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와인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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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똘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9.0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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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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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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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테이스팅? 묻고 더블로 가!

DUMMY

4화



“이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모스의 맛과 향이 났다.


주브레-샹베르탱 특유의 거친 남성성과 파워풀함이 느껴지면서도, 바이올렛, 삼나무, 가죽, 감초 등 복합적인 맛이 섬세하게 층위를 이루며 혀에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졸인 체리와 바닐라, 시나몬과 같은 온화한 맛이 첫 모금부터 마시고 난 뒤까지 얼얼하게 혀에 남아 있었다.

응축된 듯한 붉은 베리류와 바닐라, 시나몬의 맛과 여운은 도멘 데 모스 특유의 맛이기도 했다. 이는 같은 주브레-샹베르탱 밭을 공유하는 다른 도멘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차이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내 추억 속에,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도멘 데 모스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19세기에 사라졌으니, 어림잡아봐도 200년은 족히 되었을 테다.


흔히들 ‘와인은 묵으면 묵을수록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정보다. 와인은 보관 방법에 따라, 품종에 따라 장기 숙성이 가능해질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다.


도멘 데 모스가 위치했던 주브레-샹베르탱은 현재 9개의 특급 밭이 있는 곳이었다. 도멘 데 모스의 샹베르탱 클로 드 베즈도 당연히 9개의 특급 밭(그랑 크뤼) 중 하나였고.


와인은 쉽게 밭의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숙성 잠재력이 올라간다. 주브레-샹베르탱의 특급 밭, 즉 그랑 크뤼 등급의 밭에서 난 와인의 경우 최소 10년에서 25년 이후 숙성 후 즐긴다.


즉, 높은 질과 퀄리티로, 장기 숙성에 알맞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숙성에는 한계가 있다. 애초에 우리집 와인은 ‘소테른’이나, ‘토카이 아쑤’ 같이 당도 높은 귀부 와인(회색 곰팡이에 포도를 썩힌 후 말려 만든 디저트 와인)이 아니다.

소테른과 토카이 아쑤같은 귀부와인이라면 50년 이상도 기꺼이 숙성이 가능하고, 코트 도르 지방의 로마네 콩티도 1959년 빈티지가 굿 빈티지로 꼽히긴 하지만··· 그래도 200년은 무리다.


“불가능해.”


200년씩이나 묵었으면 분명 비싼 식초가 되었을 터.


‘다른 와인인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 미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맛은 분명 우리집 와인의 맛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응당 다른 건 몰라도 자기네 집 김치 맛은 알 듯, 나도 우리집 와인 맛은 기가 막히게 골라낼 수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내가 마시는 것을 바라보다, 시치미를 뚝 떼며 일시 정지된 내 잔에 그 혼자 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πρόποση!(건배!)”


건배는 무슨, 이제는 질리도록 캐물을 시간이다.


“···이거, 뭐예요?”


느긋하게 와인을 음미하다, 선심 쓰듯 내게 말을 툭툭 던졌다. 언제는 폭언을 막 퍼붓더니, 이제는 아주 콧대 높고 우아한 척 군다.

기분이 이랬다, 저랬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뭐긴,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이게요?”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이게 우리집 와인이라는 건데. 내가 죽고 다시 환생하기까지 200년가량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 와인은 맛과 향을 봤을 때, 딱 시음 적정기의 와인이었다. 그러니까, 최대로 잡아도 25년 정도 된 와인이라는 거다.


“제 집 장맛도 못 알아보는 놈인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불가능하잖아요. 200년은 지났을 텐데, 이런 맛과 향을 가졌다는 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주위에 ‘가능한’ 일들만 일어났던 건 아니다.

디오니소스를 만난 것도, 내부가 훨씬 큰 창고에 온 것도, 내가 환생한 것마저도, 툭 까놓고 보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나에게 이런 능력도 없으리라 생각했다면 좀 섭섭한데.”

“이런 능력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건 아닌데!”

“나에게는 정말 많은 능력이 있지만, 이 ‘보존’ 능력을 단연코 가장 요긴하게 쓰지. 그렇지 않아도 와인에 대해 좀 전에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네놈이 말을 끊었지 않았나.”

