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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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내기
작품등록일 :
2016.03.15 00:05
최근연재일 :
2016.04.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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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1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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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감금-4

DUMMY

지금쯤 뒤도 안 돌아보고 감옥을 나가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자니, 공랑은 복수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버님.’

공랑은 그 때를 생각했다.

부러울 것 없던 세월이었다. 가문의 적자로 태어나, 지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수련을 견디고 천랑비급의 실(實)을 터득했다. 비록 그것을 완전히 자유롭게 쓰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터였지만, 그 순간부터 그는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눈앞에서 마인들에게 몰살당하는 식솔들과 어머니, 아버지를 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아 항전하고 있을 때 불에 휩싸인 집을 두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녀가 있었다. 유천화. 깨어난 지 5분도 안 되어 고문하려 한 미친 여자.

‘무슨 일이 있어도 굴복하지 않겠다.’

그는 이를 갈았다. 원수를 갚아야만 했다. 틀림없이 가문을 멸문시킨 것이 그녀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공할 무공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 무공에 천랑비급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마교에 바친다면 강호의 무림인들이 어떤 화를 입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그가 악담을 퍼붓고 욕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뜬금없이 찾아와 자리를 펴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꿋꿋하게 연주했다. 욕설에 파묻혀 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도 그랬다. 그는 늘 욕을 하다 지쳐 포기하곤 했는데, 조금 더 연주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이 한스러웠다.

그 후에도, 그 후에도 그녀는 잊을 만 하면 불쑥 찾아와서 연주했다. 여전히 무언가 부족한 듯한 연주였지만 갈수록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공랑이 욕을 퍼부으면 항상 불을 최대한 켜지 않은 채로 뒤돌아, 즉 공랑이 불빛을 될 수 있으면 보지 못하게 연주했기에 격이 떨어지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신통찮았다.

연주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차라리 그 연주가 가소롭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저건 못난 연주다. 그러니 듣는다 해도 동요해선 안 된다는 일종의 자기최면 같은 것이었다.

물론 큰 도움은 안 되었다.

연주가 첨가되었다 한들 지옥 같은 생활은 여전했고 공랑은 그녀가 찾아오는 것을 점차 고대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런 마음을 경계하려 애썼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무덤 같은 감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는 꼼짝없이 그녀의 연주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몇 번을 들었을까, 그녀가 다시 연주할 때였다. 공랑은 욕에 지쳐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을 지키고 그녀는 일관성 있게 연주만 하고 사라지는 것이 반복적인 일과처럼 생각될 무렵이었다. 그녀는 고르게 현을 만지어 소리를 내게 하다가, 하찮은 부분에서 실수했다. 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나 궁금했지만 다시 연주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냥 되돌아가려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그놈 독하구나.”

역시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내가 뭐랬소.”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네가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아느냐.”

그는 적어도 10년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자 적잖이 당황했다.

“1년이다.”

그는 아무리 적어도 그렇게나 적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나오는 말마다 거짓말이군.”

“너무 많다고 생각했느냐?”

그녀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렇겠지. 너는 강하다. 그렇기에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이겠지. 내 너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고작 1년. 그는 절망했다. 고작 1년의 기간으로 그토록 괴로워하고 날뛰었단 말일까. 1년 만에 그녀에 대한 증오까지도 삭아져버린 것이었나. 그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기간동안 그의 소망은 단 하나로 집약되고 있었다.

그곳을 나가는 것이었다.

“나라면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렸을 것이다. 너는 굉장하구나. 나는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비급이라고 말했으면 다시 악담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다른 말을 전했다.

“솔직히 말하겠다. 내 네게 처음 말한 것에는 거짓이 조금 있었다.”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었소.”

“무엇인줄 알고?”

그녀가 웃었다.

“네 가문의 복권까지는 조금 무리였다. 들어줄 생각이 많지 않았지.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저버릴 수도 있는 약조였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오히려 기가 찼다.

