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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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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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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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0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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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매칭 (4)

DUMMY

다음날 나는 소렌을 따라 폰테일 저택으로 향했다. 혼돈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거짓이라는 확신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적어도 내가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그리고 내 결정마저 혼돈의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건 나를 상당히 우울하게 했다.

폰테일 저택에 가겠다는 말에, 소렌은 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니 폰테일 저택에 가기로 한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입학식 이후로는 처음 와보는 수도의 시가지는 로베른의 건국기념일인 만큼 상당히 붐볐고, 그만큼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다. 내 기분하고는 정반대로군. 기분이라도 전환할 겸 나는 소렌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렌, 폰테일 공작님은 어떤 분이야?”

황실이 무너지며 신분체계가 거의 사라진 무림과는 달리 서역은 아직 여러 왕국이 존재하고 있는 탓에 신분체계가 공고하다.

물론 인류 공동의 적인 엠펠로니아의 등장 이후로는 신분체계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작위를 가진 귀족의 위세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지금은 무림처럼 변하는 도중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폰테일 가문은 역사교육 시간에 언급될 만큼 대단한 귀족가이니 적어도 무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겠지.

“........말해줘도 안 믿을 걸.”

소렌이 잠시 걸음을 멈추면서까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소렌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걱정되기도 한다. 예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귓등으로도 들어 두지 않았는데 그걸 트집잡히면 어쩌나 싶었다. 사실 나는 공작이 노발대발하든 어쩌든 별 상관이 없었지만 소렌이 공연히 해를 입을까 걱정이지.


폰테일 저택은 근방의 다른 저택과는 달리 확연히 달랐다. 한가운데 위치한 2층 저택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간이 벽 하나 없이 확 트여 있었다. 그리고 넓게 트인 공간은 대부분 수련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수련장은 수많은 검사들로 가득 차 있어서 마치 천의검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게다가 검사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진 이들이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수련을 힐끔거리면서 관찰했다. 내 시선을 눈치 챈 소렌이 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몇 명을 빼고는 거의 다 수도방위군 소속이지. 아버지가 수도방위를 총괄하고 있어서 폰테일 저택에 머물고 있는 거고.”

“꽤 많네.”

나는 그들 중 못해도 천의검문의 일대제자 수준으로 보이는 한 집단의 수련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검을 휘두르는 대신 가부좌를 한 채 명상에 잠겨 있는 이들이라 땀내가 물씬한 다른 검사들보다 더욱 눈에 띄었다.

언젠가 저들과 겨루어보는 날이 올까? 훗날 내가 강해지면 반드시 겨뤄볼 생각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두다가 나는 잠시 숨을 멈출 정도로 놀라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낯익은 사람이 그 안에 있던 것이다.

“비룡검객 유한겸?”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그의 별호와 이름을 소렌이 들을 지도 모르는데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전생의 열아홉 번째 생일에 처음 봤던 그 검객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강해 보였고 나는 혹시나 그가 나를 바라볼까봐 조마조마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전생에서든 지금이든 나를 알아볼 리는 만무했지만 나는 공연히 긴장하고 있었다.

“저 사람을 알아?”

“아, 아니. 잘은 모르지만 고아원에 가기 전에 아버지가 몇 번 말씀하신 적이 있어서.”

소렌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뻔 했지만 간신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 수 있었다. 비룡검객은 그의 상징인 비룡검을 그의 옆에 놓아두고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저 검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건 아직 무림에선 내 생일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내가 죽은 다음 검을 되찾았다면 모를까.

하지만 비룡검객은 전생에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니 전자가 경우에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림에서 자괴감에 빠져 있을 나와 지금의 내 나이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백윤도 아직 음모를 펼치기 전일 거고. 어쩌면 당장 무림으로 가서 백윤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나를 일깨워주든지 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무림에 가서 나를 만나도 되는 걸까? 나는 서역인을 만난 기억이 없는데. 만약 내가 무림으로 가서 나를 만난다면 내 기억이 바뀌게 될까?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소렌이 비룡검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저 분은 오리엔트의 유명한 검사래. 로베른이 엠펠로니아에 한창 위협을 받을 때 오리엔트에서 로베른을 돕기 위해 보낸 사람 중 한 명이야. 아버지는 저 분이 활약하는 걸 보고 오리엔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고.”

