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앰흑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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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밖으로
작품등록일 :
2024.09.1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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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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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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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3)

DUMMY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그러나 차분함과 권위를 담아 말을 건네었다.


“자,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의사고, 당신의 분만을 안전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도울 겁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자리의 둘 모두는 ‘의사’, 즉 MD(Medical Doctor)가 아니었다. 아, 나는 그래도 영혼이 MD니까 반은 의사로 쳐주나?


“숨 쉬시고, 자, 힘 줘야 합니다. 준비하세요.”


어찌 됐건 나와 내 주변의 흑인들처럼 더러운 헛간에서 늙은 산파의 도움을 받아 태어나는 것보단, 깨끗하게 청소해 둔 의과대학의 강당이 더 나을 거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 그것도 검은 양복을 걸친 고매해 보이는 백인 나리님들이 가득 차서 자기를 주목하고 있단 사실이 두려운 지 산모는 울먹거렸다.


“저나 제 아기를 데려가서 산 채로 해부하시는 건 아니지요? 제, 제발···.”

“그런 일은 결단코! 제 명예를 걸고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진통에 집중하세요. 이름이 뭐지요?”


여전히 그녀는 개틀링 선배를 보며 물었지만, 내게도 시선을 왔다갔다 하는 걸로 보아 나 역시도 의사 비슷한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개틀링 선배는 산 채로 해부 같은 소리를 듣고 진짜로 펄쩍 뛰며 기겁했다.


“캐시, 캐시에요.”

“그래요. 캐시. 다 잘 될 겁니다. 당신은 무사할 거고, 당신 아이는 건강할 겁니다. 초산인가요?”

“네에···.”


개틀링 선배는 내 부탁을 받아, 선한 성품답게 캐시라는 산모의 손을 꼭 잡아주며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도와 주실겁니다.”

“···소독 이후 산도를 수직으로 소폭 절개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았다.

전생이라는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들이 말하는 ‘신’을 믿기엔, 유색인종의 비참한 삶은 신의 선한 의지에 대한 살아있는 반론이 되어 주었다.


“힉! 흐끅···.”


마취 기술은 이제 막 도입된 클로로포름 정도였다. 그마저도 세계의 변방인 미국에서도 시골인 이곳에는 없고, 가능한 대안은 고농도의 알코올이나 코카인 같이 광기 넘치는 선택뿐. 생 살을 메스로 가르는 고통에 산모가 깜짝 놀라며 흐끅거렸다.


그러나 불규칙하게 살이 찢어지며 아이가 태어나 온갖 감염의 온상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

미안합니다, 그리 곱씹으며 나는 디에틸에테르같은 좀 더 안전하고 성능 좋은 마취약을 ‘해야 할 발명’의 리스트에 넣었다.


이미 산전 진찰을 해본 결과 아이의 머리가 제법 컸다.

초산에, 나이도 어린 산모가 쉽게 낳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주인은 저기 강당의 한 구석에서 흙 묻은 장화를 신고 파이프를 문 채, 고압적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깜둥이! 교수들이 설득해서 내 깜둥이를 맡기긴 했는데 만약 무슨 일이 생겨 내가 손해를 보게 되면 개처럼 매질해주마! 네 주인놈도 아무 말 못할 거다!”

“자, 선생. 사이먼 킴은 자유인이며 내가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킴 군은 주인이 없고, 나는 당신이 법적인 절차 없이 그를 폭행한다면 법률적으로 당신을 제재할 겁니다.”

“뭐, 뭣···? 그··· 영어로 말하쇼···.”


노예주의 고함에 대해, 피르호 교수가 발끈하며 그의 말을 잘라먹고 끼어들었다. ‘제재’ 같은 어려운 말이 나오자 무식한 노예주는 당황하며 영어로 말하라며 물러섰다. 그에게 제재 같은 단어는 자기가 아는 영어 단어의 목록에 없었을 테니


아니, 그랬다고 한다. 나는 수술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으니까.


“힘 주세요! 힘!”

“꺄아아악! 아악!”

“이제 태어나는 건가?”


