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영웅은 기둥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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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
작품등록일 :
2024.09.0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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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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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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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화_계절을 먹다니 신기하네(2)

DUMMY

**


나물 무침은 상당했다.

뭔가 생명력을 먹는 기분이랄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궁금하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방님.”

“오랜 친구인가.”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마녀와 숲의 자식들과 관계가···.”

“괜찮아. 조금 개방적인 친구거든.”

“아.”


문을 열었다.

완력으로 부수고 들어올 수 있음에도 이 친구는 예의가 있었다.

아니, 이 종족이 예의를 차리는 부류다.


“자네, 용사를 그만뒀다면서?”


뾰족한 큰 귀에 신선한 외모.

길쭉한 외형을 가진 친구는 엘프다.

그것도.


“음. 인간 여자가 있었다면 말하지 그랬어.”

“왔어? 붉은 숲의 여왕. 리제.”

“저 여자는.”

“그렇게 킁킁거리지는 말지. 시로가 마녀라고는 하지만, 내 아내니까.”

“아내? 마녀!”


리제는 붉은 숲이라는 대륙 중심에 있는 삼림이 있는데, 거기의 여왕이다.

엘프는 모계 사회라서 왕이 추대되기보다는 여왕 우선주의였다.


“어···. 저기.”


리제가 시로에게 다가갔다.

공격적이거나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

여왕으로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숲을 관리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두 번째 용사행 때 함께했던 리제는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호기심이 넘쳤었는데.

그런 행동 때문에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물론 우리 파티에 위협이 된 적은 없었다.

호기심으로 혼자서 새로운 버섯을 먹다가 저주에 걸린다든지, 던전 미믹에 반쯤 씹힌다든지.

아무튼.


“리제. 네가 우리 집에 찾아올 줄 몰랐는데?”

“아아. 킁킁.”

“뭐 하는 거야! 남의 부인한테!”

“아니, 신기한 냄새가 나서.”

“응?”

“부드러운 우유 냄새가 나면서도 뭔가 새콤달콤한 양념장 냄새가 나서 말이지.”


리제는 미식가였다.

호기심이 그녀를 미식의 길로 인도했었는데.


“야! 시로 피부는 왜 핥는 건데!”

“아아, 이게 무슨 맛이지.”


참 어이가 없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고 해도 눈앞에서 내 아내라고 말한 사람을 희롱하다니?


“어이, 거기는 핥으면 안 되지! 시로, 너도 반항이라도···.”

“아흥!”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참···.


시로의 얼굴이 나를 볼 때처럼 붉어졌다.


“야! 리제!”

“홍홍홍! 미르. 네 마누라 쩌는데?”

“미친년.”

“홍홍홍!”


**


-탁


“고마워. 시로.”

“별말씀을요. 서방님.”

“홍홍홍. 서방님이라니, 대단한데 내 친구.”

“진짜 너는 부랄만 없을 뿐이지. 남자 친구랑 다를 게 없다. 어디 아저씨 영혼이 들어간 건 아니지?”

“그런 불경한 소리를 나는 순수한 자지.”

“자지? 그런 엘프가 남의 마누라를 그렇게 침으로 도배하냐?”

“홍홍홍! 좋은 건 나눠 먹는 게 좋잖아?”


리제가 고개를 돌렸다.

목적지는 시로였다.

그녀에게 윙크했다.


“야!”

“아아, 거 참. 본다고 닳나. 핥는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보는 건 그렇다고 해도 핥는 건 내가 해. 내 아내니까.”

“쯧쯧. 그렇게 꽉 막혀서는 어떻게 새로운 것을 담는다고.”

“새로운 것을 담기보다 있는 걸 지켜내는 게 나의 임무였으니까.”

“으으. 말은 청산유수지.”

“그래서 여기에 온 목적이 뭐야?”

“부탁을 들어줬으면 해.”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리제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부탁했다.


“무슨 부탁? 용사를 그만뒀다고 한가하지는 않아. 시로랑 같이 산나물 비빔밥도 먹어야 하고 아까 고추장을 만들 재료를 찾으러 나서야 하거든.”


리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러는 거지?


“많이 바뀌었네.”

“뭐가?”

“용사 미르가 숙명을 내려놓더니, 생기를 찾았어.”

“생기를 찾았다니? 나는 언제나 활력이 넘쳤었다고.”

“홍홍홍! 농담이지?”

“아니, 진심인데?”