“그렇구나.”

기묘한 우연이다. 비룡검객이 없었다면 폰테일 공작이 무공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나도 이곳에 오지 못했겠지. 만약 기회가 된다면 비룡검객에게 무림의 사정을 들어보고 싶군.

물론 이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폰테일 공작을 만나기 껄끄러워 한 이유가 내 무공의 정체를 들키는 일인데 하물며 무림인이 천의검문의 무공을 못알아볼 리 없었다. 섯부르게 행동하다가는 천의검문의 제자들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하이스쿨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저택 안은 바깥과는 달리 한산하기만 했다. 몇몇의 하인들이 오가는 것을 빼면 저택은 너무 조용하고 또한 소박해서 이곳이 공작가의 저택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고, 차라리 하이스쿨의 시설이 더 고급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잠시 후 소렌이 한 평범한 방에 들어섰다. 그 안에는 수염을 깔끔하게 깎은 젊은 사내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무림인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은 채 뭔가를 궁리하는 것 같았다. 소렌이 인기척을 내가 그 사내가 천천히 눈을 뜨고 소렌을 닮은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소렌이 남장을 한 것처럼 너무나도 빼어난 외모에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는 그가 소렌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오라비 정도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더불어 그런 이질적인 모습이 더욱 나를 긴장하게 했다. 겉으로는 그저 미청년으로 보이지만 그는 로베른의 공작이며 또한 드래곤 슬레이어이니까.

“네가 도군이니?”

“그렇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유쾌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약간이나마 긴장을 풀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수 있었다. 폰테일 공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그의 눈 색깔 만큼이나 새파란 느낌의 웃음을 선보였다.

“반가워, 나는 롤랜드 폰테일이라고 해. 소렌의 아빠지. 소렌이 말한 대로 정말 오리엔트 사람 같은 모습이네. 하지만 블로펜의 말로는 혼혈이라던가?”

“네, 그렇습니다.”

인사치레를 하는 도중 검은 빛깔의 차와 쿠키를 곁들인 간단한 다과상이 나오고 폰테일 공작은 그제야 소렌과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누고는 서둘러 내게 화제를 돌렸다. 정말로 내게 관심이 지대한 모양이다.

“그런데 도군 너는 나한테 별로 궁금한 게 없나 보네? 피부 관리의 비결이라든지?”

“그런 걸 묻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습니다.”

“흠,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봐도 돼. 정말 궁금한 게 없는 거니?”

소렌이 오라비가 있어서 조금 격식 없고 다정다감한 성격이라면 이런 모습이 될까? 나는 왠지 폰테일 공작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렌이 평소에 보여주는 약간 얼음장 같은 이미지는 그녀가 만들어 낸 거고 어쩌면 그녀에게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태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소렌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폰테일 공작은 무례하다고 생각하기 충분한 내 말을 듣고도 화가 난다거나 민망해 하는 기색 하나 없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검은 빛깔의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하하, 그거 미안하네. 하지만 나는 네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서. 하지만 일방적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서로 불편할 테니 그래서 내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했지. 그런데 별로 궁금하지 않다니 별 수 없네. 그럼 염치불구하고 먼저 네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

“얼마든지요. 어떤 게 궁금하신가요?”

“너는 어떻게 오리엔트의 수련법을 얻게 된 거니? 블로펜은 별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서 본인에게 직접 들어보고 싶은데.”

블로펜과 어느 정도 면식이 있는 모양이군. 다행히도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기에 나는 미리 준비해온 대로 블로펜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에 적당히 살을 붙여서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폰테일 공작의 태도를 주시했는데 다행히도 내게 의심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실력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 같지도 않았고. 심지어 폰테일 공작은 상당히 사교적인 성격인지 공작 체면에 손뼉까지 쳐가며 내 이야기에 호응해주었다.

