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앰흑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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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9.1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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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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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2)

DUMMY

피르호 교수가 던진 돌덩이로 인한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자넬 위해서였네. 부디 날 너무 쓰레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게나.”


평소와 달리, 씁쓸한 표정으로 앉아 맥주를 들이켠 피르호 교수는 자괴감이 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독일어로 중얼거리는 단어들은, 아마 입에 배인 고향의 욕설일 테다.

샤이쓰(Scheiße)? 욕에 쌍시옷 발음이 들어가는 건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인 듯하다.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이 저를 위해 그러셨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나는 교수님을 달랬다. 흑인 노예들에게 새로운 기법을 실험해 보자는 소리는, 다른 경우였다면 '꾸짖을 갈! 미친 레이씨스트 새끼야!!' 라고 했겠지만 이 방법은 확실히 더 좋은, 우월한 방법이란 걸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나를 제외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런 걸 경멸할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자기들도 궁금하기는 하니 냉큼 찬성하는 걸 보라지!”

“···참, 저도 다른 교수님들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런 인간들일 줄은 몰랐는데.”


개틀링 선배도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소독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는데 정확히 검증할 방법을 못 찾아 그냥 살았던 듯 했다.


이 시대보다 조금 전, 오스트리아의 의사 제멜바이스―한국에서는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이름이지만―는 산욕열 예방을 위해 손 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미치광이로 몰렸다고 한다.


실제 병동에서 환자를 두 분류로 나누어 한쪽은 소독법을, 한쪽은 기존 치료법을 사용했는데 소독법을 사용한 쪽의 사망률이 급감하자 동료들이 그를 미치광이로 몰았다고 한다.


의사들이 그동안 ‘사소한’ 과실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게 되면, 의사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에 비하면 ‘진실’의 무게는 가벼웠다.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자네 잘못은 절대 아냐. 자네는 저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나? 칼을 만드는 자는 죄가 없네. 그걸 휘두르는 강도들이 문제지.”


피르호 교수는 이제 소독법의 성공을 전적으로 믿는 듯 했다. 오히려 그게 성공했을 때의 후과를 더 두려워할 정도로.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네. 미스터 킴의 말대로 그동안 잘못된 관습으로 사람을 죽여 왔단 걸 의사들이 대중에게 알리고 싶겠나? 유색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성공했을 때 다른 변명이 생기겠지. 유색인이라 그렇다고.”


동양인, 흑인 따위는 ‘다른 동물’이라 소독법이 먹히고 백인은 아닐 거다―는 참으로 편리한 변명이 될 수 있었다. 진실은 퍼지면 결국 힘을 발휘할 테지만, 그 전에 직접적인 린치나 박해로부터 잠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해주는 변명.


그리고 어떤 산모가 선뜻 제 몸을 새로운 실험적인 기법에 제공하겠는가! 아무리 떠들어 봐야 멱살이나 안 잡히면 다행이다.


노예주인들에게 몇 푼 쥐어주고 잠시 ‘빌릴’ 수 있는 노예 임산부들과는 다르다.


“사이먼! 이건 정말로 효과가 있다고 네가 말했잖아. 오히려 이 방법을 먼저 적용받는게 더 안전하고 유익한 거지!”


무슨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광기 넘치는 인체실험이 아니라 이미 -미래엔- 검증된 멸균소독일 뿐이다. 아무 해가 없으니, 차라리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대조군이 될 나머지에겐? 어쨌든 기존 방식대로 출산을 했을 테니 다를 게 없다.


허나 이렇게 변명같은 소릴 늘어놓는 건 다들 양심에 찔려서였다. 다른 교수들은 희희낙락하며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만삭의 노예를 구해보겠다며 각자 흩어졌다.


우리는 그 모습에 솔직히, 혐오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


그래서 침묵이 흐른다. 이게 덜 검증되고 더 해로운 실험이었어도 저들은 노예를 구해 와서 해보았을 거다.


“어떻게 똑같은 인간이라 치료법을 실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때엔 그리 가혹할 수 있는지, 난 모르겠군.”