“······”

“뭐야.”

“함께 했을 때 너는 항상 죽은 눈으로 세상을 관망했었지. 언제 끝날지 모를 숙명을 등에 업은 채로 말이야.”

“아, 그때는 좀 피곤해서.”

“항상 그랬어. 인간 씨.”

“뭐, 과거가 중요하겠어.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홍홍홍! 진짜 바뀌었네.”


리제가 다시 시로를 봤다.


“어이. 그만 좀 보라고. 내 아내 닳겠다!”

“이렇게 사랑꾼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내가 네 옆자리를 차지했을 텐데.”

“어?”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주인은 시로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네가 색정에 미친 호색한인 줄로만 알았었거든.”

“그렇지 않아.”

“뭐가 그렇지 않아야. 드워프 공주가 그랬다고 미르 너는 괴물이라고.”

“음···.”


시로를 봤다.

뭔가 도움을 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로는 얼굴을 붉혔다.


왜?


“그래도 내 아내는 만족하는 모양이야. 기겁하지 않으니까.”

“그야 내가 좀 섬세해.”

“홍홍홍! 나도 한 번 맛보고 싶네.”

“뭐라는 거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벌리면 찢어지는 수가 있어.”

“아, 그래서 드워프 공주의 입가가 항상 찢어져 있었구나?”


아니, 무슨 소리를!


시로를 봤다.


응?


입술을 안으로 오므리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매번 그러지는 않았어.”

“홍홍홍! 우리 전대 용사 미르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도 다 보고. 오늘 길을 나서길 잘했다 싶네.”

“오늘? 중앙에서 여기까지는 꽤 걸릴 텐데?”

“아아, 완성하고야 말았지.”

“완성? 설마?!”

“흐흐흐. 시공간 마법을 우리 붉은 숲에서 완성했지. 마탑의 인간들이 따라오려면 천년은 이르지.”


조금 멋있어 보였다.

옛 전우라서 더러운 꼴까지 다 본 터라, 별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시공간 마법 오너라서 그런가?

아, 오너라는 건 너튜브 댓글을 보고 배운 말이다.

뭔가를 가진 사람보고 오너라고 하더라고.


잠시만.


순간 기막힌 생각이 번뜩였다.


시공간 마법이 있다면 다른 곳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저기 리제.”

“응?”

“아까 시로 피부를 핥을 때 궁금하다고 했었지. 이런 맛이 나는 이유가 뭔지.”

“어? 어. 그랬지. 이유가 뭐야?”

“알려줄 수 있는데, 맨입으로는 안 돼.”


그러자 리제가 겉옷을 한 꺼풀 벗었다.


“이 몸이면 만족하겠나.”


어쩐지 수줍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야!”

“왜?”

“나는 순애다.”

“홍홍홍! 그러긴 했지.”

“그걸 알면서도 옷을 벗는다고?”

“친구니까.”

“나는 불알이고 너는 자궁이고. 이 자식아!”

“홍홍홍! 뱃속에서 조정되는 거지 남자와 여자는 동류라지.”

“미친년.”

“홍홍홍! 그래서 맨입이 아니면 뭐가 필요한 거지?”

“시공간 마법.”

“역시.”

“알면서도 그 지랄을 떨어?”


어휴 진짜 미친 엘프 같은.


“오랜만에 본 친구가 숲이 바다로 변할 정도로 달라져 있다면 한 번쯤 놀리고 싶지 않을까?”

“나는 안 그래.”

“홍홍홍! 그건 어디까지나 네 얘기고.”

“미친.”

“그래서 뭔데 말해줘.”

“시로.”


시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자연스럽게 쌀밥을 담아둔 통으로 갔다.

그리고 작은 상자를 열어서 아까 무쳤던 나물 무침을 꺼내서 밥에 올렸다.


“여기 있습니다. 리제님.”

“응?”

“네가 궁금해하던 맛과 냄새. 그게 정답이야.”


리제의 표정이 오묘했다.

신기해하면서도 어딘가 걱정하는 듯했으니까.


**


식탁 앞으로 나물 무침이 올라간 쌀밥을 받은 리제.


이건 대체···.


달고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조미료를 쓰지 않는 엘프의 식단에 비교하면 가히 자극에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이 안 먹을 수 없게 만드네.


리제가 시로를 봤다.


마녀라서 음식에 마력을 담은 건 아니겠지?


의심이 커질 때쯤.

