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와인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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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똘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9.09 17:29
최근연재일 :
2024.09.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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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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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왜 여기서 나와

DUMMY

3화



‘저런 곳에 와인이 있을 리가··· 있네.’


환생도 했고 심지어 신이라는 남자도 만났지만, 안쪽이 바깥보다 더 큰 창고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정말로, 뒤집어지는 일의 연속이다.


“미친.”


분명 바깥 외부만 봤을 땐 60평은 될까? 싶은 창고였는데, 내부는 60평이라는 말이 우스울 만큼 컸다.


심지어 여기는 제 걱정이 우스울 정도로 온도, 습도, 환기, 공간 모두 완벽했다.


‘200평은 되려나. 아니, 더 될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저장고의 크기에 나는 마치 놀이동산을 마주한 어린애 같았다.


흔하게 쓰는 바리끄(와인 업계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225L 오크통)부터, 삐에스(부르고뉴에서 쓰는 228L 오크통), 현재는 잘 찾아볼 수 없는 헝가리의 곤치까지.


“여기에 다 와인이 담긴 거예요? 곤치도요?”


디오니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대화된 콘크리트 통과 스테인리스 통, 우리나라 와인 숙성에 많이 쓰이곤 하는 옹기까지.


“이거 설마 미즈나라(일본 자생 참나무 오크통)에 담으신 거예요?”

“신기하게 생긴 게 있어서 사봤어.”


미즈나라 캐스크 위스키는 세계 곳곳에서 프리미엄을 붙여 출시되곤 했지만, 미즈나라 오크통으로 만든 와인은 아직 일본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미즈나라는 비싸기도 했고, 나무 특성상 200년 수령은 되어야 오크통으로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프렌치 오크나 아메리칸 오크처럼 촘촘하고 단단하지가 못해, 원액이 잘 새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크통으로 만들어 술을 넣는 이유는 단 하나다.


미즈나라에서만 맡을 수 있는 독특한 향미 때문에.


이거, 완전 눈 돌아가네.


“그래도 뭐가 뭔지는 아는구나.”

“그럼요. 와인 만든다고 왔으면 지식은 기본 아닌가요.”

“기본, 좋네. 그런데 말이다, 책에서 달달 외운 이론과 실전은 다르지.”

“실전에도 자신 있습니다.”

“네가? 자신이 있다고? 근거는?”


그가 집요하게 물었을 때, 나는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19세기의 프랑스인 앙리 모스에게는 코트 드 뉘 지방에서도 손꼽히는 알짜 밭 ‘샹베르탱 클로 드 베즈’에 위치한 양조장, ‘도멘 데 모스’가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인 이하준에게는?


‘이하준’ 이름 석 자가 박힌, 신경와인 해외영업팀 사원증? 아니면, 해박한 양조 지식?


과거 외에는 근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내 이 땅을 돌아다니며 갖은 와인을 다 마셔봤지만, 여기서 와인을 만족스럽게 만드는 녀석은 한 놈도 못 봤다. 그런데 네가 와인에 자신이 있다고?”

“못 믿으시겠지만··· 네.”


이 사람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한 사람에게 이런 거짓말 같은 우연이 두 번씩이나 겹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환생에 디오니소스라니.

한 번만 있어도 가정이 뒤집어지고 나라가 뒤집어지고 세계가 뒤집, 여튼 뒤집어지는 일인데, 이게 내게는 두 번이나 찾아왔다.


‘사실 제가 환생을 했는데요. / 아, 그래? 너는 환생을 했구나. 그럼 나는 너의 실력을 믿는다. 우리 함께 와인을 만들자. / 우와아~’


이렇게 너무 쉽게 일이 이뤄지면··· 참 좋겠지만 그럴 리가 있을까.

거짓말 같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한 인간을, 저 신은 믿어주려나.


‘이야기나 한번 꺼내볼까. 하지만···.’


솔직히 두려운 건, 그가 믿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내 과거를 알고도 ‘제대로 된 와인 메이커로 인정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야, 주브레-샹베르탱에 있었던 도멘 데 모스는 현재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위에는 현재 초고가 와인을 자랑하는 ‘도멘 레 라메 던 앙주’만 남아있었으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 주제에 자신이 있다니, 솔직히 고깝구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너 같은 녀석들 못 본 줄 아나?”

“저기, 잠깐만!”


억울했다.

그래서 과거에 대해 토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저 오만하고 거만한 신은 나를 믿기는커녕, 말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끊어버렸다.


“평생을 만들어도 알 수 없는 게 와인이야.”

“······.”


맞는 말인데.


“개같이 몇 년을 고생해도 잃는 것만 있을 수 있는 게 와인이다.”


듣다 보니.


“며칠 깔짝대다 힘들다고 징징거릴 거면 당장 서울로 꺼-”


빡치잖아요.


“그것 하나 모르고 오지는 않았거든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이다, 새끼야.


“어디 감히 말을 끊-”


어쩌라고요. 너도 끊었잖아.


나는 그가 화내든 말든 내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기 옛날에 부르고뉴 코트 드 뉘 지방에 도멘 데 모스라고 있었어요. 아세요?”


웬 이상한 소리냐는 표정이다.


