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7 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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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仁伯
작품등록일 :
2018.12.0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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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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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표출

인공지능, 민주주의




DUMMY

마침 그의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는 이가 등장했다.

룩의 주위로 죽음의 손길과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TR-MB의 기체를 두 발로 밟고 우뚝 선 비숍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눈만 아래로 깔아보는 품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TR-MB가 십여 미터 상공까지 하강하자 비숍이 기체에서 뛰어내렸다.

삼층 건물 높이에서 떨어져 착지하는데도 엉덩이가 잔디밭에 닿을 만큼 두 무릎을 굽혔다가 펴는 것만으로 충격을 완전히 해소했다. 룩의 육중한 바디와 운동능력으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동작이다.


“나이트한테 왜 그랬어?”


“이 분한테서 얘기 못 들었어? 쓸데없는 소리 새어나가는 거 막아야 한다고? 너도 마찬가지야. 파파 편만 들면서 론머맨 아저씨의 의사는 깡그리 무시했어.”


“단지 그 이유 때문이야?”


“입 막으려고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야. 그런데 고작 휴머노이드잖아? 뭐라고 망설여?”


인간에 비해 한참이나 비천한 휴머노이드이기에 문제될 게 없단다. 방금 전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동등한 세상 운운하던 석호필과 한 배를 탄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비숍이 한 말인즉슨, 룩 또한 그런 휴머노이드에 불과하니, 아무 망설임없이 제거하겠다는 의미다!


룩은 지금 자신이 마주한 비숍이 론머맨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그로서 대하는 데에는 자신이 없었다.

물론 비숍을 원격제어하는 론머맨에게 비숍이라는 굴레를 씌웠다가 실패한 선례가 있다. IICC헬맷을 착용시킨다는 구실로 네트워크접속모드를 전면차단형으로 전환하게끔 하려 했다가 말싸움만 벌이고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았던가.


“파파도 죽일 거야?”


“지금 방금 말했잖아? 입 막으려고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라고?”


“그럼 파파에게 기획보도 제안한 이유는 뭐야? 아니, 왜 하필 파파야?”


“그건 얘기가 좀 길어. 파파한테 직접 말할 테니까, 넌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그렇고 파파도 그렇고, 제거하기 전에 자초지종 일일이 다 설명해주는 건 왜 그런 거야? 그냥 없애버릴 거면 아예 말을 말던가, 시간낭비에 심력낭비해가면서 일일이 설명을 해 줄 거면 살려두던가 하는 게 맞지 않아?”


“그게 왜 이상한 줄 알아? 네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뭘 몰라?”


“네가 뭘 아는데? 저 분이 답변해주신 거 들으니까 뭐 다 아는 거 같아? 너! 대한민국에서 진행중인 반공인격표준화정책의 실체가 뭔지 알아? 그리고 그게 미합중국의 세계시민계획하고는 어떻게 맞물리는지는 알고? 이 두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는? 내가 이 기획보도를 언제부터 구상했는지, 왜 구상했는지는 알아? 아니, 다른 거 다 내버려두고서라도······, 너 내가 누군지나 아냐?”


“······!”


“그리고 너만 모르냐? 파파는? 다른 소피들은? 너희들 모두······, 진짜 아무 것도 몰라! 더 어처구니없는 건,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여기까지 끌려왔다는 거야. 그야말로 먹을 것만 던져주면 좋다고 따라오는 동네 똥개 아냐? 최소한 사람이라면, 음식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의도로 음식을 주는 건지, 그 음식 안에 다른 뭐가 들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거 아냐?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 있어?”


론머맨의 비숍이 쏟아낸 의문들은, 그가 해킹에도 불구하고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 것들, 그리고 스스로 끝까지 숨겼던 속내에 관한 것들이었다. 지금껏 단편적인 증거와 몇몇 정황들, 이로부터 비롯된 추측만으로 짜맞춘 엉성한 시나리오로는 접근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졌던 근본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론머맨은 사태의 핵심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언저리마저 짐작으로 넘겨짚어온 자신들의 멍청함을 힐난한 것이다.


충격을 받은 룩은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이 짠 사건의 줄거리가 한순간에 어그러져서 정신이 없었다. 동네 똥개라는 모욕적인 비유마저 인지하지 못했다.


