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와인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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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똘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9.09 17:29
최근연재일 :
2024.09.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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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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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그게 내 일이라면 어떨 것 같아~

DUMMY

1화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예컨대, 여자친구(였던)가 미감이 의심될 정도의 남자와 바람이 났다거나···.


아니면, 1800년대의 프랑스인이 2024년 한국인이 되었다거나···.


아버지도 모르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산이 발견되었다거나···.


“네놈 여기 어떻게 들어왔냐니까?”


혹은, 말하는 염소를 보았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물론, 여자친구가 바람이 난 건 내 친구의 이야기이다. 내 친구의 이야기여야만 한다.

나머지는··· 모두 나의 이야기이고.



**



그러니까 나는 1793년··· 이 아니라 1997년에 태어났다. 툭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1793년에 태어난 것도 맞고, 1997년에 태어난 것도 맞다.


왜냐.


영원히 19세기 프랑스 사람일 줄 알았던 내가 21세기 한국인으로 환생했기 때문이다.

나는 본래 1793년 프랑스 부르고뉴의 코트 도르 북쪽, 즉 ‘코트 드 뉘’ 지방에서 태어났다.

현재 본 로마네라든지, 주브레 샹브레탱이라든지···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급 와인이 모여있는 지방.

수백, 수천을 호가하는 와인이 생산되는 지방.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내가 살던 19세기에도 코트 드 뉘 지방은 와인으로 먹고 와인으로 사는 지방이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나름 이름난 도멘(포도를 직접 키워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와인 메이커였고.


우리 집안은 대대로 귀족에게 사랑받는 와인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사실 우리집 와인이 귀족에게 팔려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연하다.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으니까.


그게 내가 태어나기 불과 4년 전이다.


공교롭게도 우리집 와인을 마셨던 귀족 나으리들은 죄다 기요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믿을만한 거래처는 잃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깨 너머로 와인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나는 태어나, 처음 옹알이를 했을 때 ‘마망(maman)’, ‘파파(papa)’보다도 ‘뱅(vin)’을 먼저 말하고 익혔다고 한다.


뱅, 뱅, 뱅, 연달아 말하자, ‘역시 누구 손자 아니랄까봐!!’ 하고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셨다고.


그렇게 나는 내가 도멘을 물려받게 되더라도, 별 탈 없을 줄 알았다.


그때는 귀족 나으리들이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 게 그렇게 가슴 찢어지는 일인 줄도, 우리 도멘이 지금까지 이렇게 유지할 수 있는 게 천만다행인 일인 줄도 몰랐다.


내가 어느 정도 머리가 자라, 도멘을 물려받고 나서야 알았지만···.


우리 와인을 사랑해주던 귀족들이 그렇게 떠났으니, 우리집 와인은 좋은 평을 받을 리가 없었다.


뭐랬더라, ‘불길한 와인’이랬었나.


프랑스인의 황제께서는 우리 지역 와인을 참 사랑해주셨지만, 우리 도멘의 와인만은 드시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황궁에서는 우리 와인을 취급도 안 했다.

그 당시 우리 도멘의 와인은 어딜 가나 입구컷이었다.


왜냐?


높은 분들께서 보시기에 우리집 와인은 이미 ‘저주받은 와인’이니까.


그래서 나는 0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 프랑스의 와인 시장은 네고시앙(포도를 사입해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이 주도하던 때였다.


그래도 열심히 와인을 만들고 팔았다.

코트드뉘 지방, 쥬브레-샹베르탱 마을의 최고 등급 밭에 도멘이 있으니, 다시 인기를 얻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노력이 통한 걸까, 차츰차츰 우리집 와인은 ‘불길한 와인’이라는 오명을 딛고, 근처 지방의 부르주아까지 눈여겨 볼 만큼 다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제가 뭔가 보여드린다고 했죠?! 저 앙리가 기어코 해냈죠? 이겨냈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쾌재를 부르고, 도멘이 날개를 달아 날아오르기 시작하던 그때.


“지금껏 마셔본 와인 중 가장 맛있네요.”


그 10새끼와 만났다.


그러니까 내 와인을 파리에서 팔아주겠다며 접근했던, 내 뒤통수를 거하게 쳐, 환생을 하게 만든 부르주아 놈 말이다.


그놈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순진하게, 선량하게 접근한 후 벌처럼 나를 쏘았다.


하, 한국 할아버지가 내게 신신당부하던 충고 하나가 생각난다.


대가 없는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다.

소고기 공짜로 사주는 새끼는 믿지 마라


할아버지 어째서 19세기 앙리에게는 이 귀한 말씀을 나눠주시지 않았나요.