“그럼 지금까지 혼자서 무공이라는 것을 수련하고 있는 거잖아. 대단한데?”

“과찬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뛰어났을 뿐이지요.”

속이 뜨끔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겸양지덕을 발휘했다. 아니,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나는 어찌 보면 당연한 성취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 데다가 머릿속엔 검의가 넘실대는 처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성취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행운을 타고 났다면 천재 이상의 결과를 넘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폰테일 공작은 씩 웃더니 조금 남은 검은색 차를 후다닥 마셔버린다. 행동거지만 봐서는 이 사람이 정말 귀족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 소렌은 전형적인 귀족의 영애처럼 얌전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폰테일 공작이 쩝쩝거리면서 쿠키를 집어먹고는 말했다.

“아냐, 난 허언 따위는 모르는 성격이야. 소렌도 너한테 한번 지고 널 엄청나게 질투하던데 그 정도면 단순히 가르침이 뛰어난 수준이 아니지.”

“아버지. 그런 말까지.....”

소렌이 얼굴을 붉히며 폰테일 공작을 나무라다 내 눈치를 살피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다과를 우물거린다. 겉으로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충분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렌이 나를 질투한다고? 믿을 수 없는 소리지만 소렌의 태도를 보면 단순히 빈말 같지는 않다.

“그런데 도군.”

폰테일 공작이 돌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나직한 목소리에서는 공작으로서의 관록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바싹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약간 경망스러운 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로베른의 공작이자 드래곤 슬레이어다. 명성만으로 따지면 아버지보다 더 위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마음을 너무 놓고 있었군.

“소렌을 이긴 적이 있다 했었지.”

“운이 좋았습니다.”

약간 경직된 대답에 폰테일 공작이 부드러운, 그러나 위엄이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이라. 운이 좋았다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난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소렌은 운만으로 이기기에는 너무 대단한 녀석이거든. 안 그러니 소렌?”

“......맞아요.”

소렌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가 다시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야 내게 졌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게 된 것 같았다. 그것도 내 앞에서.

그건 그렇고 저 두 사람에게 칭찬을 듣자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며 온몸에서 차가운 땀이 쫙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란 게 얼굴에 표가 나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앞의 차를 마셨다. 쌉싸름한 맛이 바싹 마른 목을 더욱 죄어오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난 로베른의 하이스쿨이 마음에 차지 않았어. 물론 나쁜 의미는 아냐. 하이스쿨의 시설이나 교사들은 우수하고 무엇보다 로베른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니 하이스쿨 출신에 로베른의 공작인 내가 나쁘게 여길 이유는 없지. 하지만 내 딸 소렌을 생각한다면 하이스쿨은 결코 적합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 블로펜도 소렌의 입학을 조금 걱정했었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의 의중을 짐작하려 했지만 지금 나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폰테일 공작은 진중한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원래는 입학만 한 다음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어. 우리 로베른이나 다른 나라보다 더 마나와 검에 대한 연구가 우수한 곳으로. 거기가 어딘지 알겠니?”

“어디인가요?”

“오리엔트. 그곳에는 마법도 없고 국가보다는 무인들이 더 강한 세력을 가진 곳이니 당연히 우리보다 검이나 마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적어도 내가 본 오리엔트 인은 그랬지.”

만약 그랬다면 강호에 초신성이 등장했겠군. 동년배의 후기지수 중 그 누가 소렌을 이길 수 있었을까?

그 순간 나는 지금 이순간 천의검문에 접근하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소년이 떠올랐다. 백윤. 그 역시 소렌 못지않은 천재다. 당시에는 내 성취가 너무 낮아 막연히 느끼고 있던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제대로 된 길을 걷는 지금은 백윤이 단순한 천재가 아니라 정말 괴물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소녀만큼이나.