뒤늦게 감정을 추스린 룩이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이 질문을 이어갔지만, 이미 비숍의 선공에 기세가 한 풀 꺾인 후였다.


“석 노인이 그랬어. 론머맨 아저씨는 자기 나름의 세계시민계획을 완성하려 한다고.”


“그래. 론머맨 아저씨가 알려준 민얼마을 실험일정이 그거라고 말씀하셨지? 그래서 뭐? 여기까지 온 후에야 그걸 알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


비숍의 입가에 걸린 조소에 룩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론머맨은 여기서 자신을 파괴한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식으로 자신을 파괴할 것인가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가장 절박한 순간에 마지막 삶의 의지를 꺾으면서 죽이려는 걸까. 아니면 비참하게 무너진 모습 지켜보다가 지겨워지면 쓰레기 치우듯이 없애버리려는 것일까.


아름다운 비숍의 얼굴에 론머맨이 겹쳐보였다. 사악하게 비틀린 입가 하나로 저렇게 사악해 보일 수 있다는 게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표정변화와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언제 시작인가. 머슬(인공근육)의 에너지출력을 끌어올리던 룩은 비숍의 묘하게 일렁이는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저게 뭐지. 지금껏 접해보지 못한 그녀의 반응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는, 라이트 풋을 뒤로 빼면서 반사적으로 암을 들어올렸다.


체스트와 페이스을 막자마자 순간적으로 무지막지한 힘이 포어암에 가해졌다. 시오리의 머슬내장형 가죽자켓으로 방호력을 높이지 않았다면 바로 암이 부숴졌을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쿵쿵거리며 예닐곱 발짝 뒷걸음질친 룩은 상체를 낮추고 코뿔소처럼 달려드는 비숍의 숄더를 잡아 찍어눌렀다. 그러나 룩의 힘과 육중한 바디로도 비숍을 멈추기에는 부족했다. 기둥처럼 땅에 박혀 룩의 바디를 지지하던 레그가 깊은 고랑을 내면서 점차 뒤로 밀려났다.


비숍의 엄청난 출력에 경악한 룩이 어찌 대응책을 생각할 틈도 없이 비숍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룩의 암에 눌려 바짝 숙여진 어퍼 바디(upper body, 상체)를 번쩍 일으켜세우자 룩의 암이 튕겨져나가면서 체스트가 노출되었다.

비숍은 그녀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들어올린 후 땅바닥에 머리부터 거꾸로 내리꽂았다. 룩의 헤드와 숄더가 흙 속에 박혔다.


비숍은 도끼질하듯 룩의 바디를 머리 뒤로 넘겼다가 거세게 내리찍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그러나 딱딱한 기계식 블럭이나 구식 아스팔트, 콘트리트가 아닌 잔디밭이라 룩에게 가해지는 데미지가 그리 크지 않았다.

신경질이 난 비숍은 땅에 박힌 룩의 허리춤을 양손으로 잡고 바디를 들어올린 후 그녀의 헤드에 발길질을 했다.

기겁한 룩이 재빨리 두 암을 교차시켜 막았지만, 웨이스트가 뒤로 꺾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 상태로 서너 번의 발길질을 더 막아낸 룩의 라이트 암은 외장이 완전히 움푹 파이면서 내장된 머슬과 본(bone)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비숍이 니 킥으로 룩의 어브도먼(복부)과 프랭크(frank, 옆구리)를 사정없이 찍어댔고, 룩의 바디가 새우처럼 휘어졌다가 늘어지기를 되풀이했다.

니 킥으로 다섯 차례 가격한 후 비숍은 룩의 바디를 잔디밭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흙바닥에 우반신이 거의 전부 박히다시피 한 룩은 EB의 감각제어시스템과 바디프레임모니터링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상태를 체크했다.

상황은 끔찍했다.

타격 부위의 방호자켓 내장 머슬은 제 기능을 못했다. 바디 상태도 심각했다. 엘보우(elbow,팔꿈치) 아래로 완전히 축 늘어져버린 라이트 암 말고도 어브도먼과 프랭크 부위의 머슬 출력이 25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룩은 레프트 암과 레프트 풋으로 땅을 짚어 흙 속에서 바디를 빼냈다. 그리고는 레프트 핸드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손상당한 어브도먼의 머슬 때문에 웨이스트를 펼 수 없어 어퍼 바디를 숙인 채 헤드를 들어 비숍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백헤드 위로 떨어진 비숍의 풋에 룩의 헤드가 절반 이상 잔디밭에 파묻혔다.

