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민계획의 진면목 2
인공지능, 민주주의
갑자기 짜증까지 치밀어올랐다.
구식 기계설비 천공장치의 종이테이프들을 헤집고 반공전략연구소 휴머노이드의 분리된 파트들을 거칠게 밀어냈지만 역시 보이는 건 물 뿐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침상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조달평의 방은 물론이고, 밥 같은 거 먹을 필요도 없는 휴머노이도 소피들의 거처까지 훑었지만 마찬가지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민얼마을 주민들 거주구역에 머물 때에는 식당에서 요리를 했다. 직접 재배한 부식재료와 캔 음식을 조리하여 반찬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 건물에는 딱히 조리할 공간이나 설비가 없다.
임어영이 일 주일에 한 번 밥과 반찬을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그럼 음식을 보관한 냉장고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건물 전체를 훑은 정하준의 발길이 멈춘 곳은 연구실 옆 시건된 방문 앞이었다.
이 안에 뭐가 있기에 자물쇠까지 달아가며 잠궈놓았을까? 개량형 휴머노이드를 거치한 연구실도 개방한 양반이?
극도의 배고픔에 시달리던 정하준의 본능이 뇌를 자극했다.
BB데이터검색프로그램보다 빠른 속도로 비상식량이라는 한 단어를 떠올렸고, 자신과 연관되지 않은 다른 모든 상념과 감정들을 지워버렸다.
그래. 밥이 안 올 경우를 대비해서 캔 같은 거 보관해놓았을 거야. 그리고 자신들 이전에도 누군가 석호필의 비상식량을 훔치러 온 적이 있어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 거야.
아니지. 민얼마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배정된 음식을 빼앗으면 목이 날아가잖아?!
에이. 설마···, 반공전략연구소 보안네트워크를 해킹한 론머맨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무리 그가 자신을 쓰다 버리려 한다 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는 걸 보고만 있겠어? 일단 살려두고 자기 손으로 죽이겠지.
정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큼지막한 도끼가 자신의 두 손에 들려있고, 자물쇠와 손잡이가 달린 부분이 완전히 뜯겨져 나간 문에는 사람 머리통이 들낙날락할 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장기보관이 가능한 캔들이 수북히 쌓여있는 장면을 기대하며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선 정하준은 휑하니 비어있는 방에 어깨가 축 쳐졌다.
아무 것도 없어? 먹을 것도 없는 방을 뭣 때문에 자물쇠로 잠궈놓은 건데?!
주변을 둘러보던 순간 그의 시선이 문 쪽 벽 구석을 향했다.
1미터 남짓한 길이의 길쭉한 기계장치가 보였다. 거무튀튀한 몸체는 지네처럼 마디가 나뉘어져 있었고, 마디마다 양쪽으로 케이블과 관이 꽂혀져 있었는데, 분절형 기계장치를 거치하고 있는 기계설비로 이어졌다.
뭐야 저건···!
순간 그의 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기계장치였다. 하지만 저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거치대에 세워진 기계장치의 형태가 석호필의 연구실에서 보았던 개량형 BSS/EBF의 바디 중앙에 내장되었던 스파인에 연결된 EB시스템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가장 윗부분, 배구공만한 크기의 투명한 반구형 용기 안에는, 메모리칩 대신 인간의 생체두뇌가 담겨 있었다.
개량형 BSS/EBF의 개량된 생체신경유지장치였다.
정하준은 개량된 BSS/EBF의 트렁크가 두 파트로 분리될 수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유지장치에서 척추를 보호하는 부위의 부피가 획기적으로 준 데다가, 그 자체로 스파인처럼 금속제 외장이 마디 마디를 구분하여 둘러싸는 형태였다.
이렇게 되면 인간처럼 허리를 굽히거나 돌리는 동작이 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체스트와 어브도먼 사이에 크고 작은 유압식 파이프를 설치하여 척추의 움직임에 따라 트렁크를 굽힐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각 마디마다 좌우 양쪽에 아주 작은 크기의 포트들이 예닐곱 개씩 설치되어 있는 점도 눈에 띄였다.
아마 휴머노이드 바디의 너브 화이버(nerve fiber, 인공신경섬유(다발))의 잭을 꽂는 방식인 것 같다.
척추의 생리작용을 관장하고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척추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기계의 전기적 신경반응을 화학적으로 전환하는 시스템까지 이 작은 절지형 기계장치 안에 담았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지? 연구실에 있는 휴머노이드에는 EB와 스파인이 장착되어···!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일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순식간에 훑고 지나간 전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정하준은 바닥에서 발이 떨어지자마자 연구실로 달려갔다.
파트들이 분리되어 있는 개량형 휴머노이드의 오픈된 백과 백헤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금속제 스파인에도 좌우 양쪽으로 여러 다발의 너브 화이버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를 일일이 손으로 뽑아서 스파이널 칼럼(척추를 이루는 각각의 뼈, 마디) 각 파트의 포트와 섬유가닥 끝 잭을 살핀 후 옆 방으로 돌아왔다.
BB데이터검색프로그램으로 방금 전 시야에 잡힌 영상을 증강현실비전 한 쪽에 게시해놓지 않더라도 똑같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정하준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저 휴머노이드 바디의 너브 화이버에 연결하면 생체두뇌와 척추로도 바디를 제어할 수 있을까.
그냥 겉모양만 똑같은 게 아닐까.
아니, 호환되지도 않는 시스템을 굳이 동일한 형태로 제작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저 기체는 인간의 생체신경과 EB와 스파인으로 구성된 너브시스템이 호환된다는 건가.
