 직급은 노코멘트. 직위는 주무관. 하지만 친한 동료들은 나를 업무 외적인 자리에선 박 시인 이라고 부르고, 사무실에선 박 기사님이라고 부른다.


기사는 업무 분장상 큰 줄기일뿐이고, 하는 일은 참으로 다양하다.


아줌마 쉬는 날은 청소하지, 서무 쉬는 날은 과장 챙겨야지, 총괄팀장(서기관) 쉬는 날은 내가 믿음직한 형님이라고 하면서, 직원들 잘 좀 감시하라고 하지. 심지어 과장이 일주일의 긴 출장이나 휴가를 갈 때도 내게 그러더라. 형님만 믿고 갑니다. 아니 내가 뭐라고.


그래서 기능직 공무원이 무섭다. 나는 여기서 군대를 제대한 이후부터 있어 왔는데 알기로 죽을때까지 전보 대상이 아닌 것이다.


아마 재직중 죽는다면 그야말로 여기서 죽어 나가는 최초의 직원이 될지로 모른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은 과장이나 팀장들은 박 기사로 보통 부르고, 기분이 좋을 때나 농을 걸고 싶을 때 박 시인이라고 부른다. 둘 다 뭐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아니 박 기사는 뭐 빼박이니까.


등단한 시인도 아니고, 시를 잘쓰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하나다. 과장 자리의 대각선 반대편 구석 자리가 내 책상인데, 내 책상위 책꽂이에 있는 책이 다 시집이니까.


시에 언제부터 미쳤냐면, 그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십 대는 확실히 아닌 것 같고, 서른 두 세 살 정도에 사기 시작했던가.


언제부턴가는 새벽잠이 사라져서 4시 50분이면 눈이 뜨고 만다. 이때부터는 잠도 새로 안들고 사람 참 미치게 한다. 요즘 전략은, 그 무렵에 송출되는, 좀 영혼없는 클래식 라디오를 틀어놓는다는 것.


박 성연 팀장.


내내 몇 년 간 눈에 가시였다.


사무실에서 비밀스럽게 흘러다니는 별명이 있다. 특이한 건 아니지만.


- 초과 빌런 대마왕!


그는 과에서 천하무적이다. 학벌 좋고 집안 좋고 재력 좋고...아 재력은 빼야 하나?


심지어 그의 끝도 없는 초과근무를 언급한 과장마저 두 달 전 딴데로 전보조치 되었다고 한다.


여느 때와 달리 일찍 출근한 나. 몸이 가벼웠다. 머리는 더 가볍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7시 8분이다.


와 이 시간에도 박 팀장은 사무실에 나와서 앉아 있다.


딱 보아도 핸드폰으로 뭘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영화나 드라마 아닐까.


아,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영화도 보고 초과 수당도 타고.


하지만 모든 것에 반대급부가 따르는 법이다.


시대가 변했다. 지금은 무한정 초과수당을 지급해주지 않는다. 거기엔 부서 자율성이란 명분을 부여했는데, 결국 그게 오가작통 기능처럼 서로 감시하니 정이 붙겠나. 자율성 통제성 좋다 좋아, 하지만 사람이 먼저 아니겠는가.


하지만 눈치 챘겠지만 박 팀장은 예외다. 치외법권적 힘이 있으니까. 힘이란 게 별거 아니다.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처가 능력있고.


사실 나같은 사람은 초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야말로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알바를 해서 소득을 창출하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당최 사무실에 무한정 앉아 있는게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


나는 과장 자리 앞쪽에 가장 좋은 자리(다른 사람들이 보려면 일부러 걸음을 파티션 안쪽으로 옮겨야 보이는 자리) 있는 박 팀장을 향해 우렁차게 인사를 올린다.


- 안녕하십니까? 박 팀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얼굴을 보지 않고도 시큰둥한 반응이 눈에 선하다. 상관 말라는 기색이다. 이틀 전의 나라면 그냥 넘어갔겠지. 하지만 나는 이틀 전의 내가 아니다.


- 그런데 박 팀장님 아침 일찍부터 할 일이 많으신 모양이십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할 말을 한다고, 꼭 정주행만 할 필요가 있나. 적당히 배배 꼬을 필요도 있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박 팀장. 책상위를 부산스럽게 만지더니 자연스럽게 말한다.


- 그냥 뭣 좀 보느라고. 이게 좀 집중적으로 볼 게 있네.


볼 것은 무슨 개뿔. 당신은 안 보이는 줄 알지? 직원들 다 알아요? 당신 자리에 앉아 하루종일 영화 보고, 주식 사고 팔고, 비트코인 넣다 뺐다 하는 것. 죄다 안다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서른 즈음에 기형도의 복수가 시작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 <7편> 이렇게 까는 거야? -2 24.09.12 18 0 12쪽
6 <6편> 이렇게 까는 거야? -1- 24.09.12 25 0 15쪽
» <5편> 군자의 복수 24.09.11 28 0 12쪽
4 <4편> 너 때문에 내 인생에 빨간 줄 그어질 뻔 했다고! -2 24.09.09 33 0 14쪽
3 <3편> 너 때문에 내 인생에 빨간 줄 그어질 뻔 했다고! -1- 24.09.08 43 0 15쪽
2 <2편 기형도식 복수전> 24.09.06 30 0 14쪽
1 <1편 너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 24.09.04 70 0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