“하지만 너를 알게 되고 생각을 바꾸었지. 소렌이 월등히 1등을 차지할 줄 알았는데 동등한 실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어. 블로펜도 꽤 흥분해서 실컷 떠들어 대더라고. 마누라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엄청난 녀석이 왔다는 둥, 딸 자랑하러 갔다가 블로펜 자랑만 듣다 왔다니까.”

폰테일 공작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듣자 나는 괜히 내가 백윤과 소렌을 앞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정신이 붕 뜬 듯한 고양감에 휩싸였다.

“나도 타지로 딸을 함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하이스쿨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지. 그래서 난 소렌과 네가 함께 수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 물론 솔직히 네가 소렌을 넘어서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어. 그저 외롭지 않게, 함께 수련할 사람이 생겼으면 했지. 뭐, 내 딸이라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소렌은 천재니까 동등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지. 아마 나중엔 나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니까.”

나는 소렌을 힐끗 바라 보았다. 소렌은 안절부절 못하며 연신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초조한 티를 내고 있었다. 소렌도 칭찬에 상당히 약한 편이군. 그러나 내가 전생에서 비루먹던 경험 때문인지 작은 칭찬 하나에 일희일비할 뿐이라면 소렌은 그냥 그 나이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넌 심지어 소렌을 이겼지. 게다가 오리엔트의 수련방식까지 익히고 있다니, 대체 어떤 오리엔트 녀석이 스톰브링거를 이겨내고 사랑스런 딸을 울렸는지 보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그래서 널 부른 거야.”

“아버지!”

급기야 소렌이 벌떡 일어나기까지 한다. 나와 폰테일 공작의 시선이 집중되자 소렌은 다시금 얌전히 자리에 앉았고 폰테일 공작은 여전히 웃음기 섞인 얼굴로 소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울었다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 없단다. 난 네가 이번에 진 게 너무 기쁘니까. 패배를 모르는 검사는 승리도 모르는 법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건 네게 좋은 양분이 될 거란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다. 패배와 굴욕으로 점철된 전생을 경험한 나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지루한 대련 때문인지 그런 마음은 점차 퇴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깨달았다. 나는 하루하루 값진 나날을 살고 있다. 백윤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기회를 잡지 못하고 스러져 갈 것이다. 다만 나는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좋은 환경에 자리 잡은 것뿐이다. 그리고 전생과는 달리 지금은 기회에 걸맞은 몸을 얻은 셈이고. 말하자면 대련에서 느끼는 지루함이야말로 내게는 사치나 다름없었다.

“말이 길었던 것 같네.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다 잊어도 돼. 하지만 나는 도군 네가 이 말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소렌을 이겨줘서 고마워. 나중에 누가 이기고 지든 그런 걸 신경 쓰지 말고 끝까지 소렌의 친구로 있어줘. 소렌은 나중에 가면 정말로 고독해질 테니 그걸 해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지.”

나는 폰테일 공작의 말을 속으로 되뇌며 생각에 잠겼다. 이른바 천재의 고독이라는 건가? 고아원에서부터 미들스쿨에까지 어린애들과 경쟁하면서 1등을 차지하고, 하이스쿨에서 A반 전원을 꺾어버리고도 기뻐할 수 없었던 나는 그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난 결코 천재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그런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소렌이 느끼는 허무함만은 공감할 수 있었다.

소렌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폰테일 공작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던 폰테일 공작은 크게 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지루한 얘기는 여기까지야. 오늘은 로베른 건국기념일이니 축제도 하겠지? 둘이 데이트라도 하고 와. 용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만 놀리세요!!”

