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앰흑 의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퓨전

새글

세상밖으로
작품등록일 :
2024.09.11 00:26
최근연재일 :
2024.09.18 18:30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4,050
추천수 :
292
글자수 :
56,492

작성
24.09.13 18:30
조회
355
추천
28
글자
11쪽

001. 검은 머리 김치만 (5)

DUMMY

며칠 후.


“편지 왔수다! 킴 선생!! 킴 군!!”

“으응? 우리 집에 무슨 편지가 올 일이 있다고···.”


마차를 탄 우체부가 현관의 초인종조차 없는 우리 집 문을 저녁에 쾅쾅 두들겼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새끼줄을 꼬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밖으로 나가더니 곧 멍한 얼굴이 되어 다시 돌아오셨다.


“야, 아들아, 치만아. 너 좀 나와봐야겠다.”

“예???”


어두운 방, 송진 불빛 아래에서 침침한 눈을 비비며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내 등을 아버지가 툭툭 두들겨 불렀다.


나는 딤스데일 목사가 빌려주었던 성경책을 잠시 덮고는, 머리를 식힐 겸 잠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킴 군, 맞구만? 여기 서명해 주쇼.”

“어··· 이게 뭡니까?”


여기 있는 많은 촌동네 사람들처럼, 나는 제대로 글을 읽지도 못하면서 대충 사인을 해주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꼭 사기를 당해서 딤스데일 목사를 붙잡고 한번 울며불며 난리를 치고, 태프트 판사에게 가서 한 번 더 난리를 치곤 했으니.


“본인이 이 서류를 받았다고 증명하는 서명인데···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잘 안 하는데.”

“아하, 알겠습니다.”


우체부 아저씨도 사실은 까막눈이라 종이를 반대로 잡고 있었다만, 바로 돌려놓고 보니 일종의 등기 같은 것이었다.


발신인은··· 오하이오 의과대학? 알폰소 태프트?!


‘내가 사실은 저기 신시내티에 있는 오하이오 의과대학 이사회에 소속되어 있거든. 그래서 입학생 추천권 한 장이 있었는데···.’


목사 집을 나서기 전, 태프트 판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


솔직히 크게 기대하진 않았는데, 이게 된다고?


“거, 누가 보낸 거요? 무슨 일이길래?”

“아부지!! 어무니! 저 대학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대, 대학??”


우체부 아저씨가 깜짝 놀라 가방을 떨어트리고, 옆에서 가늘게 눈을 뜨고 글을 읽으려 하던 아버지와 무심하게 뜨개질을 하던 어머니 두 분 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쪽을 본다. 심지어 별 관심 없이 개가 짖나― 정도로 일관하던 동생들마저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왔다.


“와, 형!! 뭔데?!”

“아니, 어찌 대학엘 간단 말이냐?? 어, 어떻게??”

“아이고 장하다! 우리 아들!! 내 아들!!”

“예! 대학, 대학 시험 보러 갈 수 있게 해준답니다! 판사님이요! 저,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나조차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흥분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니까··· 며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태프트 판사님이 딤스데일 목사님네에서 식사하시다가 파이가 목에 걸려서···.”

“응, 그렇지. 네가 이야기했잖니? 잘 해서 구해냈다고. 네가 항상 어릴 적부터 그런 건 잘했는데···.”

“판사님이 그걸 좋게 보시고 본인이 이사로 계시는 대학에, 추천장을 써 주시겠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리자―동양의 비술이란 부분은 뺐지만―부모님은 나를 얼싸안고 펑펑 우시면서 잘했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동생들마저도 크게 웃으면서 내 등을 퍽퍽 두드리고, 우체부 아저씨도 소문을 들었다면서 감탄하며 자기가 본 걸 자랑하려는지 손을 흔들고 멀어져 갔다.


“아이고! 똑똑한 우리 아들! 잘난 우리 장남! 이 애비가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고생 많았구나! 아이고···.”

“···고생은 부모님이 하셨지요.”


나는 안다. 눈으로 보았다. 이 분들이 자식들을 위해서 어떤 삶을 감내했는지를.


야만의 시대, 노예의 굴레에 제 자식들을 얽매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했고, 또 뼈마디가 닳아 없어지도록 농사를 짓고 노동을 했다.