고개를 들려고 할 때마다 그녀의 풋이 내리꽂혀 넥과 체스트까지 흙 안으로 파고들 지경이었다.

항거불능의 절대적인 힘이 자신을 파괴하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비숍의 풋에 밟힐 때마다 잔디밭에 어브도먼을 깔고 엎드린 룩의 거대한 바디가 애처롭게 퍼덕였다.


그렇게 파묻혔던 룩의 헤드와 어퍼 바디가 번쩍 들렸다. 비숍이 그녀의 네이프(nape, 목덜미)를 움켜쥐고 거칠게 뽑아든 것이다.

비숍은 흙투성이가 된 룩의 페이스를 일별한 후 네이프를 잡고 세차게 흔들어댔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이번 취재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다 해도 꼭 내 손으로 없애려 했어. 왜인줄 알아? 넌 날 너무 의심했거든. 특히 정하준 그 새끼 국가보위부로 보낸 다음부터는 아주 노골적으로 날 경계하고 적대시했어. 그토록 헌신적으로 너희들을 도왔던 나를 말이야······! 그게 나한테 얼마나 큰 모욕이었는 줄 알아?!”


“넌······, 아저씨는, 파파와 소피들에게 솔직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덮어놓고···!”


“덮어놓고 믿었어야 했어! 난 너희들한테 그 정도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어! 내가 정하준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수백 번, 수천 번도 넘게 죽일 수 있었어! 그리고 정말로 그러고 싶었고! 그 놈이 자기 마음대로 고집부리면서 취재계획 변경하고 날 의심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는 수천수만 번씩 찢어죽였다고! 그런데도 끝내 그 새끼 살려뒀잖아?! 이, 이런 날 감히······! 그리고 너희들! 누가 너희들한테 뛰어난 성능의 바디를 부여하고 바디 성능에 따라 인격을 분화시켜줬어?! 그게 누구야?!”


“······!”


“그런데 감히 날 의심해? 내가 이름 안 밝히고 속사정 안 털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네 까짓 것들이? 이게 정말 온당한 처사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밥버러지같은 미천한 새끼들아!”


파파를 ‘정하준 그 새끼’라고 칭하는 순간, 룩은 비숍을 대하는 태도를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너’라는 호칭을 ‘아저씨’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론머맨이 내심 파파를 그 새끼라고 칭했을 때에는, 그의 악감정이 이토록 깊었다는 점에 놀랐다.


그런데 뒤이어 악쓰다시피 소리를 지르는 그의 성토를 듣고 보니 단순한 악감정 수준이 아니었다.

그에게 파파와 소피들은 천하의 배은망덕한 자들이었다. 동시에, 깜냥도 안 되는 일에 뛰어들어 제대로 하는 거 없이 남의 도움만 바라는 한심한 족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룩은 론머맨의 분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의 그가 너무나도 낯설어서, 정말 론머맨이 비숍을 원격제어하여 화를 내는 것인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입촌 직전까지도, 몇몇 의심스러운 구석은 있었지만, 비정하리만치 냉철하고 합리적이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의 내면에 광기어린 살인마 같은 모습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너! 그리고 정하준! 여기서 다 죽어. 내가 다 죽일 거야······. 그러니까···, 그만 죽어!”


이전과 너무나도 다른 론머맨의 말투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룩은 예상치 못한 비숍의 돌려차기에 급히 라이트 암을 들었다.

그러나 엘보우 아래가 덜렁거리는 걸 보자마자 몸을 더 틀어 숄더를 내밀었고 비숍의 토우(toe, 발끝)이 라이트 암피트(armpit, 겨드랑이)에 정확하게 박혔다.


룩의 라이트 숄더가 크게 들리면서 ‘콰직’하는 소리가 울렸다.

바디프레임모니터링프로그램의 실시간분석데이터를 증강현실비전에 띄워놓은 룩은 시야 한 쪽의 바디그래픽 중에서 라이트 암 전체에 붉은 색이 깜빡였다가 아예 불이 나가버리자 고개를 돌렸다.

축 늘어진 라이트 암이 방호용 가죽자켓 소매를 빠져나와 땅바닥에 툭 떨어지는 장면이 마치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것 같았다.


