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나니 천재 기사단장의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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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9.1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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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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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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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하다 (4)

DUMMY

약초꾼 줄리언이 마지막 약초를 찾아내기로 결심한 곳은, 레드 캐슬이라는 강가 근처의 작은 폐허였다.


혹한의 겨울은 무릎까지 오는 눈과 피까지 아려오는 강풍을 퍼부어댔지만, 줄리언에게는 그 또한 행운의 징조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약초는 날이 따뜻해지면 시들어버리니까. 지금처럼 살이 에릴듯한 혹한이 아니라면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목도리를 질끈 둘러멘 줄리언은, 마침내 높은 언덕에 다다라 레드 캐슬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우······.”


그것은 절로 섬찟함이 올라오는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저 폐허에 짙게 배어 있는 혈향 때문에.


레드 캐슬.


오십 년 전쯤 카린달 제국에 복속된 네르오스 왕국. 레드 캐슬은 그 왕국의 주 방어 요새이자 군사 요충지였다고 했었다.


제국의 ‘위대한 정벌’에 맞서 수많은 군대가 저곳에서 마지막 항쟁을 벌였지만, 전부 처참하게 박살이 났었댔지. 한 명의 병사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몰살당한 왕국은 버틸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마지막으로 네르오스 왕국은 멸망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뭐, 그것도 이제와서는 오십 년 전 일이지만.


어쨌건 전쟁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었고, 오십 년 전 전쟁의 피해자에게 애도를 표하기엔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력초가 자라기에 이만한 환경은 또 없지.”


피와 겨울, 그리고 시체. 죽은 자들의 원망이 안 깃들래야 안 깃들 수가 없는 장소다. 줄리언은 완벽한 장소를 찾아냈다는 기분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희귀한 약초들이 잔뜩 자라고 있을 게 틀림없다!


줄리언은 추위도 잊은 채 흥분하여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무너진 성벽과 가까워져 갈수록, 짙게 어린 원망과 서러움이 더 강하게 느껴져 온다.


그리고 마침내. 폐허의 입구에 도달한 줄리언은.


“이야···. 마력 냄새가 장난이 아닌데.”


곳곳에서 느껴지는 마력초의 쓰라린 향에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의 입꼬리는 더할 나위 없이 올라가 있었지만.


양팔을 걷어붙인 줄리언은 터벅터벅 폐허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 녹이 슨 채 바닥에 널브러진 철제 무기들과 이끼가 낀 석벽. 그 틈새에 하나둘 자라 있는 검붉은 색의 마력초들까지.


어딜 가도 못 볼 광경에 눈이 돌아간 줄리언은 바닥을 샅샅이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폐허를 쏘다니기를 몇 분째.



“으음? 누구인가, 자네는?”


“흐어억···! 사, 사람이다?!”


줄리언은, 석벽에 기대어 낮잠을 자던 한 노인을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베르··· 뭐요?”


“베르 켈버트. 그게 내 이름이라네.”


“어··· 이름이 굉장히 특이하시네요.”


“카린달 사람들에게는 그럴만하지. 어차피 기억할 필요 없는 이름이니 편하게 부르게.”


줄리언은 어깨를 으쓱하는 눈앞의 노인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외관만 봐서는 예순도 훌쩍 넘기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줄리언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그 노인이 입고 있는 옷차림이었다.


숙련된 약초꾼인 자신조차 꽁꽁 싸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유례없는 혹한. 이 가운데서 노인은, 얇고 헤진 무명옷 한 벌에 허리춤엔 검 한 자루만을 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추워하는 기색 하나 없다니.


“그런데, 어르신은 대체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여기서 한참은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저요? 저는 약초꾼입니다. 약초를 찾으러 왔지요.”


“나도 비슷하다네. 나도 무언가를 찾으러 왔지. 약초가 아니라··· 기억이기는 하지만.”


기억? 줄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겁니까?”


노인의 외관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긴 했다. 예순만 되어도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아니던가.


그러나 노인은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굉장히 버릇이 없구만. 나는 아주 멀쩡하다네. 단지 이 땅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이 땅의 기억이 떠오르거든. 아주 괴로운 기억들이.”


여유로운 노인의 대꾸를 들으며 줄리언은 더더욱 의구심에 빠져 들었다.


지금 저 사람이 마력의 기억을 읽는다는 말을 하는걸까? 땅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은 분명 그런 뜻이겠지?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마력의 기억을 읽는다. 그건 마력 제어 능력이 극에 달한 천재들만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카린달 제국의 검성이나 마탑주들만이 할 수 있는 경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이 폐허에서 만난 괴팍한 이름의 노인이 할 수 있다고?


줄리언이 상념에 잠겨있는 와중, 노인은 다시 천천히 석벽에 기대어 앉았다. 허리춤의 낡은 검을 지팡이 삼아서.


“그나저나. 약초를 찾으러 온 자네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자네는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테야. 이곳에서 마력초를 찾는 건 그다지 현명하지 않거든.”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여기 마력초가 이렇게 널려 있는데.”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음······.”