부모님은 자기네 장남이 남들에 비해 조금 조숙하고 머리가 좋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몸 안에 갇힌 서른 살짜리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말하지 않고서 다 관찰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굳은살 단단히 박인 거친 손을 꾹 잡고, 어머니의 굽은 어깨를 끌어안은 채 나는 씩 웃음 지었다. 이제 이 자리서부터는 내가 당신들이 짊어지셨던 짐을 떠안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들이 이 시대에 피부색이라는 굴레를 물려주셨을지언정,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굴레를 지고 살아가는 건 익숙하다. 그 굴레를 끊을 능력이 내 손 안에 있음을, 이 머리에 있음을 믿는다면 더더욱 버텨낼 만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그동안을 살아낼 수 있게 만드는 가족의 지지와 사랑이지.


“그, 일단 시험공부를 좀 해야겠어요. 거기서 시험을 봐야 들어갈 수 있다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얼른 들어가 봐라. 여보, 뭘 먹여야 쟤가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까?”

“나, 나는 모르겠는데··· 에구, 이 어미가 무식해서.”


“괜찮아요. 배부르면 머리 안 돌아가요.”


시험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판사가 공부해야 할 거라고 말한 1차 시험의 일정이 끽해야 한 달 남짓. 수학은 몰라도 라틴어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내년 기회를 노려보는 게 어떨까할 정도로 촉박한 일정이다.


하지만, 솔직히 1년은 아까운 시간이다.


‘1년이면···.’


내가 알고 있는 걸 활용하는데, 1년이 더 있으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지금 기회가 없어 썩혔던 것들을 써먹을 기회가 왔는데 그걸 놓칠 순 없다.


그나마 태프트 판사의 언질을 받고, 딤스데일 목사가 빌려주었던 라틴어 성경책으로 영어 성경책과 대조해 가면서 공부를 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은 벌었다.


심지어, 입학 전형 서류가 든 봉투 안에는 태프트 판사의 편지가 같이 든 라틴어 문법 책이 한 권 같이 들어있었다.


[친애하는 킴 군에게. 자네의 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믿어 동봉하네. 이사회는 흑인을 선발하기는 어렵다고 하였지만 자네의 재능을 뽐낼 경우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믿네. ―A. 태프트.]


그래. 불가능이 어디 있는가?


수험 30일의 전사. 이제 출격이다.


* * *


한 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가장 바쁜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장성한 아들을 일손에서 빼고, 공부를 시킨다고 해주신 부모님과 형제들의 양해 덕에 ―혹은 그 때문에라도― 눈 붙이고 잠시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모조리 공부에 투자했다.


라틴어? 까짓거, 그냥 다 외우면 그만이다. 수학이야 미국인들은 원래 수학 못 한다.


이 거대한 야만의 시대. 점점 이 시대 이 나라를 알아가면서 쉽게 미래지식을 활용해 쉽고 빠르게 재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지금도 이 땅에서 주류 백인들은 새로운 발명을 하고 회사를 만들어서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다. 물론 그러다 송사에 휘말리고 각종 특허 도둑놈들과 사기꾼들에게 휘말려 기껏 벌어놓은 돈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지만.


하지만 이렇게 미친 시대일수록 공부와 시험은 그나마 몇 안 되는 출세의 방법이고, 나는 그걸 잘했다.


진짜 잘했다.


“짜식들이··· 어디서 한국 입시판 끝판왕한테 덤벼···?”


원래 한민족은 과거(科擧)의 민족이다. 천 년 전부터 시험 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분배해 온 우리의 핏속에는 수험에 최적화된 DNA가 흐르고 있다.


나는 민족의 전통축제이자, 70만 명이 박 터지게 싸우는 K―콜로세움, 수능에서 당당히 전국 수석을 해본 몸이고.


4당5락을 모르는 나약한 19세기 미국인들은 결코 김치식 매운맛을 이겨낼 수 없다.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시의 오하이오 의과대학의 1차 시험장 앞.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출격한 나는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부터 주변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어? 웬 흑인이···.”

“이봐, 자네 여기 왜 들어와 있는 거야?”

“저는 여기 시험 보러 왔습니다. 여기 증빙 서류가 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 어어? 음···?”