산모의 비명소리가 강당의 높다란 천장에 울려퍼진다. 내 손의 장갑이 시뻘건 핏물과 양수로 가득 물들고, 가운은 흠뻑 젖어 축 늘어졌다.


아이의 얼굴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자, 힘 더 주세요! 하나! 둘!”


이 경이의 순간.

한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순간의 희열은, 직접 경험해본 이가 아니면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이 임상시험은 출산 과정을 보는 게 아니라 출산 과정에서 살균소독 기법을 이용했을 때와, 이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 감염 및 합병증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의사로서의 본능이 어딘가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씨름하기를 몇 시간. 가운을 둘둘 말고 장갑을 낀 채라 여전히 더운 날씨에 땀이 옷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세계에서도 아이를 받는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을 앞에 두었다는 긴장과 초산이라 길어진 진통 과정이 피를 말려 온 몸에 진이 빠졌다.


“됐다! 다 됐습니다!”

“응애―! 애애애! 애앵!”


건강한 사내아이가, 이제 거의 산모의 몸 바깥으로 나와 헐떡이다 첫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개틀링 선배. 집게 주십시오!”

“응? 어! 어!”


혼절할 것 같은 고통에 넘어가던 산모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힘을 쓰라며 달래주던 개틀링 선배가, 후다닥 달려와 내 보조를 서기 시작했다.


아이가 이제 밖으로 나왔다. 원래의 21세기 병원이었다면 탯줄에서 혈액을 채취하고 각종 검사를 돌렸겠지만 여기는 아직 그런 개념이 없으니 됐다.


“집게, 겸자, 바늘. 예.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아아, 익숙한 공기다.

수술 필드에는 피와 양수가 가득하지만, 손에 익은 도구들을 잡자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하다.


탯줄을 묶고, 자르고, 곧 하강해 밖으로 나올 태반과 함께 정리하면 출산의 과정은 끝난다.

손에 가득 피가 묻어, 두꺼워 불편하기 그지없는 소독용 장갑과 함께 질척거렸다. 이제 적응해야 할 감각.


산모의 어머니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흑인 여인이 달려와 앙앙 울기 시작한 아이를 안아 든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어떻게 마무리를 하나 보기 위해 일어서거나, 목을 쭉 빼 아래를 바라보았다. 조용하던 강당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이제 산도를 봉합하고 마무리 소독을 하겠습니다.”


층을 맞추어 대여섯 땀 정도 봉합을 하고, 소독약을 가득 묻힌 코튼볼로 세 번씩 닦아 소독을 마쳤다. 환부와 환부 주위로 충분히 소독약을 묻혀, 감염이 생기지 않도록 닦고, 미리 만들어둔 드레싱 재료를 꺼내어 멸균적으로 덮고···.


산모는 이제 제 아이를 안아 들고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 나리? 아니, 어, 의사 선생님? 어, 어느 분이 의사 선생님이신건지···.”


혼란에 빠진 표정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동양인 반 흑인은 아마도 1/4라 흑인의 이목구비와는 좀 많이 다르긴 하지만, 백인과 흑인이 있으니 당연히 백인 쪽이 의사인 줄 알았는데 모든 시술은 흑인이 하다니?


출산의 고통과, 제 아이를 품에 안았다는 기쁨과, 제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혼란으로 갸웃거린다.


뭐어,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 혼란에 빠졌을 법도 하다. 심지어 얼굴마저 제 또래로 보일 정도로 젊다면.


“아이는 건강합니다. 잘 울고, 어디 이상한 데 없이 말짱하더군요. 어머니도 건강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일단 여기 기준으로, 아직 면허를 못 딴 ‘학생’ ―입학이나 할 수 있다면― 에 불과하긴 하니까. 나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주고 까딱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소한 산욕열에만 안 걸리면 주산기 사망률은 확 줄어들 거다.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유럽의 왕족들도 아이를 낳다 픽픽 죽어 나가는 야만의 시대니.


나는 산모의 손을 잡고 있는 늙은 흑인 여인을 향해서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머님도 같이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에구, 저는 이 애 어미가 아녜유. 그, 그냥 같은 집 노예일 뿐이여유··· 캐시네 어머니는 팔려 간 지 한참 됐지유. 그래두 캐시가 건강하니 다행이네유.”


