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7 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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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仁伯
작품등록일 :
2018.12.03 07:03
최근연재일 :
2019.07.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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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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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민얼마을 긴급대표회의 2 - 선동

인공지능, 민주주의




DUMMY

그는 이 실험에서 황광현이 맡은 역할을 되짚어보았다.

다른 세 명의 과학자 출신 직능위원들은 휴머노이드를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게끔 했다. 특히 임어영은 휴머노이드의 사회적 지위를 인간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다. 즉, 휴머노이드가 단순한 피조물이나 소모품이 아니며, 사용자가 직접 학습시켜 인격을 양성시키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사랑에 빗대었다.


물론 그건 촌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야기했다.

‘애정으로 키우는 개나 고양이한테 품을 법한 유대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 개나 고양이한테 인간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다른 누구는 ‘아무리 인간보다 똑똑하고 효율적이라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도 아니고, 동력을 소모하는 기계일 뿐이다.’하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생명체를 규정하는 논리는 다양하다.’, ‘개나 고양이는 인간의 지능수준이나 소통능력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휴머노이드는 이미 인간사회에서 경제활동의 주체라는 지위를 인정받았다.’ 등의 반대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충돌 직전까지 갔다.


이 때 그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방법도 치밀했다. 먼저 수뇌부 인사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의사에 따르도록 한 다음, 대표회의 전에 법조계 커뮤니티에게 해당 사안에 대한 판결문을 작성케 하여 세 사람을 구하고, 이에 대한 반발 또한 미리 예견했다. 그리하여 석호필에게 반공전략연구소 보안네트워크를 해킹하도록 하여 주민들을 처단한 직접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주민들 내부에서의 책임공방을, 주민들을 죽이고 억압하는 실험주관자에 대한 책임문제로 프레임을 바꿔버린 것이다.


어제 민무철 등에게 들은 바를 정리하자면 대략 이렇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정말 황광현의 제안에 촌민들이 지지를 보냈고, 이로써 갈등이 봉합된 것일까. 그리고 그 덕에 휴머노이드가 하루아침에 촌민의 지위를 부여받았을까.


실험주관자의 관점에서 황광현의 발언을 이해하자면, ‘반공전략연구소를 해킹해서 탁혼촌 실험을 망치겠다.’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의 발언은 극히 위험했다.

하지만 주관자는 그의 목을 자르지 않았다. 반면 휴머노이드에게 인간의 지위를 부여할 수 없다는 데 동조한 이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수했다.

만약 실험을 망치려는 황광현의 발언을 참수로 응징했다면, 이를 목격한 다른 주민들이 반공전략연구소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품을 수나 있었을까.

결국 그들은 황광현에게 설복당한 것이 아니라, 주관자에게 무릎꿇은 것이다.


그럼 황광현의 공은?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인간과 휴머노이드간의 전면충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충돌 또한 당시까지 휴머노이드의 사회적 지위는 민얼마을 주민들의 대표회의에서 정식으로 통과될 수 없는 안건이었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어영 등을 막고 주민들에게 총을 겨눈 휴머노이드들은 규범과 사회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일정한 사회적 권리를 무단으로 누리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반동형무소에서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주관자는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자들의 목을 베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휴머노이드의 목을 베었나. 정치 · 경제 · 사회 전 분야의 절대적 평등을 강조하는 주관자임을 고려한다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나.


이 두 시나리오를 구분하여 따져보자.