경비원이 위협적으로 굴며 목을 두둑두둑 꺾었으나, 무려 대학의 이사인 태프트 판사의 추천장과 수험 증명서를 내밀자 당황해하면서도 한발 물러났다.


“···흑인이 시험을 본다고?”


라고 되묻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단은 서류에 찍힌 서명과 도장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속으로는 혹시나 이딴 게 너한테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찢어 버리려고 드는 사람이 있을까봐 걱정했다마는. 일단은 첫 번째 관문이자 가장 큰 관문인 ‘시험장 입장하기’에는 성공했다.


내 이름표가 붙은 자리에 앉자, 주변의 시선이 내게로 일제히 쏠렸다. 예상했다시피, 너무도 당연하게도 전부 다 백인 남학생들이다. 조교며, 교수며, 다들 하나같이 허연 얼굴 퍼런 눈의 백인들.


그나마 대학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는 흑인들이 두엇 정도 보이기는 하였다.


시험 감독관으로 들어온 조교는 유독 내 수험표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교수님께 들은 바는 있지만, 충격이군.”

“죄송···합니다?”

“에휴, 됐다. 지원자 여러분들은 주어진 시험지를 뒤편으로 넘겨 주시길 바랍니다. 시험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엄격히 처벌될 테니···.”


부정행위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유독 나를 쳐다보는 건 느낌일까? 혹여나 괜한 트집이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 나는 더더욱 철저하게 시험 과정에 만전을 기했다.


첫 시간은 라틴어. 의학의 고전 서적들을 읽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였고, 수학으로는 논리적 사고 능력을 측정한다 하였다. 라틴어, 그깟 게 왜 ‘현대’ 의학에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험을 본다니 안 할 수가 없다.


‘다 아는 내용들이구만?’


한 달 동안 4당5락의 각오로 공부한 보람이 있는지, 푸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되려 난이도가 어렵지 않아 술술 풀리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출제된 느낌도 있었다.


‘이건 이렇게 번역하고··· 저건 저렇게 하고···.’


라틴어―영어로 상호 전환을 묻는 문제가 대다수다. 가끔 까다로운 빈칸 채워넣기나 독해 유형도 있다마는 단순 번역 정도라면 문법책을 달달 외웠으니 어려울 것도 없다.


순식간에 답안지를 채우고, 가장 먼저 제출하자 조교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리고 다음 교시 수학도 마찬가지. 다른 학생들은 생각 외로 낑낑대면서 힘겨워하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


‘쉬운데?’


기하학도, 대수학도, 기본적인 대학 1학년 1학기 교양필수 중간고사 선에서 정리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계산도 휴대용 전자계산기 같은 게 없어서 일부러 숫자를 쉽게 짜맞추어 두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교가 말한 제한 시간이 절반도 지나기 전에, 답안지가 다 작성될 정도로.


“···진짜 제출할 생각인가?”

“예. 잘 부탁드립니다.”


푸는 건 쉽다. 이게 정상적으로 제출될 건지, 아니면 중간에 누가 찢어 버리기라도 할 건지 확신하는 게 더 어렵지.


그래서 조교에게 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자, 조교는 쯧 혀를 차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푼 학생들은 나가 보아도 좋습니다.”


말투에서 볼 때 내 시험지를 슬쩍 어디에 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끙끙대는 학생들의 눈치를 뒤로 받으며 나는 시험장을 걸어 나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 머리 앰흑 의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각은 매일 18시 30분입니다 24.09.11 148 0 -
11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3) NEW +6 22시간 전 219 23 11쪽
10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2) +7 24.09.17 278 24 12쪽
9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1) +5 24.09.16 307 28 12쪽
8 001. 검은 머리 김치만 (7) +5 24.09.15 323 23 13쪽
7 001. 검은 머리 김치만 (6) +1 24.09.14 339 25 12쪽
» 001. 검은 머리 김치만 (5) +6 24.09.13 356 28 11쪽
5 001. 검은 머리 김치만 (4) +6 24.09.12 389 29 12쪽
4 001. 검은 머리 김치만 (3) +2 24.09.11 413 28 13쪽
3 001. 검은 머리 김치만 (2) +1 24.09.11 392 28 15쪽
2 001. 검은 머리 김치만 (1) +3 24.09.11 493 26 12쪽
1 000 프롤로그 +4 24.09.11 540 30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