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앰흑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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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밖으로
작품등록일 :
2024.09.1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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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검은 머리 김치만 (7)

DUMMY

“거기 미스터 킴! 자네는 잠시 남도록 하게.”

“아··· 예! 교수님!”

“저 자들이 자네 목을 플라스크처럼 부러트리려고 할 수도 있으니 말이지! 하하하!”


······?


농담이길 바랄 뿐이다.

과장되어 보이게 웃은 피르호 박사는, 교정의 한가운데 있는 벤치에 걸터앉아 활짝 웃었다.


“저기 미스터 개틀링이 오는군. 내가 참 아끼는 제자일세. 아마 자네가 이 실험에 성공해서 입학한다면, 자네 선배가 될 거네.”


미묘하게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잘 모르겠지만.


“아···!”

“다른 어떤 교수도 자넬 제자로 받으려 하진 않을 거야.”


그건 참 안타까우면서도, 위로가 되는 소리다. 최소한 피르호 박사, 자신은 받아줄 생각이 있단 뜻이니까.


“내가 받아준대도 의사 노릇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하하하!”

“아···.”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는 분이시다. 놈이 아닌 이유는 아무튼 받아는 준다고 하니까 그렇다.


나는 어차피 실제로 효과가 있음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진리는 자명해지면 스스로 퍼질 힘이 있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받을 박해와 부당한 탄압은··· 스승님(진) 께서 어느 정도는 변론해 주지 않을까?

그는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흐음, 그래? 비싼 학비를 감수하고서라도 의대에 들어오려 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제 동족들은 백인뿐인 의사들을 볼 수가 없으니, 저같은 깜둥이가 의학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휘이익! 갑자기 휘파람을 휙 불어제낀 교수는 쾌활하게 하하하 웃었다.


“그 대답, 참 마음에 드는군.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면 별로 안 들었을 텐데.”

“아, 돈을 버는 건··· 솔직히 반쯤은 포기했습니다. 제가 돈을 벌어 봤자, 총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고 끌려나와 나무에 매달리기 십상 아닙니까?”

“···아.”


그래. 이곳은 야만의 땅이다. ‘문명국’ 독일에서 살다 와 독어의 억양이 강하게 배인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는, 아직도 노예제도라는 게 실감 나지 않는지 조금 침울해진 듯하였다.

자기가 실수했다는 듯 짧게 대답한 피르호 박사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제자를 보며 벤치를 두드렸다.


“미스터 개틀링, 여기 앉게나.”

“예, 교수님.”

“자네 후배일세. 이쪽은 개틀링 군. 내 제자일세. 소개를 다시 한번 부탁해도 되겠나?”

“치만 사이먼 롤리랄라 킴입니다. 편하게 사이먼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김-치만.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만(萬) 사람을 다스리란(治) 의미에서 지어주셨다는데 다소 발음이 억울하다. 김치맨이라니.


사이먼은 치만과 운이 맞고, 발음이 비슷해 붙인 미국식 이름이다. 롤리랄라는, 어머니가 붙여 준 이름이었다. 미국에 끌려온 노예 1세대였던 외할머니는 같이 끌려온 형제들―내겐 외삼촌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종종 했더랬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 사남매에게 그분들의 현지 이름을 따서 미들네임을 하나씩 붙여 주셨다. 내 경우는 큰외삼촌할아버지 ‘롤리랄라’의 이름을 붙여 주셨고. 대강 이름에 관한 썰을 풀자니 조숙해 보이는 아저씨가 손을 내밀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리처드 J. 개틀링(Richard Jordan Gatling)입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아 흔들며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아, 감히 손을 내밀 생각도 못 했던 나는 그 손을 황급히 받아 쥐고는 흔들었다. 흑인에게 손을 내밀 줄은 몰랐는데.


개틀링은 확실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다. 피르호··· 도 지금 기억이 날락말락, 머리 한끝이 간지럽다. 피르호 노드(Virchow node), 좌측 쇄골상부 림프절 비대, 복강 내 전이암의 징후 중 하나라는 거는 기억이 나는데, 인간 ‘루돌프 피르호’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 피르호가 아니라 다른 피르호―가족이나 친척일 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의학을 배우긴 했는데 누가 무얼 했는지 배운 건 아니니까.


어쨌건, 인간 루돌프 피르호는 제법 유쾌한 사람이었다. 새로 만난 어린 학생과 노닥거리던 교수님은 내 어깨에 팔을 턱 걸치고 선언했다.