전자의 경우, 283명의 목을 자른 이는 실험주관자이다. 그래서 주관자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를 야기했고 황광현은 반공전략연구소 해킹을 운운하며 이를 부채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형되지 않았다. 이로써 휴머노이드와의 갈등을 덮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처럼 주민들끼리 총을 겨누고 강하게 대치했다는 이유로 인간과 휴머노이드 양쪽 모두를 처형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겉으로 드러나는 충돌은 없겠지만, 상대를 향한 분노와 원망은 더욱 깊어진다. 부모자식 사이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황광현이 주관자를 적으로 돌려 엇나가려는 실험진행방향을 잘 잡아주었다. 그래서 목이 잘리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그가 반공전략연구소가 실험을 위해 투입했을 거라 봄직한 세명의 과학자와 함께 론머맨에게 지목당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민얼마을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했던 큰 위험을 해결하는데 앞장선 장본인이라는 점 등에 근거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그가 또 주관자에게 맞서는 위험한 발언을 했음에도 목이 잘리지 않는다면 그 추측에 힘이 실리겠지만, 지금으로선 단정지을 수 없다.


정하준이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민무철의 발의가 끝나고 세 번째 안건발의자인 유선엽이 마이크를 잡았다.

촌민들은 심원기와 조달평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는 국가보위부라는 단어에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다가 어제 입촌민 인터뷰 당시 정하준이 인터뷰어들에게 언급했던 그 두 사람의 효용 부분을 거론하자, 일부 촌민들은 고함을 지르거나 욕설을 내뱉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공포마저 초월하는 분노였다.

정하준으로선 저 분노를 혼자서 받아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유선엽의 발의가 끝나자마자 그 포문이 열렸다.


“30대 일반비례의원 양승훈입니다. 참고인에게 묻겠습니다. 조달평과 심원기라는 자들의 능력으로 이곳의 경비단을 재정비한다면, 우리들을 통제하는 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40대 일반비례의원 임정희입니다. 설혹 참고인의 말씀처럼, 그 두 사람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고, 참고인께서 이를 구체적으로 활용하여 현실에 적용할 복안이 있으신다 한들, 촌민들이 그 둘과 어울리려 하겠습니까? 이 곳이 생겨난 이래로 입촌한 촌민들 수는 총 5563명입니다. 그 중에서 1543명이 죽었고, 647명은 질병 기타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지금도 312명은 사고로 몸을 다쳐 불구가 되었거나 치료가 시급한 환자입니다. 이게 다일 것 같습니까? 살아있는 입촌민들 중 70퍼센트 가까이 되는 분들이 동거하던 가족과 생이별하였고, 그들 중 30퍼센트는 부모님과 동거하던 미성년자입니다. 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울컥한 나머지 뒷 말을 잇지 못한 여성, 일반비례의원 임정희가 마이크에서 입을 뗐다.

정하준은 그녀가 1543명의 촌민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지 않는 점에 주목했다. 참수나 처형 같은 단어를 공개석상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임정희의 바통을 또 다른 일반비례의원이 이어받았다.


“50대 일반비례의원 봉민국입니다. 그 두 사람이 조직관리와 첩보분야에 뛰어나다 해도, 이 곳에는 그 능력을 발휘할 어떠한 설비도 갖추어져있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네트워크접속도 불가능한데 무슨 첩보 타령입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20세기 제임스 본드 흉내를 낼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 허황된 근거로 두 사람을 살려두는 것보단, 그들을 공개처형하는 게 촌민들을 단합시키는 보다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정하준은 봉민국의 발언에 어린 아이들까지 환호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들도 촌민들의 잘린 목을 많이 봐왔던가? 아니면 어른들에게서 이야기로 들어서 알고 있는 건가? 이것도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절대적 평등의 원칙으로 인한 결과인가.


“의장님이신 황광현 직능위원님께 제청드립니다. 참고인의 지위로 회의에서 자유로이 발언할 수 없기에 발언권을 얻고자 합니다.”


“참고인께서는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인터뷰 당시에 이 말씀도 드렸었는데, 대표님들께서 이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으시군요. 그 두 사람이 국가보위부 출신인 것은 맞지만, 지금은 자신이 몸 담았던 국가보위부로부터 팽당한 처지입니다. 국가보위부 입장에서는,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좌파, 빨갱이, 반동분자란 말입니다. 또한 그들이 여러분들의 입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도 확인해봐야 할 사항입니다. 인터뷰, 필요하시다면 심문과정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법조계 커뮤니티를 통해 판결을 받아 처벌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국가보위부 요원이 좌파라는 말에 촌민들 몇 명이 콧방귀를 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다. 흡사 친일파가 해방 직후 대한독립만세를 기뻐했다는 말 같지 않은가.

