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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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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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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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3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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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해의 그림자 140

DUMMY

왜 아비는 이토록 어려운 일을 시키셨을까. 누군가를 달래거나, 구슬리는 일은 도무지 소질이 없는 자신한테 왜 하필...허후는 비를 흠뻑 맞아가며 별채 앞에 서성였다. 어떻게 계집을 달래어 집에 보내나 고민하는 허후의 귀에 하필이면 두 남녀의 농도짙은 대화가 들려왔다.


"손 좀 치우래도..."

"아흐 간지러워요..."

"그리 좋으냐..."

"저리, 저리 가요..."

"이 옥비녀 너 준대도...이래도 집 생각이 나느냐?"

"진짜로..."


계집의 음색이 점점 변해가는 것을 허후는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 진흙 묻은 징신을 벗지도 않고 성큼성큼 대청으로 올랐다. 버선발로 올랐으면 소리가 적었을 것을, 양쪽 신에 박힌 뾰족한 징들이 마루를 밟을 때마다 다각다각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방안에선 허견이 한손에 옥비녀를 들고, 또 한손엔 벌거벗은 계집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지분거리는 참이었다. 허견은 계집을 희롱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가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난 허후의 얼굴에 혼비백산했다.


"뭐야 너, 너 뭐야?"

"..."


허후는 대답도 않고 등허리에서 칼을 빼어들고 싸늘하게 방안을 응시했다. 그 뒤로 유독 높은 담장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워서 더욱 무시무시했다. 계집은 새하얗게 질려서 허견의 팔을 잡고 그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돌려앉히며 허견은 오히려 그 등뒤에 숨어버렸다.


"왜, 왜 이러는 게냐?"


허후는 눈앞에서 볼썽 사납게 다리를 벌린 계집을 보고 당혹감에 얼굴이 벌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계집이 황망히 다리를 오므렸다. 치맛자락으로라도 가리고 싶었지만, 허견의 엉덩이에 깔린 채였다. 계집은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느라 낑낑거렸다. 하지만 허견은 당장 계집의 민망한 사정엔 관심도 없었다.


"왜 이러는 거냐고!"

"대감마님께서 밀화구슬 사건을 아셨습니다."

"밀화구슬?"

"전모로 신분을 감춘 그분 말입니다."

"너...네놈이..."


허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피가 사납게도 휘몰아쳤다. 아비가 알았다니, 온몸에서 피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헌데 당장 허후가 살기 등등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사실이 더 무시무시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판국에 계집이 자꾸 자신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으리...엉덩이 좀..."

"하여 자중자애 하시랍니다. 앞으로는."

"나으리..."

"아 가만히 좀 있어!"


허견은 걸리적거리는 계집을 확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하였다. 그저 공포감에 사로잡혀 고막이 멍하였다.


"나더러 자진...자해自害하라고?"

"자중자애. 사랑할애愛자를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지, 진짜 해치려는 게 아니냐? 그, 근데 칼은 왜?"

"달래려구요.."

"이게 지금 달래는 거냐?"

"나름대로."

"하..."

"계집이나 이리 보내주시죠."


허견은 한순간 겁을 지어먹었다가, 허후가 자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계집을 끌어내려는 것임을 알고, 계집을 얼른 문앞으로 등떠밀었다.


"자, 잘가라..."

"나, 나으리..."


계집이 울상이 되어 허견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의 손을 두손으로 부여잡았다.


"나, 나으리...살려주시어요."

"얘 왜 이래? 누가 너 죽인대? 그냥 집에 보내준대잖아."


허견은 질겁하여 상체를 뒤로 젖혔다. 언제나 마음에 드는 계집을 납치해서 가둬놓고 유혹하여 계집이 자신에게 홀딱 넘어왔다 싶으면 흥미를 잃고 돌려보내는 그였다. 이제 보니 이 계집도 더는 재미가 없어졌다. 헌데 재미없는 계집이 애걸복걸까지 한다.


"소녀는 이미 한달이나 나으리가 데리고 사셨잖아요. 나으리가 제 머리 올려주셨는데...혼인한 거나 마찬가진데..."

"그냥 개꿈 좀 꿨다 생각하고 눈 딱 감고 돌아가라. 저 옥비녀 너 줄테니 갖다팔아서 한 밑천 챙기고."

"저 돌아가면 소문나서 시집도 못 가요. 첩으로든 뭐로든 데리고 계셔 주시어요. 예?"

"뭐? 첩? 처업? 네년 말고도 첩첩산중이거든?"

"나으리, 아니 서방님..."

"뭐? 서방? 얘 지금 뭐래니?"