“이제부터 내가 제일 아끼는 제자는 저 친구일세, 릭. 2등이 된 점 유감으로 생각하네!”

“허헛, 한 명 중에서 1등이다가 두 명 중 2등으로 밀렸으니 큰 차이는 없는 걸로 하지요.”


농담이라며 킬킬댄 피르호 박사는 날 보며 미소 지었다.


“예감이 좋아! 저 실험은 성공할 듯 해! 아마 자네를 제자로 받을 수 있을 거야.”

“아···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하진 말게나. 이런 예감이 틀려서 미국으로 도망쳐 온 거니까. 하하하하하!!”

“···.”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도망쳤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반문하자 피르호 교수는 벤치에 등을 기대며, 마치 대단히 나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커험 헛기침을 하고 거들먹거리는 척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왕년엔 말야···? 베를린에서···.”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혁명에 참가했다가 결국 복고 반동보수주의자들에게 쫓겨 왔다는 이야기다.

프로이센, 돼지 같은 융커들 같은 단어들이 역사에 무지한 이과생의 머리에 들어왔다 훅 스치고 지나갔다. 프로이센? 그거 독일 아닌가? 뭔가 뭘 하다가 독일이 되는 건데···.


헌데 자세히 보니 교수님은 머리가 조금 벗겨진 것 빼고는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끽해야··· 30대?


“···교수님, 혹시 연세가 어찌 되십니까?”

“우리 교수님은 21년생이시지. 사실 내가 교수님보다 세 살 더 많아. 원래는 다른 일을 하다가 늦게 대학에 들어왔거든.”

“?!?!···.”


아, 이게 그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하긴, 이 정도로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이어야 흑인을 제자로 받아주겠지.


두 번째 삶에서 내딛는 첫발은 이렇게 순조로워 보였다.


* * *


“세상에··· 아직 멀쩡한 것 같은데?”


수군수군. 사람들이 술렁이는 와중 누군가가 중얼거린 소리가 유독 내 귀에 크게 들어와 꽂혔다. 피르호 교수는 빙글빙글 웃으며 연극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팔을 쫙 펼쳤다.


“여러 명망 있으신 교수님들과 관중 여러분! 이 자리에 입회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7일간! 우리는 동방의 나라에서 전해졌다는 질병의 비밀을 검증하기 위한 공개 실험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어느샌가 내 실험은 ‘동방의 나라에서 전해진 비밀’이 되었다.


지난 일주일간 나는 원래 묵기로 했던 곳 대신, 피르호 교수 댁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내내 이런저런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주로 교수님 본인이나 그 친구분들, 혹은 수제자를 자처하는 개틀링 선배 정도가 상대였다.


이것만 보아도 피르호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에 유색인은 짐승 수준의 대접을 받았다. 나 역시 면접을 위해 신시내티에 와서 돈을 준대도, 여관을 잡을 수 없어 건너건너 아는 교회 목사의 마굿간에서 자기로 약속을 했었다.


물론 ‘적절한 액수의 헌금’을 대가로.


그 사실을 듣고 경악한 피르호 교수는 대번에 날 본인 집으로 초청했다.


대가로 지불한 것은 일주일간의 밤낮없는 토론과 대화. 그 끝에 교수님은 그리 조언하셨다.


“자네의 지식은··· 실로 놀랍군! 물론 다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지만··· 아니, 애초에 전제부터 우리와 다르단 말이야!”


들어보니 마취는 이제 막 나온 개념이었다. 얼마 전에 클로로포름이 나왔다던가? 영화에서 악당들이 손수건에 묻혀 사람 코와 입을 덮어 기절시키는 그 화학물질 말이다.


살균소독? 애초에 세균 개념도 없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피르호 교수님은 이제 막 태동하는 병리학 전공자로서 한탄했다.


“이런 실험을 고안해 내지 못해서 난 세포의 세포 유래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네! 그런데 자네가 나타나 뿅! 고민 해결을 해준거지.”


현미경을 가지고는 있었어도, 지금 시대의 현미경으로는 못 보는 세포들이 더 많다.


애초에 병원균 세포들은 대부분 인간의 진핵세포보다 더 작은 원핵세포인 경우가 많기도 하거니와 피르호 교수님조차도 ‘그람 염색(Gram staining)’을 모르시는 걸 보면 염색을 해서 세균을 더 잘 보이게 관찰한다는 개념도 없는 듯했다.


“허나 진리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몰라보는 눈먼 이들이 많으니··· 차라리 조금 양념을 치도록 하세나.”