노인은 줄리언을 보며 난감하다는 듯 턱을 긁었다. 마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는 듯.


──그리고 그 순간.



크워어어어어어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폐허의 저쪽 편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날아 올랐다.


귓가를 찢어버릴 듯한 굉음과 함께. 겨울바람보다도 더 세차게 흩날리는 바람을 일으키며.


“···아. 마침 일어났군. 저것 때문이라네.”


“저, 저거······!”


줄리언은 눈앞에 보이는 그 생명체에 더할 나위 없이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그 생명체.


줄리언을 폐허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대한 덩치를 보며,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용.


그 검고 위대한 생물이, 고아하게 울부짖으며 하늘로 비산했다.


“내 낮잠 친구지. 낯선 인간의 냄새가 나 깨어난 모양이야.”


“뭐, 뭐요?!”


이십몇 년을 약초꾼으로 살아온 줄리언이지만, 지금보다 더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다. 폭설이 내리는 구름마저 가리운 채 그것은 줄리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로로 번뜩이는 그것의 금빛 눈동자. 줄리언은 용은커녕 여자의 시선에 담긴 의미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남자이지만, 지금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폐허의 주인은, 자신의 잠을 깨운 불청객이 결코 반갑지 않다는 것.


“어, 어르신! 이거 어떻게 합니까?!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하아··· 이것 참.”


노인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줄리언을 보며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줄리언을 내려다보다, 용을 올려다보고, 다시 줄리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 뭐···. 내 친구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오랜만에 만난 인간을 죽게 놔두면 내 꿈자리가 영 사납긴 할 테지.”


그리 읊조리며.


노인은 자신의 검집에서 낡은 검을 한 자루 뽑아 들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게. 카린달의 청년.”




*




줄리언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곤.


그것도 이런 장소에서, 이런 사람에 의해 보게 될 것이라고는 평생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줄리언은 제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낡은 칼에 서려 있는 저것.


저것은 분명 검기였으니까.


이가 다 나가 나무나 벨 수 있을까 싶은 노인의 칼에는, 명백하고도 짙은 검기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 보랏빛을 토해내는 그 새까만 검기는,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한 형상으로 일그러져 타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노인은 느긋하게 검을 휘둘렀다.


종으로. 위에서 아래로.


조각난 세계가, 비명을 내질렀다.




*




용이 고통을 느끼는 장면은 뭐랄까. 실로 끔찍하다고까지 해야 할 장면이었다.


끔찍한 고성을 내지르며 허공을 강타하는 그것의 날갯짓은, 줄리언에게 존재론적인 공포마저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검붉은 피가 후두둑 흘러내리는 오른쪽 날갯죽지.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이제껏과 같은 여유로운 눈으로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미안하게 됐네. 이 친구는 내가 금방 치울 테니 화 좀 가라앉히라고. 다른데 가서 배나 채우고 오는 게 어떻겠나.”


-크르르······.


“알았다니까. 내 돌아오면 제대로 사과합세.”


지금 대화를 하는 건가?


용과?


줄리언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갔지만, 놀랍게도 노인의 대화는 효과가 있어 보였다.


금방 불이라도 뿜을 듯 으르렁대던 그것이, 이내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으니까.


하늘에 짙게 드리웠던 그림자가 걷어지는 것을 보며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괜찮은가?”


“······네? 아, 넵. 저는 멀쩡합니다. 그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아.”


노인은 낡은 칼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를 짙게 아우르던 시꺼먼 검기는 어느샌가 완전히 사그라든 채였다.


“자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세나. 이대로 돌아가다가 저 친구의 눈에라도 띄면 밟혀 죽을 테니.”


줄리언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자, 한 잔 마시게나.”


“···가, 감사합니다.”


폐허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나무집.


줄리언은 노인이 건넨 찻잔을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는 차가워진 몸을 녹이는 데 충분했다.


근육이 누그러지는 기분 좋은 감각.


줄리언은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재차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벽 한쪽에 낡은 검을 세워둔 채 차를 홀짝이고 있는 그.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줄리언은 조금 전 있었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검기.


제국의 기사들조차도 아무나 사용할 수는 없다는 힘. 나이불문 저 검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검재(劍才)를 지녔다고 인정받는다.


‘그런데 그런 힘이··· 저 어르신의 낡은 검에서 피어올랐다는 것 아니야.’


그것도 엄청 짙고 선명하게. 용의 몸에 상처를 낼 정도로.


검에 대해 잘 모르는 그라지만, 저 정도의 힘이 흔하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용에 홀로 맞서는 건 검성님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 저 노인이 위대한 검성님과 비슷한 수준을 지녔다는 것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우는 그 검성님과?


“혹시 어르신은 제국의 은퇴한 기사님이라도 되시는 겁니까?”


“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는 노인.


줄리언은 제 의구심을 꺼내 들기로 결심했다.


“검기를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힘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추위에 이리 가볍게 입고 계시는 것도······. 그 재주 좋은 마법사들도 추위와 더위는 느낀다지 않습니까.”