“그것뿐이오? 유소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대체 얼마나 거짓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소만.”

“빈정대지 말고 들어보아라.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정말로 약조를 지켜줄 마음이 생겨서다. 내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주겠다. 너를 도와주겠다. 가문의 복권은 물론이거니와 지원도 해주마. 뿐만이랴. 네게 헤아릴 수 없는 부귀와 영화를 주겠다.”

“가문을 멸문시킨 것이 누구인데 그러시오?”

“네 가문을 멸문시킨 것은 내가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이제껏 들었던 욕설에도 차분했던 그녀가 조금 발끈했다. 공랑은 의아했으나, 그녀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건드린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그럼 내가 무엇을 해주면 그리도 큰 선물을 줄 것이오?”

그가 이죽댔다. 그녀는 잠깐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도.......알지 않느냐.”

결국 그거였나. 공랑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았나. 죽어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소저에게는 절대로 주지 않을 거라고. 나는 유소저와 다르오. 약조는 반드시 지키오.”

“너는 연주를 들려주면 무엇이든지 해준다고 약조했었다.”

그녀가 잔잔하게 말하자 그는 다시 화가 솟았다.

“금을 연주한 자가 유소저인 줄 알았다면 죽었다 깨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침묵이 흘렀다.

긴 시간이 흘렀기에 그는 그녀가 떠나간 줄만 알았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비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깝구나.”

독기가 어린 목소리였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래. 내 진심으로 인정하지. 마지막 문주라니 정말 자존심은 있구나. 그런데 그게 다야. 참 안쓰럽고, 한심하고, 멍청하고, 어리석구나. 넌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어. 비천한 것.”

이제까지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그를 심문할 때와 비슷한 어조였다. 공랑이 전신을 떨며 말했다.

“본색을 드러내셨군.”

“악독한 것. 약조는 지킨다고 했느냐? 나도 내가 지키는 것이 있어. 벌레 같은 놈들에게 하는 약조는 내 반드시 지킨다. 너는 여기서 절대로 나갈 수 없어. 네가 혹여 빠져나가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내 수하들이 너를 짓밟을 것이다. 심지어 네가 죽는다 해도 여길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반드시 이곳에 널 묻어버릴 것이니.”

“그거 참 무섭구려. 일단 철창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게 하고 그런 말을 하면 좋을 텐데.”

천화는 공랑의 빈정대는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네놈을 죽여 버린다 한들 슬퍼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냐? 넌 살아서나 죽어서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이곳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우습구나. 고작 자존심 하나 때문에 그런 꼴을 당하다니.”

“자존심이라.”

그가 조용히 말했다. 천화가 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아니냐?”

“소저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오?”

“멍청한 소리.”

“내가 소저에게 비급을 넘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소저나, 나나 잘 알지 않소. 나는 이미 소중한 것을 잃었소. 모두.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아오. 소저보다도 더. 사람들에게 그런 지옥을 보여주느니, 천 년이라도 여기 갇혀 있는 게 낫다는 건 당연하지 않겠소.”

그녀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정론이었으나, 마교의 여인인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소저도 쓸데없는 욕심을.......”

“멍청한 소리. 그렇게 갇혀 있는 게 좋다면 소원대로 해주겠다. 나는 두말하지 않아. 네가 나올 수 있는 건 천랑비급을 그 더러운 입으로 불고 난 후다. 아니면 영원히 나올 수 없어. 그게 다다.”

그녀는 감정이 상했는지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싫다면 거기서 죽어버려.”

마지막 말은 작게 들렸다.


작은 태풍 같은 그녀의 방문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공랑은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그녀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조용해지니, 고독 속에 몸부림치던 예전과 다르게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곧, 익숙한 환각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희야.’

그는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벌써 몇 천 번은 부른 이름이었다.

‘령아.’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날 어서 구해다오. 난 이곳에서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너희도 알지 않느냐. 그렇게 바보 같은 도련님이 이런 곳에서 이만큼이라도 버틴 게 기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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