허견은 한순간에 혈압이 오르는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옥비녀를 방바닥에 휙 내던졌다. 다음 순간 그의 빈손에 불끈 힘이 들어가더니 계집의 목줄기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서..."

"다시...!"

"나, 나으리..."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데...계집 모가지를 비틀어도 밤은 또 오겠지?"

"..."

"도련님!"


허후가 만류의 의미를 담고 소리쳐 불렀지만, 허견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두눈에 핏발이 서서 허후를 노려볼 뿐이었다.


"네놈이지?"

"..."

"네놈이 날 밀어내고 아들노릇 좀 해보겠다고 한 짓이지?"

"흥. 먼저 의심하시고 소인에게 알아보라 시키시더이다."

"그래, 뭐라시든? 날 죽여 중전마마께 속죄하신다더냐? 네가 바라는 것도 그거지?"

"..."

"꿈깨. 아버진 날 절대로 안버리시거든. 내가 아주 아버지를 똑 닮아서 말이야."


아비를 닮았다는 허견의 말에, 허후는 안면근육이 꿈틀하더니 고스란히 얼굴에 경멸감을 드러냈다.


"닥쳐. 더러운 놈이."

"더러워? 크크큭...드럽게도 똑 닮았지. 피가 어디로 가나? 내가 누구 피를 물려받았는데?"


실성한 사람처럼 허견은 콧잔등을 실룩거리면서 자조적으로 울고 웃었다. 그는 계집의 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


계집이 두손으로 허견의 한손을 잡고 어떻게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살살 녹여가며 살을 섞던 사내가 한순간에 변해버린 공포는 너무도 거대했다. 애원하듯 허견의 눈을 겨우 쳐다봐도 그 두눈은 어느덧 허후의 어깨너머로 다가선 아비의 얼굴에 못박힌 채였다.


"이게 누구 핀데...누구한테 보고 배운 건데? 내가 왜 이렇게 됐는데?"

"못난놈...아직도냐? 언제까지 날 원망하며 짐승처럼 살 거냐!"


허적은 한숨이 차올랐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놈이, 버러지가 되어버린 현실이 서글펐다. 하지만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을 보는 상처받은 짐승의 눈빛이었다.


"짐승? 짐승?"

"그럼 짐승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순간 허견의 그늘진 눈동자에서 상처입은 짐승의 광기가 비껴갔다. 허견은 입가를 비틀어 실실 쪼개었다. 웃을 수록 더욱 사나운 분노가 휘몰아쳤다.


"내가 짐승이면 아버지는요? 아...정승? 짐승같은 정승? 아니면 정승같은 짐승?"

"..."

"세상 모두가 나한테 손가락질을 해도 아버진 그러면 안되지. 무슨 자격으로?"

"..."

"내 눈 앞에서 윤이나 좀 치우라고요! 그 계집애 보기만 해도 확 돌아버리니까! 이렇게."


씹어먹듯 입술새로 핏물을 뚝뚝 떨구듯 하는 허견의 말에 허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허견은 나머지 손도 계집의 목에 갖다대었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두눈에 실핏줄이 터지면서 제대로 숨도 못쉬는 그녀를 잔인하게 내려다보며 그렇게 그가 더욱 두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계집의 숨통을 끊기 직전, 갑자기 허벅지를 불쏘시개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파고들더니 시원한 느낌이 뒤따랐다.


"크...헉..."


허적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허견의 허벅지에 칼이 쑤셔드는 것도, 한방울의 피도 아까운데 붉은 피가 콸콸 솟구치는 것도, 마치 그 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막아내지 못한 자책과 후회가 엄습했다.


"견아! 괜찮으냐?"

"..."

"후야! 이게 무슨 짓이냐?"

"당분간 그짓을 못할 겁니다."


허후는 피 묻은 칼을 손에 든 채로 멧돌을 돌려 짓이기듯, 꾹꾹 누른 음성으로 답하였다. 정신이 아득히 멀리 달아났다가 돌아오는 듯이 허견이 두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가는 두눈에서 초점이 탁 풀렸다.


"네 이노옴...!"

"보시다시피, 누구 구슬리는 재주는 없어서요. 그냥 데리고 살라 하시지요."


담담히 말하는 허후를 노려보고 허적은 다급히 두리번거리면서 머슴들을 찾아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놈이...여봐라! 누구 없느냐? 황가야! 누구 없느냐?"

"..."

"여봐라!"

"그럼..."


집안 여기저기서 머슴들이 등불을 밝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후가 차갑게 돌아서는데 고운 비단옷을 입은 열다섯살 소녀가 망연자실 눈앞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

"윤아..."