이 자식은 그냥 소고기도 아니고 제주 청정지역에서 자연 방목으로 신선한 풀과 청보리만 먹고 아침에는 백건우 쇼팽 녹턴 전집을, 밤에는 칸예웨스트 마이 뷰티풀 다크 트위스트 판타지를 들으면서 자란 그런 한우를 공짜로 사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의 나는 내 와인이 파리에 알려진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다른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나는 그 새끼에게 와인은커녕,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내 인생을 갈아놓은 도멘을 그 새끼에게 통째로 빼앗겨버린 거다.


우리 가족이 일궈낸 ‘도멘 데 모스’는 그렇게 사라지고, 그 위에는 이름마저도 거창한 도멘 레 라메 던 앙주 (Domaine les larmes d’un ange)가 자리를 잡았다.


천사의 눈물?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앙리의 눈물이다, 이 10새끼야.


마을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도 꽤 유명세를 날렸던 도멘 데 모스가 하룻밤 만에 사라진 건, 사람들에게도 큰 이슈였다.

비록 나는 그 당시 죄책감에 집에만 종일 틀어박혀 있느라, 도멘 데 모스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나도는지 알지 못했다.


나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듣게 된 건, 공교롭게도 내가 죽던 날 밤이었다.


내 사정을 모두 알고 있던 단골 술집 사장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를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자네 그렇게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어쩌나? 인심이다, 내가 오늘 자네 먹는 술 다 쏘지. 그러니까 좀 나오게, 응?”


향한 곳은 당연히 그의 가게였는데, 생각해 보면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평소에는 사람 하나 없는 그의 가게에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붐볐고, 또 나는 이상하게도 술을 아무리 마셔도 정신이 또렷했다.


“그런데, 도멘 데 모스는 왜 없어진 거래?”


사람이 많으면 이야기도 많고, 소문도 많은 법.


“말도 마, 거기 물려받은 아들이 도박에 미쳐서 헐값에 팔아치웠다더라.”

“정말?”


당치도 않는 소리다.

도박은커녕, 카드 게임 근처도 가지 않았던 나다.


듣다 보니 기가 차, 헛소문을 바로 잡으려 벌떡 일어난 순간.


“정말이라니까. 에휴, 그나저나 돌아가신 그 집 아버지랑 할아버지만 불쌍하게 된 거지, 뭐. 그 집 어르신들, 그 밭에 인생을 갈아 넣었던데, 정말··· 안타까워.”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에, 눈을 뜬 채 고혈압(추정)으로 쓰러져 죽었다.


그러다 깨어나 보니, 1997년 대한민국 서울이었다.


신의 장난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그것도 과거의 기억은 그대로인 채로.


여기까지가 프랑스인 앙리 모스의 이야기다.


1997년에 태어난 나는 ‘이하준’이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제법 단란하고 친밀한 가족이다.


프랑스 가족과 한국 가족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찾는 게 더 빨랐다.

그렇게 다른 가족이었다.

그래도 눈곱만한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모든 가족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 있었다.


다만, 그 술의 주종이 와인이 아니라 소주라 문제였던 거지···.


와인을 물 마시듯 마시는 내게 다가온 희석식 소주의 국가는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차로 식사에 와인이 없다는 것에 놀랐고, 2차로 소주가 뒤지게 맛이 없다는 것에 놀랐다.

대체 부모님이 마시는 저 술은 뭐지? 하는 궁금증에 못 이겨, 7살 때 소주에 혀 한 번 대본 이후로 28살 먹은 지금까지 마셔본 건 손에 꼽는다.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제아무리 쿰쿰한 블루 치즈만큼 김치냉장고에 넣어놓고 깜빡해서 그만 묵은지가 되어버린 김치가 더 맛있어지고.

비프 부르기뇽보다 섞어 국밥과 깍두기 한 상에 더 감동한다고 해도, 차마··· 차마··· 와인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야, 와인은 내 인생이었고, 지난 생의 흔적이었으며,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28살까지 꿋꿋이 와인을 마셨다.


태어났을 적부터 고오급이던 입맛에 알맞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는 몇십만 원은 우스웠다.

와인 한 병을 사기 위해 일 년간 적금을 부은 적도 있다.


한국의 냉혹한 주세가 그렇다.


그렇다고 저렴한 와인을 마시자니 성에 차지 않고···.


맛있는 와인을 마시든, 맛없는 와인을 마시든, 와인을 마실 때면 나는 결핍을 느꼈다.


‘아, 다시 와인을 만들고 싶다.’


내 새끼라 예뻐 보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만든, 우리집이 만든 와인이 가장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생처럼 와인을 직접 만들고 싶었다.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와인을 만든다는 건 인생과도 같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쭉 와인과 함께였던 인생이라 그런지, 와인 없는 인생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내 형편에 도멘은커녕, 포도밭도 어렵지···.”


나에게는 땅도, 포도도, 양조장도 없었다.


‘이대로 평생 마시기나 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렇게 와인과 함께 살고 싶다는 꿈은 접고, 타성에 젖은 채 주류 수입 회사 사원으로 살아가던 중···


내게 웬, 150년 된 포도밭이 떨어졌다.