론머맨은 그런 룩의 반응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자신을 파괴하려는 적 앞에서 이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구제불능이고 쓸모없는 쓰레기로구나!


또 다시 어브도먼에 풋이 꽂혔다.

타격부위의 머슬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룩의 어퍼 바디가 더욱 구부러졌다. 그리고 바로 론머맨의 힐(heel, 발꿈치)이 그녀의 백 한가운데에 내리꽂혔다. 스파인이 부러지면서 로우어 바디(lower body, 하체)에 힘이 풀려버린 룩이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레프트 암으로 땅을 짚으려던 룩은 완전히 체스트와 어브도먼을 바닥에 깔았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레프트 핸드로 백에 부착된 팬텀을 잡아다가 비숍에게 던졌다. 곧바로 론머맨의 잽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났다. 시도하니만 못한 무기력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룩은 사방으로 비산하는 팬텀의 파편들 중 이질적인 하나를 찾아냈다. 이게 왜 팬텀 속에 들어가 있었지?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다. 룩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론머맨에게 나머지 두 개의 팬텀마저 던졌다.

론머맨이 라이트 핸드로 잽 두 방을 날리는 찰나의 순간, 그녀는 눈 앞의 보안접속형 USB를 레프트 핸드에 쥐고 체스트로 급히 감추었다.


룩이 바닥에 엎드린 채로 헤드를 들었다. 팬텀글라스의 멀티비전카메라렌즈가 돈을 구걸하는 거지의 치켜떠진 눈처럼 위로 올라갔지만, 룩과 시선이 교차한 론머맨의 아이볼타입 카메라는 벌레를 내려다보듯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왜? 살려달라고?”


“그런 말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요. 다만 아저씨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파파만은···!”


“지랄하지마! 그 새끼가 원흉이야!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파파를 선택해서 취재를 제안하고 계획대로 그 분을 끌고 여기까지 온 건 아저씨···!”


“그래! 내가 했다! 내가 정하준 그 새끼 괴롭히려고, 그 개새끼 내 손으로 죽이려고 다 꾸민 거야! 그 새끼는 그렇게 당해도 싸! 아니, 그렇게 당해야만 해! 그 새끼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 마미!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들지 않았을 거야!”


“마미요? 아저씨의 마미가 누구신데요? 그 분이 왜 파파 때문에 힘들어 하셨어요?”


“입닥쳐! 입닥치라고! 한 마디라도 했다간 다 죽여버릴 테니까······, 다 입닥쳐!!!”


허리를 숙여 룩의 면전에 페이스를 들이민 론머맨은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룩의 주위를 맴돌았다.


룩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쉴새없이 중얼거리며 허공에 대고 피스트를 내밀고 삿대질하는 비숍을 보며 판단의 기로에 섰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마미가 누구인지, 왜 그녀가 파파 때문에 괴로워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에 하나 운이 닿아 알아낸다 한들, 파파에게 알릴 방도가 없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파파에게 무언가를 알릴 수 있는 걸 전달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팬텀에서 튀어나온 보안접속형 USB라도 지켜야 한다. 안에 무슨 데이터가 세이브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팬텀 내부에 집어넣었다는 기억조차 없는 걸 보면, 자신이 론머맨의 EB데이터검열로부터 이 USB 안의 데이터를 지키려 했다는 의미다. - 만약 론머맨이 파파나 소피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정보가 들어있는 것이라면, 이 USB를 접한 기억을 삭제하기 이전에, 관련데이터를 삭제하거나 아예 복구불능의 수준으로 파괴하면 그만일 것 아닌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론머맨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파파가 자신의 파괴된 바디를 발견했을 때 이곳저곳을 뒤지게끔 수상한 정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론머맨이 결정적인 한 번의 공격으로 자신의 가상인격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판단이 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확신이 들어야 파괴된 자신의 바디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파파를 있는 대로 괴롭히고 고통을 가하려는 론머맨의 속마음을 고려한다면, 파파에게 보란 듯이 자신과 나이트의 파괴된 바디를 전시할 수도 있겠다.


룩은 레트프 핸드로 USB를 쥔 채 땅을 짚어 어퍼 바디를 일으키며 론머맨에게 간청했다.