“···저희 집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습니다만, 가끔 보면 도무지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계몽주의적 열정에 불타는 피르호 교수나, 아니면 지극한 호인(好人)으로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개틀링 선배는 한숨을 쉬며 맥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내겐 너무나 익숙했다. 인간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에게 상상도 못할 잔혹성을 보이곤 한다.

19세기 미국 밑바닥에서 20년 동안, 그리고 21세기 한국 밑바닥에서 30년 동안 본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

나는 맥주를 들이켠 뒤 말했다.


“일단 저희가 하는 일이, 최소한 억압받는 제 동족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겠죠! 자! 자! 두 분 다 기운 차리십쇼!”


야만과 억압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인간이 모두 평등하단 진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남북전쟁이 터지면 ‘기독교 문명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노예제를 고수하던 미국까지도 노예제를 포기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차별과 박해는 존재하겠지만, 최소한 지금 수준은 아니리라.


하지만 대체 남북전쟁은 언제 터지는 걸까? 남북전쟁, 링컨 암살 같은 역사의 변곡점들이 구체적으로 몇 년도에 터지는 지를 모르니, 말은 거창하게 했어도 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머리속에 있는 의학, 과학 지식들은 충분하다.


‘당장 아스피린과 소독약만 만들어다 팔아도 웬만한 걸 다 해볼 자본금을 마련할 수 있을 텐데···.’


그뿐인가? 아직 다이너마이트도 없는 시대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있는 듯하다만, 피르호 교수님이 기겁을 하는 걸 보면 노벨의 시대는 아직 좀 남았다.


그럼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시키고 탄산나트륨을 가해서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팔면 떼돈을 벌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로 유럽 최대의 부자가 됐었다는데, 나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그렇게 번 돈으로 다시 또 뭘 해볼 수 있을까? 일단 내가 가장 잘 아는 분야는 의학과 화학이다. 당장 떠오르는 건 하버―보슈법을 통한 암모니아 합성, 페니실린과 설파제, 분별증류탑을 이용한 석유의 정제, 강철의 산업적 생산···.


내가 이 시대에 풀어놓을 수 있는 ‘발명품’들은 차고 넘친다. 단지, 시대가 문제일 뿐이지. 나 같은 끔찍한 혼종에게는 더더욱.


남북전쟁이라는 대사건에 앞서 다이너마이트와 무선 전신 같은 ‘최첨단’ 기술이 전해진다면 전쟁을 압살할 수도 있을 거다. 아, 이 시대에 기관총은 있던가?


···잠깐만, 기관총?


“저들의 위선을 낱낱이 알릴 무언가, 예컨대 팜플렛이라던가가 필요···.”

“개틀링 선배, 혹시···?”

“엥? 사이먼? 무슨 소릴 하려고?”


개틀링, 개틀링··· 내가 아는 이 시대의 과학자나 유명한 의사 이름 중에는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더라니···? 의학서에서 몇 번쯤 본 피르호라는 이름하고는 조금 다른 식으로 기억을 자극하던데···.


“···혹시 총 만들 줄 알아요??”

“총? 이봐, 사이먼. 그··· 분노한 건 알겠지만, 교수들한테 찾아가서 총질을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거 같은데···.”

“선배. 내 말 잘 들어요. 발명에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면서 개틀링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르호 교수는 또 무슨 소릴 얘들이 하려나 싶어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한 사람이 백 명처럼 싸울 수 있게 만들어지는 총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전쟁이 조금 덜 끔찍해지려나? 어쨌든 참여하는 사람이 더 적어질 테니까?”


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개틀링 선배는 어째 인간에 대해 너무 낙관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쯤은 되어야 이 시대에 깜둥이를 인간 취급해 주지만. 아무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개틀링 기관총’을 만들 수 있는 설계 아이디어를 쭉 풀어놓았다.


“그러니까 이런 게 있으면···.”


* * *


“예상보다 반응이 좋군요? 다들 관심이 많았나 봅니다.”


피르호 교수는 옆자리에 앉은 제 동료에게 친근히 속삭이다가, 인상을 구기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깜둥이들이 새끼를 쳐야 재산이 늘어나는데, 넷 중 하나꼴로 낳다가 쓰러져 죽어 버리니···.”