그래서 정당한 절차에 의한 사안의 처리를 강조했다. 그제야 촌민들은 비웃음을 멈추었다.


“그 둘을 죽여서 여러분들의 한이 풀리신다면 저로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국가보위부의 전부는 아닙니다. 한 나라의 사정기관들이 총동원되어 국민들 머리통에 빨간칠을 하고, 손으로는 목조르고 발로 짓밟는 반공대한민국의 시스템은 그 두 사람 사라진다고 해서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하지 않습니까? 반공대한민국체제를 타파하기 위해선, 그의 첨병인 국가보위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은 내부조직과 구성원, 관여업무와 처리방식, 재정규모 등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진 국가보위부에 관한 정보를 알려줄 내부고발자를 앞에 두고 계신 겁니다. 이런 기회를 그저, 잠깐의 화풀이로 날려버릴 겁니까?”


예상치 않았던 정하준의 웅변에 촌민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 면면을 둘러보던 정하준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한 고비 넘긴 건가.

그건 아니었다.


“미디어PD분야 제2직능위원 손현식입니다. 참고인의 발언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참고인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이 곳은 국가보위부나 대공부가 아닌, 주한미군 소속의 반공전략연구소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반공전략연구소에 맞서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국가보위부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어떠한 식으로든 그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 후로도 촌민들이 그들의 처형을 원한다면, 그 때 처형을 하면 됩니다.”


정하준은 눈을 부릅뜨고는 손현식을 노려보았다.

어떠한 식으로든 정보를 얻어낸다? 그럼 고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해 마지 않는 국가보위부 요원들처럼?!


“민얼마을의 자치규범, 그리고 경비단은 반공전략연구소의 처형으로부터 주민들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는 위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규범에 주민들의 합의에 따라 다른 주민을 공개처형할 수 있음을 명시한 규정이 있습니까?”


“법조분야 제2직능위원 이정례입니다. 기본적으로 민얼마을의 자치규범은 일반비례의원들이 촌민들의 의사를 수렴한 후 직능위원들의 자문을 받아 세부규정으로 규정안을 작성하고 대표회의에서 찬반투표에 의해 제정됩니다. 개정절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촌민들이 그 두 사람의 공개처형을 원한다면, 이러한 절차에 따라 특별규범을 제정하여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말입니다.”


이정례의 매서운 시선에 정하준의 눈두덩이가 잔경련을 일으켰다. 굳이 마지막에 합법적이란 말을 덧붙인 건, 그 또한 정하준이 요구하는 정당한 절차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70대 일반비례의원 이원구입니다. 전 그 두 사람에 대한 참고인의 맹목적인 옹호가 의심스럽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참고인 역시 국가보위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악질 사상범으로 분류되었을 것입니다. 심문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쥐어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토록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듣자 하니 제2차 한반도전쟁 때 화랑무공훈장까지 수훈한 전쟁영웅이셨다고 하는데, 혹시 참고인도 국가보위부 요원이거나 호국회원인 건 아닙니까?”


정하준을 향한 이원구의 눈빛과 표정만 두고 본다면, 불구대천지원수라도 되는 것 같다.

늘그막에 가족에게서 떨어져 이런 곳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게 그토록 악에 받친 걸까? 국가보위부 요원을 처단하는데 방해가 되는 어떠한 시도나 논리도 날려버리겠다는 반응이다.


사실 이원구 뿐만이 아니었다.

정하준은 손현식과 이정례를 비롯한 탁혼촌 대표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심원기, 조달평의 처리와 관련해서는, 이전의 두 안건과 달리, 논의내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그럼에도 한껏 흥분한 촌민들이 연신 소리지르고 박수치고 환호하는 탓에, 사람을 죽이자는 쪽으로 기우는 논의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민얼마을 주민들이 감정적으로 폭주하는 이유가 뭘까. 임정희가 말했듯이, 이곳에서 촌민들이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국가보위부의 입촌결정이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무언가 더 있다.