이 시대엔 아직 꽁꽁 숨겨져 있는 자연의 진리를 엿본 교수는, 쉴 새 없이 토론을 하다가도 시간이 부족하고 무지한 자들이 많다며 한탄하셨다.


아무튼 실험 검증의 날은 금세 다가왔다. 개틀링 선배를 포함한 각 교수들의 도제들은 순번까지 뽑아가며 플라스크 곁을 지켰다.

혹시나 누군가가 -누구라고 해봐야 나밖에 없지만- 플라스크를 바꿔치기 할까봐 돌아가며 밤까지 새운 그들은 변한 게 없는 내용물을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야, 너 혹시···.”

“뭔 소리야! 두 명씩 짝까지 지어서 불침번을 선 거잖아?”

“이게 말이 되나? 공기가 통하는데, 목이 굽어져 있고 물 좀 넣어뒀다고 썩지 않는게??”


공기가 통해 ‘생기’가 공급된다면 썩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내 말대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병원균’ 입자가 공기와 별개로 있어 저 굽은 목 부분과 거기에 살짝 고여 둔 물에 걸려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병원균이 모두 죽은 플라스크 안은 멸균 상태가 되어 부패가 진행되지 않는다.


아직 생물속생설(생물은 생물에게서 발생한다)을 믿지 않고, 자연발생설이 진리인 이들에게 실험 결과는 충격적인 듯했다.


교수들마저도 당황했는지 자기들끼리 질린 얼굴로 속닥거렸다.


“이게 맞나? 아니, 그럼 미아즈마는···?”

“뭔가 실험에 잘못된 게 있는 듯합니다만···.”

“자아! 놀랍게도 이 육수는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짜잔-! 피르호 교수는 플라스크를 들어 보이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보여주었다. 상온에 사흘만 방치해도 쉰내가 나고 색이 변하기 일쑤인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멀쩡한 모습은 딱 보기에도 이 시대의 ‘상식’에서 어긋나는 장면이었다.


‘세균론이 알려진 것도 정말 얼마 안 됐구나···?’


비슷한 듯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시대. 사람들은 이제 슬슬 현대인에게 익숙한 양복을 입고 안경을 써 겉껍데기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안에 든 생각은 너무도 달랐다.


아니, 어떻게 미아즈마 따위를 믿지? 라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기 일처럼 싱글벙글하는 피르호 교수를 보며, 개틀링 선배는 내게 엄지를 들고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저 사람도 워낙 독특한 사람이라 편견을 가지지 않고 내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다 들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원래 집안에 돈도 좀 있고 발명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만들어 보다가 천연두를 앓고 난 이후 의학을 공부하게 됐다나?


아무튼 피르호 교수도 그렇고, 개틀링 선배도 그렇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들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 양놈들은 성씨로 서로 구분하는데 개틀링이 이 사람의 아버지인지, 본인인지, 아들이나 친척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어쩌면 선배의 부인이 유명해질지도 모르고.


과학논문 대필, 자기소개서 첨삭 같은 알바를 하면서 웬만한 과학 실험들과 그 원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거의 10년을 그런 걸 했으니까.


가면 갈수록 어지간한 실험들은 다 해본 놈들이 생겨서, 더 더 이상한 걸 찾아서 하는데 그걸 지도해 주느라 나도 고생 좀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은 그중에서도 제일 만만한 축에 껴서 엥간한 애들은 다 한 번씩은 해보는 실험이었다. 나중에 가니깐 오토클레이브(autoclave, 고온고압멸균기) 만들기 같은 거도 하더라···.


아무튼 나는 겉으로 최대한 침착하고 당연하다는 표정을 유지하며 ‘신비로운 문헌을 읽고 비밀리에 전해지는 지식을 획득한 천재 소년’에 걸맞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


즉, 개폼을 잡았다는 뜻이다.


“이제 두 플라스크에 담긴 육수가 상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셨으니, 한쪽 플라스크의 백조목을 제거해 보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결과를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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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001. 검은 머리 김치만 (5) +6 24.09.13 356 28 11쪽
5 001. 검은 머리 김치만 (4) +6 24.09.12 389 29 12쪽
4 001. 검은 머리 김치만 (3) +2 24.09.11 414 28 13쪽
3 001. 검은 머리 김치만 (2) +1 24.09.11 393 28 15쪽
2 001. 검은 머리 김치만 (1) +3 24.09.11 493 26 12쪽
1 000 프롤로그 +4 24.09.11 541 3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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