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앰흑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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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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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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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검은 머리 김치만 (4)

DUMMY

와락!


판사는 나를 반 강제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하더니, 와락 끌어 안았다. 어이쿠! 나는 밀려오는 허리 통증에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간신히 혓바닥을 붙들어 매는 데 성공했다.


“제기랄! 완전히 죽는 줄 알았지 뭔가! 우리 할아버지도 나만큼 뚱뚱하셨는데, 식사를 하시다가 감자가 목에 걸려 돌아가셨다지? 방금 주마등처럼 그 이야기가 스쳐 지나가더군. 아마 우리 집안 내력인 모양이야! 하하하하!!”

“아··· 다행입니다?”


이런 감사를 받아 본 적이 없어, 나는 좀 얼떨떨하게 있다가 불쑥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판사는 와하하 웃더니 내 등짝을 퍽퍽 두드렸다.


“다행이지, 다행이고말고! 우리 집안 사내들이 하나씩은 꼭 뭘 먹다가 죽었다는데, 그게 내가 아니라서 말이야! 으하하하하!!”

“아이고, 태프트 판사님.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굽실거리는 보안관은 휴우, 한숨을 크게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늘 ‘판사님’이라고만 지칭해서 사실 이름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태프트였나? 어디서 들어본 듯 한데?

아무튼 태프트 판사는 내 덕에 살았다고 연신 칭찬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건가?”

“예? 뭐 말씀이십니까?”

“그으, 뒤에서 날 잡고 배를 마구 잡아당겼던 것 같은데··· 아직 정신이 없어서 말일세. 허허.”


아, 하임리히법 말인가? 이 시대에는 그게 없었나?


내가 대답하려는 찰나, 딤스데일 목사가 오오 하는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감탄했다.


“오··· 설마, 동양에서 전해진 비법 같은 건가?”

“···예?”

“아, 판사님. 이 녀석은 아버지가 저어, 중국 근처에서 온 아시안입니다. 어머니 쪽이 흑인인, 말하자면 물라토(mulatto)지요.”

“그런가? 어쩐지 일반적인 흑인들하고는 조금 다르게 생겼더라니. 아무튼 그 동양의 비법, 고맙네. 어떻게 하는지 좀 가르쳐줄 수 있겠나?”


???


어··· 갑자기 자기네 맘대로 하임리히법을 ‘질식하는 사람을 구출해 내는 동양의 신비한 비법’ 따위로 둔갑시켜 버렸다.


굳이 거기다가 ‘아, 그건 하임리히라는 사람이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만들어낸 응급조치법인데요―’ 라고 초를 치기도 애매해서 나는 그냥 하임리히법을 설명해 주고 말았다.


“명치와 배꼽 사이에 두 주먹을 이렇게··· 마주 잡고 위로 당기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기도가 폐쇄되었을 때 목에 걸린 이물질을 빼낼 수 있습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호오··· 흥미롭군.”

“아, 그리고 영유아의 경우 이렇게 뒤집어 엎고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잡은 다음···.”


기본 소생술정도야 한두 번 보면 따라할 수 있으니 가르쳐주는 게 어려울 것도 없다. 진짜 CPR로 간다면야 BLS(basic life saving, 기본소생술) 과 ACLS(advanced cardiovascular life saving, 전문 심장소생술)같은 게 있다만 에피네프린 같은 약물이나, 제세동기도 없으니 가르쳐줄 필요도, 가르친다고 따라할 수도 없고.


판사와 목사, 보안관 등은 흥미롭게 날 바라보다가 이게 끝이라고 하자 짝, 짝 박수를 쳤다.


최소한 동물원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는 걸 보면서 치는 박수는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감명을 받은 태도.


“체계적이로군. 그냥 어설픈 민간요법이나, 얼치기 돌팔이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더구만. 어디서 배우기라도 했나? 자네 부친에게?”

“아,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집안에 비법으로 내려오는 의학서적들을 탐독한 바 있습니다.”

“호오··· 대단하구만. 그쪽 글을 배웠어서 읽는 속도나 문해력 수준이 그렇게 높았던 거로군.”