허나 옆자리의 교수는 피르호의 그런 혐오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계산을 했다.


“사분지 일 확률로 죽는다고 하면, 확률적으로 깜둥이 계집 하나가 낳을 수 있는 새끼는 셋이지요. 이게 저··· 저 튀기(작가주) 놈 말대로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하면 깜둥이 계집이 죽지 않고 낳을 수 있는 새끼는 무려 일곱이 됩니다! ‘번식률’이 월등히 높아지니, 당장 노예의 가격은 조금 낮아질 수 있어도···.”

“···그거 참 놀라운 일이로군요.”


와글와글 사람들이 몰려 있는 대학의 강당. 거둔 지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자랑스러운 제자는, 겸자를 든 개틀링과 함께 사람들에게 이 새로운 방식의 분만 시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먼저, 도구와 의복을 고온에 세탁하고 무균적으로 착용합니다.”


‘오토클레이브’에서 꺼낸 수술 가운을, 제자는 기묘한 방식으로 입고 있었다. 저놈이 뭘 하느냐는 식으로 쳐다보던 사람들 중 눈치 빠른 자들은 이내 깨달았다.


“바깥 면은 다른 대상과 접촉하지 않게 하는 건가?”

“예! 정확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살균한 의복에 균이 묻는 걸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신기하다. 신기해.


팔짱을 낀 피르호 교수는 알쏭달쏭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의 동료는 그의 혐오감을 여전히 눈치채지 못했는지, 툭 치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저 재주가 흥미로우신가 봅니다?”

“음, 음, 그렇습니다. 부정할 수 없군요.”


흥미롭다. 저런 지식이 어디서 나왔느냐··· 는 먼 동방, 아버지의 나라에서 전해진 문건을 보았다고 하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몸놀림이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마치,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처럼.


도와주는 개틀링은 연습을 몇 번 해보았음에도 여전히 버벅대기 일쑤였지만, 킴은 누가 보아도 여러 번 해본 몸놀림이었다.


“이제, 수술 도구들을 준비합니다.”


* * *


후··· 하···.


이 감각은 참 오래간만이다. 체감은 십여 년 만인가?


수술장이야 매일 몇 번씩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가운을 입고 세팅을 했었으니 못 해도 수천 번은 해본 일이다.

몸은 옛날 내 몸이 아니지만 뇌? 영혼? 아무튼 몇 번 연습을 해보니 물 흐르듯 막힘없이 가운을 입을 수 있었다.


오토클레이브에 넣었던 도구도 세팅 완료. 소독약과 소독솜 역시 준비 완료.

열 명분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만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건 눈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이었다.


“나리, 제가 어찌 되는 거지요? 흐끅···!”


불안한 표정으로 내··· 가 아니라 개틀링 선배를 보며 묻는 여자의 얼굴은 앳되어 보였다. 만삭으로 불룩하게 나온 배는 완연히 임산부의 그것이지만, 나이는···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여전히 흑인이나 백인의 얼굴만 보고 나이를 구분하는 건 어려웠지만, 끽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니 더 많지는 않을 듯했다.


산모는 내가 의사의 조수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아니라 의사처럼 보이는―즉 백인인―개틀링 선배를 보며 연신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그러나 차분함과 권위를 담아 말을 건네었다.


“자,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의사고, 당신의 분만을 안전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도울 겁니다.”


작가의말

작가주) 튀기 : 서로 다른 두 종의 동물간 교배에서 나온 새끼를 낮추어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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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1) +5 24.09.16 307 2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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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01. 검은 머리 김치만 (6) +1 24.09.14 339 25 12쪽
6 001. 검은 머리 김치만 (5) +6 24.09.13 356 28 11쪽
5 001. 검은 머리 김치만 (4) +6 24.09.12 389 29 12쪽
4 001. 검은 머리 김치만 (3) +2 24.09.11 413 28 13쪽
3 001. 검은 머리 김치만 (2) +1 24.09.11 392 28 15쪽
2 001. 검은 머리 김치만 (1) +3 24.09.11 493 26 12쪽
1 000 프롤로그 +4 24.09.11 540 3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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