“···아.”


노인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오해할 수는 있겠다만, 나는 제국의 기사 같은 게 아니라네. 그런 명예로운 직위로 보기에는 자네도 내 검기 색을 보지 않았던가.”


검기 색.


줄리언은 조금 점 노인의 검기에서 보였던 색을 떠올렸다.


기사들의 검기 색은 그 기사의 영혼을 대변한다고도 한다. 불처럼 뜨거운 용맹함과 도전 정신을 지닌 기사는 붉은 검기를. 선하고 영예로운 검성님과 같은 기사는 새하얀 검기를. 위대하신 황제 폐하는 황금색 검기를 지닌다고 했었지.


그리고 확실히, 노인의 검기는 조금 달랐다.


그 어떤 밤보다도 짙은 검은색. 그 안에서 흉포하게 일그러진 보랏빛.


노인의 검기는, 영예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색이었으니까.


“그럼 어르신께서는 대체··· 뭘 하시는 분이셨던 겁니까.”


“글쎄.”


노인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이켰다.


“그냥 늙은 노인이라네. 이제와 다른 수식어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


“그냥··· 노인이요? 그런 힘을 가지셔놓고?”


“그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내 힘은 깨어났으니까. 지금 같은 날씨에, 홀로 눈길을 헤매다 우연히 깨어난 힘이지.”


노인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자조가 어려 있었다.


“내가 실은 천재였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린 거라네. 물론 그것도 내 탓이겠지. 검기를 발하려면 목숨을 내건 싸움이 필요하지만, 나는 그전까지 한 번도 그래본 일이 없었거든.”


천재적인 화가도 펜을 잡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검성의 재능을 타고난 이도, 일평생 검을 멀리하며 살아왔다면 자신의 능력을 모를 수밖에 없다.


줄리언은 노인에 대해 더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굴까.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 정도 되는 힘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혹시 제국의 적국 소속이라거나 그런 건···.”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줄리언을 보며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거기서 그 생각이 떠오르다니. 자네 굉장히 애국심이 넘치는 편이로군?”


“아닙니까?”


“아니라네. 나는 이대로 변변찮게 살다 변변찮게 늙어 죽을 예정의 인간이야. 저 칼은 닭 잡는 데나 종종 쓸 뿐이지.”


“하지만··· 어르신 정도나 되시는 실력자가 이렇게 사시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줄리언은 진정 노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는 저 힘을 절반이라도, 일 할이라도 얻기 위해서 평생을 쏟아붓는데. 늙었다고는 한들 용과 단신으로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적국 소속이 아니라면 함께 제국 본령으로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제가 기사단에 연줄이 있어 어르신을 소개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전장에 서지 않으시더라도 그 검기의 요령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됐다니까.”


그러나, 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앞으로 살면서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다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째서입니까.”


노인은 줄리언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나는 껍데기니까.”


껍데기?


고개를 갸웃하는 줄리언에게 노인이 말을 이었다.


“영혼을 잃었다는 거지. 내 영혼은 저 레드 캐슬 폐허 어딘가에 묻혀 있다네. 아주 오래전에 묻혀 버려서, 지금의 나는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어. 그리고 그런 껍데기는··· 살아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지.”


“그게 무슨······.”


줄리언은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과거를 후회하시는 겁니까?”


“하. 후회라. 그렇다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는 사실 최선을 다해 살았다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죽는 법을 몰랐지. 그것이 후회라면 후회라고 해야 할까.”


줄리언은 노인의 눈에서 약간의 씁쓸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후회가 드러나는 종류의 씁쓸함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그 나이의 노인들에게서 으레 보이는, 과거를 그리는 씁쓸함에 가까웠다. 아름다웠던 어떠한 시점을 그리는. 후련하면서도 담백한 씁쓸함.


그것은 후회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단지 겨울이 봄을 그릴 뿐인 것이다.


줄리언은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손에 찻잔을 들고 있는데도 그랬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라네. 내 삶은 그것만을 외면하기 위한 여정이었건만, 이 나이가 되어 죽음이 다가오니 이제야 깨닫게 되더군.”


오랜 세월을 괴로워하며 살아온 결과 마침내 발치까지 다가온 죽음은,


생각보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봄바람 같달까. 흐흐흐. 살랑거리지.”


노인은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고. 남아있는 것은 껍데기일 뿐이라고.


그래서일까.


그래서 저 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천재만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다. 영웅보다 죽음이 안타까운 이는 없다.


하지만 저 노인은 그 둘 다 아니기에.


둘 다 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기에.


그래서 저 노인에겐, 어느샌가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일까.


줄리언은 입을 열었다. 더는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어르신께서는 과거에 정말 많은 것을 두고 오셨나 봅니다.”


“음? 그래, 그렇지.”


노인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네. 그때는 돌아보는 법을 몰라서. 이제와 뒤를 돌아보니, 도통 멀리 왔는지 캄캄해 보이지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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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귀하다 (完) 24.09.11 5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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