***



사건은 약 일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할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독자이신 아버지가 할아버지 유산을 정리할 때였다.


“웬 땅문서?”


낡고 낡은 땅문서 하나가 할아버지 유산 속에서 섞여 나왔다.


“처음 보는 건데··· 아버지가 땅이 있었나?”


아버지는 할아버지 수중에 땅이 있었는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갔다.

생각해 봐도 도무지 영, 기억이 나지 않자, 아버지가 내린 선택은-


“정 여사! 정 여사! 이리 좀 와 봐!”


그-나마 아버지보다 젊은 축에 드는 어머니께 물어보는 거였다.

설거지 그릇을 식기 세척기 안에 넣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름에 안방으로 향했다.


“아이고, 숨 넘어가겠네.”


그렇다. 정 여사는 충청도인이다.


여튼, 아버지 옆에 털썩 앉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이민 낡은 땅문서를 유심히 보았다.

뭔가 언뜻언뜻 생각나는 모양인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땅문서를 자세히 훑어보더니, 이내 무언가 알아낸 듯 무릎을 탁, 쳤다.


“할아버님! 할아버님 포도밭! 그거 땅문서 아냐?”


어머니에게 할아버님이면··· 증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포도밭이 있었다고?


나는 순간 눈을 번뜩이며 어머니 옆에 붙었다.


“증조할아버지 포도밭 하셨었어요?”

“응, 크게는 아니고. 가족이랑 지인 드실 만큼만 할 정도로 하셨다던데. 음- 500평 정도 되겠다.”


천 평대를 훌쩍 넘어가는 포도밭을 생각하면, 확실히 현저히 작은 크기다.


하지만··· 포도밭이다, 포도밭!

저 멀리서 빛 한 줄기가 나오는 듯했다.


“그 포도밭 아직도 있어요?”

“글쎄다. 하나 있는 증조할아버지 유산이니, 할아버지가 냉큼 팔았을 리는 없고. 왜?”

“저 그 포도밭 주시면 안 돼요?”

“이 포도밭을? 관리도 하나 안 되어있고, 투자 가치도 없는데?”

“네, 괜찮아요. 어차피 그 땅 팔아도 얼마 안 나올 텐데, 저 주시면 안 돼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얘가 또 뭘 잘못 처먹었나,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될 건 없지만···.”


아버지의 허락 아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냉큼 낡은 땅문서를 받아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해요!!”


스물여덟 먹고 이래도 되나 싶게, 아버지 어머니 뺨에 사이좋게 기쁨의 뽀뽀를 날렸다.


“다섯 살 때에도 못 받은 뽀뽀를 지금 받는 게 믿겨져요, 정 여사?”

“···내가 점심밥에 소주를 탔나.”


이하준의 부모님, 이 사장과 정 여사는 지금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직 온기가 서린 뺨만 매만졌다.



**



증조할아버지의 포도밭은 경북 영천 보현산에 위치했다.


공교롭게도 영천은 현재 국내 최대 와인 생산지로, 질 좋은 포도를 생산하기에 알맞은 떼루아(토양, 기후, 환경)를 가지고 있었다.


큰 일교차를 가지고 있었고, 태양은 강렬했으며, 강수량은 적었다.


또, 영천의 토양은 화산 토양과 배수가 빠른 모래 자갈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러모로 포도를 생산하기에 알맞았다.


할아버지의 포도밭은 보현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에서도 외딴곳에 위치해 있어,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만 했다.


차를 타고 오면서 상상했던 할아버지의 포도밭 모습이 있었다.


관리가 하나도 안 돼, 풀은 무성하고, 관리를 하지 않아 야생 머루마냥 얽히고설킨 포도나무들.


“흐흐, 흐, 흐흐···.”


그걸 관리할 생각에 절로 변태마냥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좌우간, 그런 아주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서울에서 영천까지 약 다섯 시간을 달려왔는데···.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로 너무나 관리가 잘 되다 못해, 본 로마네에서나 볼법한 그런 너무나도 완벽한 포도밭이 내 눈앞에 있었다.

더 말도 안 되는 건 표지판도, 울타리도 없는 포도밭이라는 거다.


‘설마, 할아버지가 파신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재차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던 그때.


“네놈 여기 어떻게 들어왔냐니까?”


염소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것도 말··· 이라는 것을 하면서.


‘와, 씨··· 영천 염소는 말도 하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입만 쩍 벌리고 염소(로 추정되는 것)을 응시했다.


“입 다물어. 목구멍에 파리 들어간다.”

“예?”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입을 헙, 다물었다.


“켁, 켁! ···켁!”


진짜 파리 들어간 줄은 몰랐지.


“네놈, 화평이 손자냐?”


이게 나와 디오니소스의 첫 만남이었다.


작가의말

이런 미친 날들이~ 네 하루가 되면 말야~


*


김규똘 인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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