소렌이 얼굴을 붉히며 다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폰테일 공작과의 첫 만남이 이렇게 끝났다. 저택을 나서면서 나는 저택 밖의 수련장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비룡검객을 슬쩍 바라고보는 조금 서둘러서 저택을 떠났다. 어차피 비룡검객과 전생의 나는 직접 대면한 적 없으니 만나보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지. 언젠가는 가르침을 받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폰테일 공작은 저택을 나서는 우리에게 정말로 넉넉히 용돈을 쥐어주었지만 막상 사람이 북적대는 거리를 보니 지나가는 길에라도 구경하기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언질도 없었지만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둘 다 얌전히 돌아가기로 합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축제로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우리는 인파를 헤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어느 정도 한산한 거리에 나오니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 북적거리는 거리 너머로 저 멀리 폰테일 저택이 보인다. 이렇게 멀리서도 보일 정도이니 공작가의 규모가 조금은 가슴에 다가온다. 그러면서 폰테일 공작의 말을 다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소렌의 친구.

낯선 말이다. 그가 말한 친구란 단순히 하이스쿨 내부의 지인이 아니라 대등하게 검을 겨룰만한 상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과연 소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우연한 승리로 소렌과 동수로 평가받기는 했지만 그건 결코 정당한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내 운이 더 좋았을 뿐 결코 내가 더 강했다든지 노력해왔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소렌이라는 존재와 눈을 맞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녀석이다.

“소렌.”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무심코 소렌의 이름을 불렀다. 뒤늦게 나는 그 이유가 소렌에게 대련을 청하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그래, 대련으로 나를 다시 평가하자. 그래서 나에 대한 평가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다시 정진하는 거다. 나는 긴장의 끈을 졸라 메고 소렌을 주시했다.

“응?”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나온 통에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소렌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 태양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그 빛이 소렌을 뒤덮는다. 태양빛을 받은 금발은 반짝거리면서 빛난다. 그리고 그 빛나는 모습은 무척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다른 곳으로 향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는 천천히 내 의사를 전달했다.

“오늘 바쁘지 않으면 잠깐 부탁할 게 있는데.”

“딱히 할 일은 없어.”

소렌이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면서 말한다. 갑자기 비치는 빛에 소렌이 눈을 꼭 감았다가 뜬다. 눈이 아픈 건지 연신 눈을 깜빡이자 약간이나마 소녀다운 표정이 엿보인다. 이에 나는 그 순간 맥이 탁 풀려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대체 나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던 걸까? 소렌에게 이겼다면 앞으로도 이기면 되잖아. 어리석게도 나는 소렌의 재능 앞에 다시 절망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질 생각만 했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좌절하는 건 전생의 도군으로 족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져 나는 애초의 목적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소렌이 눈을 깜빡이며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차마 대련을 해 보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기 위한 대련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대련을 청하기 위해서는 말이지.

그런 이유로 나는 전혀 나답지 않은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건국제나 보러 가지 않을래? 용돈도 받았잖아.”

“.....받긴 받았지만.”

소렌이 머뭇거리면서 사람이 넘치는 듯한 거리를 바라본다. 망설이는군. 하지만 이럴 때는 방법이 있지. 나는 몸을 돌려 무작정 사람이 넘치는 거리로 향했다. 그러자 망설이던 소렌이 뒤늦게나마 내 뒤를 따라온다.

그 순간 오늘 내가 수련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떠랴? 하루 정도는 수련을 하지 않아도 죽지는 않을걸. 그 대신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축제를 즐기도록 하자.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양이 좀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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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 새로운 삶 (2) +2 13.02.03 8,916 147 12쪽
7 2. 새로운 삶 (1) +11 13.02.02 12,543 227 11쪽
6 1. 천하제일의 둔재 (6) +13 13.02.01 11,727 217 12쪽
5 1. 천하제일의 둔재 (5) +15 13.02.01 8,774 131 10쪽
4 1. 천하제일의 둔재 (4) +17 13.02.01 8,632 127 11쪽
3 1. 천하제일의 둔재 (3) +6 13.01.31 9,560 133 17쪽
2 1. 천하제일의 둔재 (2) +4 13.01.31 11,371 147 14쪽
1 1. 천하제일의 둔재 (1) +12 13.01.31 18,719 30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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