“여러분들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정례 직능위원님께서 말씀하신 규범해석과 형벌집행이, 비록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을지언정, 진정으로 공정한 처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제가 보기엔 아닙니다. 주민분들이 품으신 악감정의 공감대를 이용하여, 직접 죄를 물을 만한 상당인과관계의 당사자가 아닌 이에게 공권력을 행사하는 건 부당합니다. 그리고 민얼마을이 생긴 이래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미 절대평등의 원칙에 의거하여 촌민의 지위를 획득한 이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에는 반동전략연구소에서 모종의 조치가 취해질 것입니다.”


반공전략연구소의 조치를 언급하는 정하준의 말에 광주학생운동기념공원에 모인 참관인들은 물론, 이 소리가 울려퍼지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주민들이 몸이 굳었다. 순간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굳은 몸을 푼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두려움에 떨었고, 어떤 이는 무기력함에 좌절했으며, 또 다른 이는 분노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입촌한 지 24시간도 안 된 신입주민이 마을 주민들 누구나 역린으로 품고 있는 부분을 건드린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주민 대표들을 마녀사냥식 논리와 이에 동조하는 주민들을 멈추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처형과 죽음, 자연상태에 방치되었던 사람들로 하여금 수십 년만에 휴머노이드와 인간이 평등한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했던 절대동력이자 민얼마을의 근원적 공포가 아닌가.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신입주민인 참고인의 발언은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입도 뻥긋 못하고 자신이 보인 반응을 되짚기에 바빴다.


그 때, 그렇게 브레이크가 걸린 대표들의 극단적 언사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이가 등장했다.


“의장으로서 의사진행발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 또한 직능위원으로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참고인의 발언은 일면 타당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우리들을 처형했던 세력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지금과 같은 재화분배방식과 의사소통방식, 자치규범 등을 갖추어 지켜왔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처형세력의 뜻이 매번 그렇게 합리적이거나 정당했던 건 아닙니다. 대표를 선출하기 전 주민전체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미성년자는 물론 미취학아동들에게까지 성인과 동일한 발언권과 의사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박했던 주민이 목이 잘렸습니다. 또한 입촌 초기에 K-law파동 연루자 수백 명이 총기를 들도 구 도청 일대에 몰려들었을 때에는 전투용 휴머노이드들을 투입하여 치밀한 군사작전을 펼쳐 많은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살해했으면서, 몇 년 전 대표회의에서 처형세력의 네트워크를 해킹하여 그들의 강요에 질질 끌려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자고 외쳤던 저는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처형세력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그들의 처형은, 바르지 않은 언행을 바르게 고쳐잡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들의 뜻이 그러하니 무조건 따르라는 것일 뿐입니다.”


황광현이 나섰다.

정하준의 짐작이 맞다면, 지금의 이런 분위기 또한 주관자의 의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발언하기 시작한 것일 게다.

그렇다면 반대로, 지금 상황에서 주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추측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일까. 조달평과 심원기의 처형?


“의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처형은 복종을 강요하는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 수단에 담긴 메세지를 나름대로 바르게 재해석해왔습니다. 밥과 식량을 강탈하지 마라는 메세지를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절대적으로 균등한 분배로 재해석한 후, 이를 민얼마을 주민의 공동체 내 지위에까지 적용하였습니다.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말라는 메세지에 대해서는, 규범을 제정하고 경비단을 창설하여 공권력을 확립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었고요. 그렇게 공동체 시스템을 구축했고 삶을 안정시켰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예상치 못한 처형이 없진 않았습니다. 휴머노이드에게도 촌민의 지위를 부여하자는 파격적인 발언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283명의 촌민이 처형당한······! 그, 그게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 중 그 누구라도 당장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원활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 이를 통해 만들어낸 정당한 규범이 그들의 의도에 부합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들을 한 데 묶는 유대감의 바탕입니다. 이 믿음을 버리지 마십시오.”