인간의 생체신경과 너브시스템을 마음대로 갈아끼울 수 있는 휴머노이드 바디? 그런 휴머노이드 바디시스템을 왜 개발했을까?
생체신경과 너브의 바디제어적합도를 비교분석하기 위한 실험용 기체일까?
아니면 기체별 독립성이 강한 생체신경, 반면에 네트워크접속에 의한 중앙제어시스템의 일괄통제가 용이한 너브의 특성 때문에 상황에 따라 활용가치가 다른 건가?
BSS/EBF의 시스템을 개선한다는 대목을 염두에 둔다면 후자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다.
스스로에게 던지던 질문은 보다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고 들었다.
생체두뇌와 척추로 구성된 중추신경계가 피와 살, 뼈로 이루어진 몸을 제어하면 인간이다.
반면에 EB와 스파인의 센트럴너브(중추신경)로 금속제 바디를 움직이면 휴머노이드다.
그럼 생체신경이 바디를 제어하면? 그건 인간인가, 휴머노이드인가?
이건 둘 중 하나로 단정지을 수가 없다.
인간도 아니고 휴머노이드도 아닌 존재가 개발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래 전 한계에 다다른 인긴진화의 벽을 뛰어넘은 일대 쾌거인가. 아니면 지금의 사회적 통념상 그저 괴물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출현한 걸까.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입에 침이 고이고 속이 메슥거렸다. 뱃속이 텅 비어서 게워낼 게 없는데도, 장이 배배 꼬이고 목젖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위액의 시큼한 맛이 혀뿌리를 자극했다.
그 자리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동안 욕지기와 씨름하며 끈적끈적한 침을 질질 흘렸다.
뭘 쏟아낸 것도 없이 힘만 잔뜩 뺀 꼴이 된 정하준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물로 입을 헹구고 빈 속을 달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인 건, 실험 중에 민얼마을의 인간 주민에게 강요된 절대적 평등의 원리가, 휴머노이드 바디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어떻게 작용했냐는 점이다.
생체신경과 EB 센트럴너브체계의 시스템호환연구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민얼마을 실험을 수십 년간 진행해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 또한 컨트롤 타워에서 답을 얻어야 할 것 같다.
산더미 같았던 의문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몇 가지 근본적인 물음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리고 막연한 느낌이지만, 지금껏 밝혀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이 모든 걸 설명해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모든 게 설명되는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전체 그림의 핵심이 되는 퍼즐을 끼워맞추는 게 아니라, 그동안 막혀있던 구멍이 뻥 뚫리면서 지금껏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든 걸 한꺼번에 빨아들일 것 같다.
왜 이런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까.
론머맨은 반동형무소 실험 당시부터 반공전략연구소 보안네트워크를 해킹하여 석호필의 존재를 알았고, 제2차 한반도전쟁 당시에 투입된 BSS/EBF에 관한 기밀도 파악했으며 미합중국의 세계시민계획과 미일한이 함께 참여한 반공인격표준화정책과 이를 위한 생체신경적출사업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
그 후 혼자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나서 자신에게 기획보도취재를 제안한다. 그리고 나서 차근차근 일정을 진행시켰다.
미한연합반공방어구역 내 잠재적 반체제사상범 격리구역에서 양구지하시설로, 그리고 사상정제원과 청송형무소, 대동아연구원, 민얼마을까지······. 론머맨이 제공한 자료상에 반공인격표준화정책과 관련된 곳은 거의 모두 취재했다.
이제 한 곳, 반공전략연구소만이 남았다. 이는 아마도 컨트롤 타워 취재로 대체하겠지.
그럼 이제 마지막인가.
정하준은 함께 있던 다른 이들을 떠올렸다.
석호필은 탁혼촌 실험의 유인자였던 네 명의 직능위원들을 만나러 갔으려나. 반공전략연구소의 주민수거작업이 시작된 지금 그들에게는 어떠한 지시가 떨어졌을까?
론머맨의 비숍은? 마찬가지로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상황에서 보안네트워크해킹에 성공한 반공전략연구소 컨트롤 타워 빼고는 달리 갈 곳이 없으리라.
그럼 갈 곳 없는 조달평은? 론머맨의 꾀임에 빠져 동행했거나 강제로 끌고 갔겠지.
룩과 나이트는? 자신의 지시대로 그들을 미행했겠지. 만에 하나라도 2세대 BSS/EBF에게 제압당해 컨트롤 타워로 끌려가지나 않았을까 걱정이다.
결국 다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만 남았다.
왠지 스스로가 마지막 엔딩을 위한 무대에 오른 배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무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각본가와 연출자의 반응을 상상했다.
대본에 적힌 그대로 대사를 하는지, 자신이 지시한 대로 연기하는지를 감시하는 그들의 눈길이 피부에 와닿는 듯 하다. 민얼마을에 들어오기 전에는 론머맨이 각본가이자 연출자였지만, 지금은 반공전략연구소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자신은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이미 밖에서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정해져 있는 답대로 움직여야만 하고, 답과 어긋나게 반응하면 그에 따른 처벌과 시정조치가 따른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자신 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 주민들도 그런 처지였다.
실험의 룰과 목표를 알려주지도 않고 이에 어긋난 언행을 하면 가차없이 목을 자른다.
그 공포심을 무기 삼아 주민들이 주관자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게끔 했다.
그런 면에서 론머맨과 반공전략연구소가 여러 모로 닮았다.
Neo-Familism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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