아차.


나는 너무 당연히 늙수그레한 흑인 여인이 같이 와 있기에, 어머니일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가족이 나뉘어 팔려가는 게 참 흔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 죄송합니다.”

“아녜유. 뭐어···.”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갓 태어난 아기를 향했다. 산모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기나긴 진통 끝에 태어난 제 아기를 안고, 빼액빼액 건강하게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달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한 의과대학 사람들 사이로, 수염이 부숭부숭한 노예주와 피르호 교수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잘 했네! 잘 했어! 아주 능숙하더군 말야!”

“감사합니다, 교수님.”


파안대소하며 더러워진 내 손을 잡고 흔들던 교수님은 흠칫, 놀라며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이거 때문에 내가 자네에게 병을 옮긴 건 아니지?”

“아, 걱정 마시지요. 이미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환경에 균이 가득하고, 우리 면역계는 그걸 수시로 이겨내고 있기 때문에···.”

“흠, 어디 보자.”


한편 노예주는 나와 피르호 교수님 곁을 성큼성큼 치고 나가, 갓 태어난 아기를 대강 잡아들었다.


“으아아앙!!”


마치 물건인 양, 아이를 휙휙 잡아 돌리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아이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산모와 나이든 흑인 여인, 두 노예는 겁먹은 듯 입을 꼭 다문 채 눈둘 데 모르고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그러다 주인은 피르호 교수님처럼 크게 하하하 웃었다.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으하하하!! 아주 멀쩡한 깜둥이 새끼로군?! 눈 코 입 말짱하고, 머리통도 멀쩡하고, 곤봉발(Clubfoot, 내반족)도 없구만. 돈까지 쥐어준대서 혹시나 좋은 노예를 버리게 될까 걱정했는데, 이득을 봤어! 하하하하!!!

“······.”

“······.”


우리 둘, 아니, 개틀링 선배까지 셋 정도일까. 몇몇 사람들은 그 몰상식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대다수는 저런 걸 가지고 무어 신경이나 쓰냐는 듯 별 상관하지 않는 시대. 가축이 새끼를 낳아도 저것보다는 조금 더 조심스러우리라.


“셀마, 캐시를 잘 돌봐주고 있으라고. 난 기념으로 한 잔 하고 올테니.”


그는 다시 내던지듯 아이를 제 어미에게 내팽개치고 푸하하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의 친구들로 보이는 비슷한 이들과 껄껄대며 떠들면서.


허나 지금 시대는 19세기 중반.

아직 노예제도가 사라지지 않은 이 땅에서는 너무도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이들의 세상.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이들과 사람같지 않은 이들이 가득한 곳.


“흐음. 저 검둥이 친구는 제법 유능한 것 같은데···.”

“정말로 실험 결과가 어찌 나오려나?”

“이건 잘 될것 같은데?”


교수들은 자기네들끼리 다 들리도록 떠들면서 이쪽을 흘긋거렸다. 환자 베드를 낑낑대며 밀고 병동으로 산모가 올라가는 동안, 피르호 교수님은 나를 다른 교수들로부터 가려주려 하는 듯했지만 저들의 시선을 다 숨겨주지는 못하셨다.


그리고 이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며칠 후 내릴 결단을 예측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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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003. 지하철도 (1) NEW +7 9시간 전 172 22 12쪽
»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3) +6 24.09.18 274 24 11쪽
10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2) +7 24.09.17 310 25 12쪽
9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1) +5 24.09.16 334 29 12쪽
8 001. 검은 머리 김치만 (7) +5 24.09.15 343 23 13쪽
7 001. 검은 머리 김치만 (6) +1 24.09.14 356 25 12쪽
6 001. 검은 머리 김치만 (5) +6 24.09.13 373 29 11쪽
5 001. 검은 머리 김치만 (4) +6 24.09.12 408 31 12쪽
4 001. 검은 머리 김치만 (3) +2 24.09.11 434 28 13쪽
3 001. 검은 머리 김치만 (2) +1 24.09.11 416 28 15쪽
2 001. 검은 머리 김치만 (1) +3 24.09.11 528 26 12쪽
1 000 프롤로그 +4 24.09.11 576 31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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