그녀의 손이 어느새 시로가 함께 내어준 식기를 잡았다.


어?


자동으로 움직이는 손이 나물 무침과 쌀밥을 섞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붉은 숲 한정이라고 해도 그녀는 일가를 이룬 엘프의 여왕이었다.

아무리 미르의 아내가 마력 농도가 짙은 마녀라고 해도 시로의 저주가 리제에게 효과를 발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배제하니,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본능이었다.


대체 어떤 음식이길래, 나의 본능을 자극하는 거지?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반드시 가지는 3대 본능.

식욕, 색욕, 수면욕.

지금 리제 앞에 놓인 음식은 그녀의 식욕을 자극해서 저도 모르게 움직이게 했다.

그릇 안에 음식물을 섞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한 번 퍼서 들어 올렸다.

푸르고 붉은 것이 마치 붉은 숲을 연상케 했다.


“한 번 먹어 봐.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미르가 미소를 지었다.

리제는 그를 보면서 작은 걱정을 띄웠다.


나를 조종하려고?

뭐지 냉소적이던 녀석이 이런 미소를 지을 줄 알다니.

분명 음식에 고대의 마법이 깃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를 어떻게 해보려는 속셈이려나!

흥, 가만히···.


“합!”


당해줄 수도 있긴 해.

나도 슬슬 후사를 봐야.


“헙!”


입안에서 맛의 축제가 열렸다.

맵고 짜고 달고 시큼한 자극이 터졌다.

코로 숨을 쉬면서 입안으로 들어온 공기 때문에 리제의 입안에는 맛이 더욱 풍미를 끌어올렸다.


“하앗!”


손에 잡은 식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다음 한 입을 몸이 기다렸다.

마치 강제하는 것처럼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헉헉!”


한참이나 먹던 그녀는 그릇이 깔끔하게 비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게 대체.”

“크크크. 엘프 여왕도 나물 무침 앞에서는 무방비해지는구나.”

“이, 이런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다. 악마에게 미각이라도 판 거냐!”

“그럴 리가 없잖아!”

“호호호!”


옆에서 미르와 리제를 지켜보던 시로가 웃었다.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리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의 이성과 본능이 격돌했기 때문.


“그, 그···.”

“호호호.”


리제는 어쩐지 시로가 무서웠다.


“있잖아. 리제.”

“뭔가.”

“이거는 시작에 불과해.”

“그, 그게 대체?”

“내가 너한테 시공간 마법을 빌리고 싶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야.”


미르가 그녀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잘 찌고 무친 산나물이 흰쌀밥에 정갈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찰진 소리와 함께 밥을 비비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들렸다.

군침이 도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보이지. 빨간 소스.”

“이, 이건 대체?!”

“고추장이라는 건데, 만들 재료가 부족해서 나물을 무쳐서 먹었거든.”

“그렇다는 건?”

“나도 확실하지 않지만, 눈으로 봐도 막 먹고 싶지 않아?”

“그, 그래!”

“에이,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원래 약한 자들만 소리 지른다고 그러지 않았었나? 아니면 내 기억이 틀린 건가?”

“크흠!”

“하하하. 그래서 대답은?”

“가, 가자!”


원하는 대답을 들은 미르가 시로를 쳐다봤다.


“시로.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네! 서방님!”


시로가 환하게 웃었다.

미르와 리제가 남은 상황.

리제가 미르에게 물었다.


“이게 신께서 너에게 준 선물이더냐?”

“응. 고생했다면서.”

“신기한 물건이구나.”

“다른 세상의 생활상을 볼 수도 있고 멍청한 행동도 볼 수 있고 엄청 신기해. 그래서 하루가 가는지 모를 정도야. 시로가 없었다면 아마 폐인처럼 낄낄대면서 침대에 붙어 있었을 거다.”

“허.”

“시공간 마법 술식을 공유해주면 하루 정도 빌려줄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

“크크크. 잘 생각해보라고 친구.”


리제는 군침을 삼켰다.

얼마나 맛있는 음식의 요리법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


“그, 그러면.”

“서방님!”

“시로, 나왔다. 나중에 얘기하자.”


리제는 입맛을 다셨다.


나도 신께 말씀드려볼까.


그러다 문뜩 시로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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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_오크도 튀기면 맛있다. 24.09.09 30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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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06화_계절을 먹다니 신기하네(1) 24.09.08 125 2 15쪽
5 05화_썰매는 누구나 좋아한다 24.09.08 175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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