이제야 ‘비밀’을 깨달았다는 듯 판사는 턱을 매만지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자네, 뭐 바라는 거 없나? 이렇게 구해준 데 대한 보답일세. 내가 그래도 제법 해줄 수 있는 게 많을 거야.”

“···!!!”


두근. 가슴이 뛴다.

혹시나 가능할까 싶어 나는 저어하다가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그··· 의과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 뭐, 뭐라고?”


경악은 판사가 아니라, 딤스데일 목사와 사라 아주머니한테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불길한 고구마 파이는 한쪽으로 치워둔 채로 다시 도란도란 식사를 이어가다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의, 의사? 깜둥이가?”

“흐음··· 의대에 가고 싶다고? 자네, 원래 의학에 관심이 많았나? 이런 처치도 알고 있는걸 보면 그런 것 같네만.”

“예, 그렇습니다.”


관심이 많은 수준이 아니라 원래 전생엔 의사였다.


하지만 꼭 그래서 의대에 가겠다는 건 아니다. 사실 내가 가진 지식은, 어디서든 써먹을 수 있다. 의학은 오히려 제약조건이 너무 많은 편이다. 현대의 의학은 발전한 제약이나 진단기술 없이는 성립할 수가 없으니까.


페니실린이나 설파제, 마크롤라이드 같은 항생제가 어떤 질병을 치료한다고 알면 뭐하나? 그걸 만들 수가 없는데! CT도, MRI도, 하다못해 하찮은 혈액검사도 거의 불가능하다.

이 인간들이 적혈구가 뭔지는 알긴 하려나?


오히려 의대, 의사 면허의 가치는 다른 데 있다.


“으음··· 정말, 그게 꼭 소원인가?”

“그, 그렇습니다. 판사님!”


깜둥이가 교육을 받는다?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남부에선 아예 법으로 금지까지 때려버렸고.


하지만 ‘놀라운 기술로 사람을 살린’ 깜둥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것도 판사님을 살렸다면. 태프트 판사가 원래 나를 알고, 어느 정도 호감이 있기도 했다지만 의대에 가고 싶다는 말에 고민할 정도니.


깜둥이 주제에 어디 화학과나 공대를 가서 새로운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면 뭐 할 건가? 말 그대로 몰매 맞고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하지만 ‘깜둥이지만 놀라운 의학 기술과 실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린’ 의사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외로, 보안관이 내 편을 거들어 주었다.


“흐음, 깜둥이 의사도 필요할 수 있지요. 깜둥이들이 병에 걸리면 그걸 치료할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는 각자 본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딤스데일 목사도 그 이야길 듣자 또 납득한 듯했다.

‘슈퍼―고지능 깜둥이를, 주님께서 조금 못난 자식들을 돌보는 의사로 키우려 하신 건가?’라고 생각하는지 눈알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어쩌면, 소명이 주어진 걸지도 모르겠군요.”

“좋아! 알겠네.”


고심하던 태프트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휙휙 뭐라고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자네 이름이 뭐랬지?”

“예! 제 풀네임은 치만 사이먼 롤리랄라 킴입니다!”

“치··· 뭐? C. Simon R. Kim··· 맞지?”

“예, 맞습니다.”


판사는 그동안 내 풀네임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만, 뚱뚱한 손으로 끙끙대면서 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만년필로 이름을 적는 듯했다.


안경을 꺼내 쓰고, 평소의 심드렁하고 만사가 귀찮은데 먹을 때만 즐거운 바보 아저씨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 샤프해 보이기까지 한 눈빛이 된 그는 잠시 딤스데일 목사를 붙잡고 귀엣말을 했다.


“···잠시 서재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예? 아, 그, 그러시지요.”

“고맙습니다.”


어이쿠, 어이구··· 아직도 좀 숨이 가쁜지, 태프트 판사는 백 킬로그램은 가볍게 넘을 체구를 일으켜 뒤뚱뒤뚱 서재로 향했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따라오라는 그의 뒤로, 신기해하는 목사와 보안관, 그리고 사라 아주머니의 시선이 꽂혔다.


서재의 두꺼운 나무 문을 닫고, 목사의 안락의자에 앉으려다가 엉덩이 사이즈가 너무 커서 못 앉고 어정대던 태프트 판사는 두 명은 족히 앉을 듯한 응접용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죽다 살았군. 진심으로, 고맙네.”