“보존 능력이면, 맛이 변질되지 않는 거예요? 위스키처럼?”


위스키와 와인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 한 가지만 뽑아본다면 단연코 ‘병 숙성’의 여부다.

40도 이상의 도수를 자랑하는 증류주인 위스키는 병입 후 따로 숙성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개봉 후 ‘에어링’이라는 공기 접촉 과정은 있다. 에어링을 통해 위스키는 향과 맛이 조금 더 정돈되고 부드러워진다.


반면, 와인은 양조 과정뿐만 아니라, 병입 후에도 숙성이 이루어진다. 빛, 온도, 습도, 시간, 열 등에 의해 와인은 산화와 환원 과정을 반복하며 맛의 층위를 더욱 높여간다.

와인에 ‘시음 적기’라는 말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 개인적으로 ‘이거 마실만 한데?’ 싶으면 대량으로 사거나, 오크통 하나를 통째로 사서 보존 능력을 걸어놓지.”

“시음 적기의 와인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겠네요.”

“그럼. 옛날부터 나 마시려고 사둔 와인은 모두 시음 적기 상태에 보존 능력을 걸어두었지.”


그 능력 참 부럽다, 생각하며 디오니소스가 준 소중한 도멘 데 모스를 조금씩 아껴 마셨다.


“그러면 여기 있는 양조통 전체가 그렇게 모으신 와인인가요?”


이게 다 사 모은 와인이라면 정말 대단한 거다. 이 맛과 향을 어렴풋이라도 다 알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지. 저 사이에 내가 만든 와인도 몇 개 섞여 있어.”


디오니소스는 아득하게 펼쳐진 양조장을 둘러보았다.


저 중 ‘디오니소스가 만든 와인이 있다’라···.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도 와인을 빚어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으니, 디오니소스가 와인 한 잔을 더 건넸다. 이번에는 투명한 녹빛과 레몬빛이 매력적인 화이트 와인이다.

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향을 맡고 한 모금 머금으니, 비강 가득 고소한 깨 향과 청량한 열대과일의 향이 진동했다.

그리고 코끝을 흔드는 강한 흰색 아카시아 꽃향기.


···아?


이 근래 마셨던 화이트 와인 중 단연코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흰색 아카시아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이자 좀 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우리 집에서 화이트 와인을 만든 건 개인적인 용도뿐인데?’


그것도 할아버지가 재미로, 주변 지인들한테만 나눴던 거였다. 그때는 비록 어렸을 때라 마시지는 못했지만, 코끝을 진동했던 화려한 향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 보니, 뭔가 많이 궁금한 듯한데? 누가 만든 와인인지 묻고 싶은 듯도 하고, 이 와인도 자네 집 와인인지 궁금한 듯도 하고.”


나는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일단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주자면, 이건 도멘 데 모스의 와인은 아니지만 맞기도 해. 자네 집에서 화이트 와인을 담았을 때 썼던 오크통을 썼으니까. 당연히 오크통에도 보존 능력을 걸었고.”


뜻하지 않게 지난 생의 흔적을 두 번이나 만났다.


정말로 있으면 있을수록 여기에 진득하게 붙어있어야겠다는 마음만 샘솟았다.


어렸을 적,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를 보았을 때 디오니소스의 인식은 ‘니가 뭔데 12신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제우스가 왜 최고신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현대인의 삼대 영양소는 알코올, 카페인, 니코틴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렇게 아카시아 꽃향기가···.”


솔직히 나는 매혹적인 향을 내뿜는 이 화이트 와인에 코를 박고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럼, 다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자면··· 이건 내가 만든 와인이야.”

“우리 밭 포도예요?”

“그래. 이건 여기서 난 포도로 만든 거야.


디오니소스는 은은하게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내게는 심히 부담스러운 미소였다.


그 있잖나, ‘할머니 김치 왜 이렇게 맛있어요?’ 하고 여쭈면 ‘내가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담가서 그래-’ 하는 할머니 같은 미소 느낌으로다가···.


솔직히 와인을 직접 만드는 디오니소스?

상상이 잘 안 갔는데, 역시 와인의 신, 술의 신이라, 이건가.