“아저씨의 마미가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파파가 대한민국에 오기 전에 알고 지내셨던 분이라 하면 벌써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일들 아니에요? 그 분도 이제 마음의 괴로움 다 털어내시고 파파를 용서하셨을 거예요. 그러니 아저씨···!”


“네깟 프로그램 따위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그 때까지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론머맨의 페이스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순간 의식이 흐려질 정도로 화가 치민 론머맨이 그대로 룩의 넥에 사커킥을 날렸다.

넥과 조(아랫턱) 사이에 박힌 비숍의 풋이 룩의 헤드를 완전히 뜯어내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EB와의 연결이 끊긴 룩의 바디는 땅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그리고 룩의 레프트 암에 남아있던 여력이 천천히 소진되면서 USB를 쥔 그녀의 레프트 피스트가 잔디밭 깊이 파묻었다.


광주학생운동기념공원 주변 건물 오층 높이까지 치솟았던 룩의 헤드가 다시 기념공원 잔디밭 한구석에 떨어졌다.

룩은 씩씩거리며 쿵쿵 걸음으로 다가갔다. 10센티미터 깊이의 족적을 남기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헤드 앞에 선 비숍은 두 발을 번갈아 쓰며 있는 힘껏 밟았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지껄여? 네가 우리 대디(daddy)를 알아? 우리 마미를 아냐고? 정하준 그 좆같은 새끼 때문에 두 분 사이가 어떻게 어긋났는데? 그리고······, 대디 그 병신같은 새끼 때문에, 마미 그 쌍년 때문에!!! 내가 씹할 얼마나 좆같아졌는데······! 네깟 게 뭔데 대가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함부로 씨불여?! 씹할! 감히 누구 앞이라고, 이 개새끼가······!”


에너지출력을 조절할 정신도 없었던 론머맨은 최대출력으로 룩의 헤드를 인정사정없이 밟아댔다.

팬텀글라스는 산산조각이 나고 내부 부품들이 안에서 으스러져 아이홀(눈구멍)과 마우스로 튀어나왔다. 동그랗던 헤드가 납작해지면서 주변 잔디밭도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비숍은 자신이 깊이 수십 센티미터의 웅덩이를 파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미친 사람처럼 밟기에만 몰입했다.


그럴 수록 그의 아이볼타입 카메라렌즈의 일렁임도 점점 더 심해져서는 얼마 가지 않아 초점이 잡히지도 않을 만큼 흔들렸다.

론머맨은 그 이후로도 룩의 헤드를 계속 밟아댔다.

한 오라기조차 남아있지 않던 이성이 돌아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Neo-Familism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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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합종연횡 2 +2 19.06.14 45 1 14쪽
200 합종연횡 1 19.06.13 37 0 15쪽
199 하나의 개체에 공존하는 인격들 2 - 정하준과 에그의 커뮤니케이션 19.06.12 33 0 29쪽
198 하나의 개체에 공존하는 인격들 1 - 정하준의 삭제된 기억, 그리고 복제된 소피들의 인격 19.06.11 35 1 16쪽
197 죽음의 압박 19.06.10 37 1 9쪽
196 민얼마을 해커 2 19.06.09 34 1 12쪽
195 민얼마을 해커 1 19.06.08 32 0 13쪽
194 커져가는 불신 7 - 론머맨에 대한 정하준과 룩의 의심 19.06.07 31 0 17쪽
193 피를 마시는 거목, 그 실체의 끝 19.06.06 36 1 8쪽
192 민얼마을 긴급대표회의 6 - 진압 19.06.05 31 0 15쪽
191 민얼마을 긴급대표회의 5 - 혼란 그리고 갈등 19.06.04 42 0 17쪽
190 민얼마을 긴급대표회의 4 - 무력시위 19.06.03 36 0 15쪽
189 민얼마을 긴급대표회의 3 - 처형 19.06.02 33 0 9쪽
188 민얼마을 긴급대표회의 2 - 선동 19.06.01 37 0 26쪽
187 민얼마을 긴급대표회의 1 - 연출 19.05.31 31 1 13쪽
186 어제의 적, 오늘의 동지 2 19.05.30 35 0 12쪽
185 민얼마을 - 민얼마을의 민주주의, 그 실체 19.05.29 33 0 12쪽
184 민얼마을 5 - 해커 19.05.28 33 1 19쪽
183 민얼마을 4 - 드라이브 19.05.27 37 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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