283명이 참수당한 대참사를 입 밖으로 꺼냈을 때에는 스스로도 아찔했다. 촌민들 대부분의 눈에 살기가 어렸기 때문이다. 금기 중의 금기를 건드렸나. 그래서 뒷말에 강한 힘이 실렸어야 했는데 주눅이 든 탓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그게 상대의 역공을 허용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저들의 의도가 합리적인 공동체시스템의 구축일 것이라는 판단은, 우리가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발언하신 분들 중 내일 누구라도 목이 잘릴 수 있습니다. 그게 만약 양승훈 의원님이시라면, 심원기와 조달평의 효용성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게 처형세력의 뜻이었겠죠. 마찬가지로 임정희 의원님이시라면, 그들을 주민들과 어울리도록 하는 게 그들의 뜻일 테고, 봉민국 의원님, 손현식 위원님과 이정례 위원님이시라면 저 둘을 공개처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이며, 이원구 의원님이시라면 자치규범의 준수를 강조하는 참고인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게 그들의 뜻일 겁니다. 그리고 내일 제 목이 잘린 채 발견된다면, 처형은 자의적인 게 아니며, 우리들 스스로 정당하고 합리적인 공동체를 구축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게 그들의 뜻이겠죠. 다만 그럴 경우, 그들은 지금 탁혼촌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공동체라고 생각한다는 게 밝혀지는 건가요? 인간이 존재 그 자체로 평등할 뿐만 아니라 휴머노이드와 인간도 동등하다는, 일말의 분별력마저 없는 자들이 강요하여 만들어낸 공동체의 시스템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다?! 그야말로 역설적이고 역설적이군요!”


씁쓸하기 짝이 없는 황광현의 마지막 한 마디가, 사그라져 꺼져가는 촌민들의 마음 속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참수의 공포에 짓눌려 있던 그들의 상처난 자존심을 건드려 반발심리를 자극한 것이다.


광주학생운동기념공원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살벌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공원 잔디밭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던 인간들이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몇몇 어른들의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283명이 처형당했을 때 자기 아이의 잘린 목을 부둥켜 안고 오열했을 유가족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무서운 시선들 중 상당수가 정하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조달평, 심원기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황광현의 발언이 교묘하기 이를 데 없다.

반공전략연구소로 밝혀진 실험주관자의 자의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 억눌려왔던 주민들의 분노,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식량과 식수, 동력을 제공하는 그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칼에 이유도 모른 채 목이 날아가면서도, 저항할 힘이 없어 그저 참으며 스스로 자존심을 무너뜨려야 했던 지난 날에 반발하는 감정을 분노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이를, 국가보위부에 대한 원한을 동력삼아 끓어오르다가 주춤했던 감정을 자극한 것이다.

견강부회(牽强附會)에 의한 선동의 전형이다.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간 정하준의 시선은 선동가 황광현에게서 멈췄다.

이제 보니 이 자가 열쇠였다.

반공전략연구소의 실험계획에 맞게 현장의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결과를 도출해내는 유인자였던 것이다.


황광현과 시선이 얽힌 정하준은 순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착각일까. 묘하게 일렁이는 그의 눈빛이, 오늘 새벽 자신을 바라보던 임어영과 정주훈의 것과 너무나 유사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금남로5가역 식당에서 임지훈에게 질문을 퍼부었을 때, 민얼마을에서 처음 휴머노이드를 제작할 당시 주민들이 탐탁치 않아 했다고 설명해주었다. 냉난방과 조리, 조명에 사용할 동력도 빠듯한데다, 네트워크접속도 되지 않아서 인격양성학습도 어려운 판에, 무슨 휴머노이드냐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했다.

그렇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판을 누가 뒤집었을까.