“네가 방금 마신 건 청수 품종이다.”

“정말, 맛있어요.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드라이하지만, 청량해서 마시기도 쉽고, 부케(와인 숙성 후 향)랑 아로마(포도 자체의 향)도 풍부하고요.”

“그럼, 누구 솜씨인데. 도수가 낮은 게 흠이지만.”

“도수가 낮은 게 흠이라고요? 이거 제가 요 근래 마셨던 화이트와인 중 가장 완벽한 와인인데?”

“아냐, 이건 어디 내놓기에도 민망한 와인이야.”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포도의 당도에 따라 좌우된다.


와인의 평균 도수인 11도에서 13도 정도가 되기 위해서는 당도가 24-26 브릭스는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보통 해외 양조용 포도들은 끈적일 만큼 당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국내산 포도의 당도는 12-15 브릭스 정도가 평균이다. 이렇게 포도의 당도가 낮다 보니,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양조장들은 도수를 높이기 위해 설탕을 첨가하는 ‘보당’ 작업을 따로 한다.


“이게 도수가 높았다면 분명 맛이 이것보다는 별로였을 거예요. 이건 이대로 두는 게 가장 완벽해요. 얘는 알코올 낮은 게 매력이라고요.”


보당 작업은 알코올을 올리는 데에는 좋지만, ‘저급 와인’이라는 편견을 받기에는 딱 좋은 작업이다.


실상은 그게 아닌데도 말이다.


사실 설탕은 샴페인의 1차, 2차 발효 작업에 쓰이기도 하고, 보르도, 부르고뉴에서도 (작황이 좋지 않은 해에 한해) 와인의 알코올을 올리기 위해서 쓰이기도 한다.


“아니, 이건 도수가 높은 게 매력적이야. 지금은 너무 맹숭맹숭하다고.”

“아니요, 지금이 딱 좋아요.”


의견이 충돌하자, 디오니소스는 본인의 쪼잔함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내 입맛을 무시하는 게냐?”

“허, 참. 제가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요?”

“내 의견에 지금 동의 안 했잖아?”

“아니, 그럴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뭘 그렇게 쪼잔하게 굴어요? 이해가 안 되네.”

“내 의견에 동의 안 한 놈은 네가 처음이야!”


명색이 신이라는 남자가 왜 저렇게 애처럼 구는지 알 수가 없다.


“본인 말이 다 맞을 거라는 뭐, 그런 생각 하고 있다면 오산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허, 뭐?”


디오니소스는 열쇠 꾸러미를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럼 이렇게 해.”

“뭘요?”

“뭐긴? 이 양조장의 소유권을 두고 내기를 하자는 거지.”


그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양조장 소유권이라니, 이 포도밭 이제 제 거 아녜요?!”

“‘포도밭’만 네 거지, 이 양조장은 내가 지은 거라고? 고로, 너는 내 허락 없이는 이 양조장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이거야.”


양조장 마음대로 쓸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이, 이··· 쫌생이!”

“그래서 내기 안 하겠다고?”

“내기 안 하겠다고는 말 안 했거든요? 그래서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건데요?”


디오니소스는 열쇠 꾸러미를 보란 듯 흔들다, 우드 슬랩으로 만든 너른 식탁 위에 열쇠 하나를 꾸러미에서 빼 놓았다.


‘저게 다 열쇠라고?’


생각도 잠시, 디오니소스가 말을 이었다.


“이걸 걸고 내기를 하는 거야. 내기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슬쩍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황동 열쇠가 미끈하게 빛났다.


“누구한테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시키자는 건데요?”

“누구긴? 뭐, 너도 친구나 직장 동료나 있을 거 아니냐? 혹시 없어?”

“저기요, 저도 사회생활 하거든요?”

“만약,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단 한 번이라도 ‘도수가 낮다’는 소리 비슷한 게 나오면 너는 이제 땡전 한 푼도 없이 포도 농사만 짓는 거지.”


작가의말

알코올 넘치는 연휴 되세요 ^^ 

제목을 <주신의 와인메이커>에서 <신들의 와인메이커>로 바꾸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제목 찾기 전까지는 종종 변동될 수 있을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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