“갑자기 웬 옛날-”

“잠자코 제가 묻는 말에나 답해주세요.”


솔직히 화나고 빡치는 상황 아닌가.


지가 뭔데(신이긴 하다) 광산 이씨 삼대독자이자 이 사장과 정 여사의 소중한 아들인 나를 면전에서 무시하냐고.


툭 까놓고 얘기해서 이건 붓다도 예수도 알라도 ‘아 인정~! 빡쳐도 인정~ 쌉인정~’할 상황이다.


지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꺼지라 마라야?

고작 만난 지 한 시간 남짓 된 주제에.


그래서 일부러 격양된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아, 그 도박에 미쳐서 웬 이상한 놈한테 도멘 통째로 상납한 놈 말하는 거냐?”


예상치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고혈압으로 또 돌아가시게 생겼네.’


그래도, 침착하자.


지금은 저 오만한 신이 내 이야기를 듣는 척이라도 하고 있으니.


“도박으로 상납한 거 아니거든요?”

“뭐, 어쨌거나. 천사의 눈물인가, 돼지의 눈물인가, 거기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맛은 있었는데 말이지. 요즘도 종종-”


이러다 또 말이 길어지고 말 테다.


“제 이야기 듣기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조금은 되바라져도 저 그리스 박찬호의 입을 막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여튼,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대들면 솔직히 나를 어떻게 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포도밭에 파묻는다거나.


“프랑스 혁명 이후 도멘 데 모스가 꺾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불길한 와인’이라며 사람들이 기피하던 때가 있었죠.”


그런데, 그는 내내 깍듯하게 굴던 녀석이 대드는 게 당황스러웠는지,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 내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먹칠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든 모스 집안의 맛을 더 널리 퍼트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와인을 만들었어요.”


솔직히 내게는 아릿한 과거다.

꺼내보기에도 죄송스러운, 그런 과거.


“정말로 하루 종일 와인 생각만 했어요. 밤낮 할 것 없이 무식하게 포도밭에서, 양조장에서 살았어요. 그러다 차차 노력을 인정받을 때쯤, 누군가 제안을 하나 해오더라고요.”

“······.”

“파리에서 와인을 팔아주겠다고, 자기랑 사업하자고요. 자기랑 사업하면 궁에도 유통이 가능하다는데, 솔직히 어느 누가 그 제안에 안 넘어가겠어요? 돈도 돈이지만, 파리, 아니 프랑스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데.”


옛날 할아버지와 아버지 얘기를 꺼내니, 두 눈이 찡하게 저려왔다.


“파리에서 인정받는 건 제 꿈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할아버지랑 아버지 꿈이었단 말이에요···.”


아 씨, 말하다 울면 꼴사나운데.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서 계약했는데, 어느 순간 제 도멘이 통째로 넘어갔어요. 다 제 탓이죠, 다 제가 들떠서 계약서도 잘 못 읽은 탓.”

“그래서?”

“저는 이번에도 인생을 바쳐서 와인을 만들 거예요. 제 와인으로 라메 던 앙주를 꺾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앙리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디오니소스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났고, 나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떻게 양조장을 일궈냈는지 보았다. 한 번 환생한 이후에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할아버지, 아버지만 생각하면 죄송스러워 눈물이 났다.

한참을 고개만 푹 숙이고 소리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군대도 다녀온 녀석이 눈물은.”

“제가 울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니라-”


눈이 새빨개지도록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내내 조용하던 그가 대뜸 다가와 핀잔을 주었다.


서럽다. 우는 것까지 뭐라고 그러냐. 자기도 부모님 있으면서.

진짜 서러워서 더 눈물이 났다.


“다 큰 놈이 울지 말고, 고개 들어. 눈물 닦고.”


서럽지만 고개를 들었다.

내내 땅을 향해 있었던 고개를 들면 부르고뉴 잔을 든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마셔. 눈물 들어가면 짜다?”

“뭐예요, 이건.”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낸 후 그가 준 와인잔을 받아 들었다.


‘뭐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와인이나 마시고 뚝 그치라는 건가.’


와인의 색은 적갈빛으로 제법 오래된 빈티지인 듯했다. 빠르지만 섬세하게 잔을 흔들며 스월링을 하자, 노즈(와인의 향)가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남성미가 강하게 넘쳐 흐르지만, 층위가 섬세하게 쌓인 향이 코점막을 찔렀다.

마치 오래된 테일러샵에서 고급 수트를 갖춰 입은 신사가 떠오른다. 정확히는 겉보기에는 절제되었지만 그 안에 터질듯한 응어리를 응축한 남성이.


‘아···.’


부케와 아로마의 층위를 샅샅이 살피자, 뇌리에 익숙하고 아련한 기억이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맛을 보면 분명 다를 거다.


깊은 확신 속에 디오니소스가 준 의문의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신사의 향과 다르게 맛에서 터져 나오는 농염하고도 농밀한 맛은 원숙한 여성의 것이다. 입이 달라붙을 만큼 끈적끈적한 감칠맛과 블랙 체리의 농후함이 입안을 길게 맴돌았다.


맛을 보면 분명 다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지만 명백하게도


“이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리고 내가 갈고 닦아 벼려낸 모스의 맛이다.


작가의말

니가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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