“아, 아닙니다. 판사님!! 제가 영광입니다!!”

“좋은 마음가짐일세. 난 자넬 오래 봐 왔지. 자넨 참 명석한 사람이야. 내 예일대 동기나 선후배들 중에서도 자네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지.”

“···감사합니다.”


···그래. 그럴 거다.


스무 살, 전성기의 육체와 두뇌에 담긴 반백 년의 경험과 지식. 백수십 년은 앞선 방식으로 단련된 지적 능력이 어찌 19세기인들에 비해 열등할까?


물론 현대인이 모두 천재는 아니다만, 나는 우수했다. 예일대? 하버드대? 한국의 가장 재능있고 뛰어난 학생들이 그들에 비해 정말로 능력이 없었겠는가?


그저 환경이 받쳐주지 못했을 뿐이지. 그제나, 지금의 나처럼.


“그래서, 의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뭔가? 자네 정도로 좋은 머리라면 법률가나, 사업가를 할 수도 있을 거고 학자가 될 수도 있을 텐데.”

“···! 그런 말씀을 해주신 분은 판사님이 처음입니다.”

“흠···.”


태프트 판사는 흘긋, 주변을 둘러본 후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백 년 후에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겠지만 아직은 덜 떨어진 변방에 불과하다. 대영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고,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조차 다 석권하지 못한 변두리 2류 국가에 불과하니.


그리고 이 변두리 사람들의 인식에 흑인이 교육을 받는다? 대학에 가고 학자가 된다?


언감생심도 그런 언감생심이 없다.


판사는 내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아는 듯했다. 그는 지역 유지면서도, 정치에 관심이 있어 사람들이 무어라고 떠드는지 시치미 뚝 떼면서도 생각 외로 잘 알고 있었으니. 뚱뚱한 뱃속에 구렁이 몇 마리쯤은 숨겨 둔 늙은 너구리다.


“어찌 되었건. 굳이 의사인 이유는 무엇인가?”

“···보람 있지 않습니까?”

“아.”

“딤스데일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소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남을 도울 방법이 있다면 그걸 실천하는 게 맞다 생각합니다. 아까 판사님의 경우도 그렇고.”


태프트 판사는 콧수염을 까딱거리다가 매만진 이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들을 돕고 싶단 말인가?”

“예. 가장 직관적인 도움은, 아마도 의학이 아니겠습니까?”

“···자네만큼의 긍휼함을, 이 땅의 의사들이 가지고 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 했나?”


그렇게 말하고, 태프트 판사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곤, 서재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이 얼마 전 죽었네. 알폰스 주니어가. 흔한 일이지. 그전엔 딸이 한 달도 못 되어 죽었거든.”

“아··· 그, 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네 같은 뛰어난 의사가 있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모르겠군.”


그렇게 이야기하는 판사의 눈에는 언뜻 눈물 비슷한 게 맺히는 듯 하였다. 하지만 능숙한 중년답게 금방 털어내버린 그는 입매를 비뚜름하게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만약, 의대에 갈 수 있다면 자넨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거라 자신하나?”

“···예!”

“좋아! 흠 잡을 데 없는 대답이군. 라틴어나, 수학은 좀 할 줄 아는가?”

“수학은 잘 합니다! 라틴어는···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푸둥푸둥한 턱살이 떨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거 참! 대단하구만! 배움의 기회만 달라, 어떻게든 하면 된다! 그런 말인 게지? 좋아!! 내가 방법을 찾아 주도록 하지!”

“!!!”


호탕하게 웃어재낀 그가, 내 등을 두드리곤 성큼성큼 걸어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나는 제자리에서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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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01. 검은 머리 김치만 (6) +1 24.09.14 339 25 12쪽
6 001. 검은 머리 김치만 (5) +6 24.09.13 356 28 11쪽
» 001. 검은 머리 김치만 (4) +6 24.09.12 390 29 12쪽
4 001. 검은 머리 김치만 (3) +2 24.09.11 414 28 13쪽
3 001. 검은 머리 김치만 (2) +1 24.09.11 393 28 15쪽
2 001. 검은 머리 김치만 (1) +3 24.09.11 494 2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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