지승연의 태양광발전기술과 임어영의 육성심리학 지식이면 가능하다고, 휴머노이드의 노동력으로 보다 편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거라고 촌민들을 설득한 자. 분명 황광현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교묘하게 논리를 왜곡하여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적인 화법을 구사한다면, 하고도 남는다. 주민들의 합의가 모든 사안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변수인 이 곳에서 그가 하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휴머노이드와 인간을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실험주관자의 의지를 신랄하게 비판한 황광현의 마지막 발언은, 과거 임어영의 발의내용에 반발하였다가 목이 날아간 283명의 반응과도 일맥상통했다. 그 역시 민얼마을의 휴머노이드에게도 주민의 지위를 부여하는 지금의 체제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음을 대놓고 드러낸 것 아닌가. 이것이 주관자의 뜻에 어긋남을, 인간 주민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의 말에 격하게 반응한다. 심원기와 조달평의 처형 건에 흥분하여 이성적 사고의 끈을 잠시 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에 말에 공감대를 이룬 인간 주민들은, 이 곳에서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은 휴머노이드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임어영이 발의했을 당시의 분위기가 재연되는 듯 하다. 그럼 내일 또 다시 그 사달이 벌어질까.

정하준은 내일 일도 걱정이었지만, 당장 지금 휴머노이드들이 보일 반응이 두려웠다.

기념공원 잔디밭 주변에서 근무하던 휴머노이드 경비단원들은 분노한 인간들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다수의 촌민들이 새로 들어온 촌민들을 핍박하고 있음에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기에 휴머노이드들이 개입할 명분이 없다고 판단하는 건가. 그 자체로 인간과 휴머노이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져 있음을 시인하는 꼴이다.


인간과 휴머노이드 모두 같은 촌민으로 동등하게 대우받는 민얼마을? 실상은 어떨까?


이곳에서도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업무를 지원하고 보조한다. 주요지원업무는 경비분야. 휴머노이드 경비단원 수가 전체 마을 내 휴머노이드의 70퍼센트에 달하고, 전방경비단과 치안경비단을 합친 인원수와 비슷하다.


보조업무는 주로 물류와 시설관리에 집중되어 있다. 인간이 하기엔 힘에 부치거나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한다.


경비업무도 위험하다. 평소에는 촌민들의 일탈행위를 감시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수준이겠지만, 오늘 새벽 민무철 등이 언급한 탁혼촌의 중요한 일정이 반공전략연구소의 전투병력에 맞서는 계획임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럼 인간과 휴머노이드들이 함께 달려가 싸울까.

그러진 않을 것 같다. 휴머노이드가 먼저 밀고 들어가면 인간들이 지원을 하거나 뒤따라가는 식이겠지. 민무철과 함께 있던 M0005가 BSS/EBF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표정이 눈에 띄게 좋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이 지원사격하는 인간들을 대신해 총알받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상대가 터무니없이 강한 탓에 작전에 투입된 휴머노이드들이 복구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공격당하는 휴머노이드들을 구조할까.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그것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겠지.


황광현은 여전히 촌민들을 선동질하고 있었다. 절도있고 힘차게 손과 팔을 휘저으며 땀과 침이 단상 앞으로 마구 튀어나가도록 격렬하게 연설하는 모습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히틀러를 연상시켰다. 그의 목소리를 송출하느라 스피커가 터져나갈 것이 울렸고, 굉음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소리가 탁혼촌을 뒤흔들었다.


황광현의 연설에 담긴 힘에 취한 것일까. 회의에 참석한 인간 대표들과 참관하는 인간 촌민들 모두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박수를 치고 고함을 내질렀다.


회의석상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에 당황한 M0005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돌렸다.

참고인으로 출석한 정하준이 눈으로 묻고 있었다. 민얼마을에서 휴머노이드가 정말로 인간과 동등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오늘 새벽 그의 앞에서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동등하다며 미소지었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무언의 질문이 왜 질책처럼 느껴지는 건가.




Neo-Familism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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