"무슨...? 무슨 짓을..."

"..."


허후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무는데, 등뒤에서 허적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 칼은 씻지 말고 그대로 서후행한테 갖다주거라."

"네?"

"가져가 보면 안다."

"..."

"피 묻은 칼이라도 좋다면야, 언제든지 빌려주겠다, 그리 말하거라."

"..."


허후는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하고 피묻은 칼을 칼집에 그대로 넣고, 그는 손에 묻은 피를 쓱쓱 옷 안쪽에 문질렀다. 그리고 걸음을 터벅터벅 내딛었다. 그 뒤로 허견이 고통에 덜덜 떨며 악다구니를 썼다.


"끄으끅! 저 새끼! 그지같은 게...끄으! 죽여버릴 거야!"


하지만 허후는 개의치 않았다. 마름 황씨를 비롯해서 머슴들이 하나둘 몰려나와 허견의 상세를 살피느라 수선을 피우는 것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두눈이 뎅그렇게 되어 불안하고 두려운 얼굴로 피묻은 칼과 허견, 그리고 자신을 번갈아서 쳐다보는 윤의 눈빛이 아주 조금 신경쓰일 뿐이었다.


오늘따라 밤이 왜 이리 긴지, 한숨 쉬며 그는 어둠 속을 똑바로 걸어갔다. 자초향이 감돌던 그날 밤에 자신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가 있는 그곳으로.



응애응애...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에 진홍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나 뿐인 공주가 죽은 지금, 궐 안에서 아기 울음 따위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자꾸만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 소리에 가슴골에 찬서리가 내렸다. 얼얼해진 가슴을 두손의 온기로 가만히 녹이려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진홍은 견디다 못해 일어나 앉았다. 장지문엔 한숨도 자지 않고 바짝 붙어선 하번 궁녀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였다. 꾸벅꾸벅 조는 건지, 머리를 아예 장지문에 기댄 듯한 그림자였다. 침까지 흘리고 얼굴을 장지문에 기댄 탓에 장지까지 축축히 적신 채로, 그림자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적삼과 속곳치마에다 천담복을 갖춰 입고, 진홍은 베개맡에 놓아둔 흰 옥비녀를 집으려다 그냥 그대로 일어섰다. 그저 장지문에 비치는 그림자의 머리쪽에 손가락을 갖다대어 조심스레 문창살을 톡톡 두드렸다.


"..."

"문을 열어라."

"..."

"문을 열래도."

"예? 예 마마."


그림자가 화들짝 놀라는 듯하더니 서둘러 장지문을 열었다.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봉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중전마마..."

"너는 못 들었겠구나."

"네?"

"..."


봉이가 멍하니 되물었다. 진홍은 대답 않고 울음소리를 따라 대청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대청 위를 감돌던 밤공기가 진홍의 온몸을 휘감았다. 대청 밑에서 고양이가 몸을 한껏 일으켜서 그녀를 보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니앵니앵.


아기 울음소리 대신 고양이 울음소리가 또렷하게 귓등을 파고들었다. 고양이라니. 아마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애기울음인 줄 알았을 터였다. 하지만 귀로 들으니 알고도 헷갈렸다.


"고양이였구나..."

"네?"

"..."


봉이의 반문에 진홍은 입을 꼭 다물었다.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들었다. 가뜩이나 가슴골이 시린데 오뉴월 밤공기를 쐬니 온통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진홍은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면서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하지만 이미 번져버린 냉기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진홍은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금 가슴팍을 문질렀다.


"중전마마, 찾으시는 게 있으시옵니까?"


봉이가 묻는 말에 진홍은 할 말을 잃었다. 건너편 동온돌의 대전 지밀나인들이 더욱 문앞으로 바짝 붙어서며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진홍을 보았다. 왕은 왕비의 사내인데도, 지금은 상중이라 함께할 수가 없으니, 그들에겐 기회였다. 왕이 자기네 소유인 양 중궁에게 텃세를 부릴 수 있는 기회.


"무슨 일이시옵니까?"


지밀 중에서도 색장나인이 맹랑한 눈빛으로 진홍을 잠깐 쳐다보곤 이내 고개를 숙여 공손한 척 물었다. 진홍은 그런 색장나인을 힐끗 쏘아보곤 책 잡힐 일은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코끝에 닿는 찬공기를 들이마시고 가만히 대꾸했다.


"답답해서."

"하오나 이런 심야엔..."

"상중에 합방은 안된다는 건 너희들보다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니 내게 법도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

"..."


색장나인이 움찔해서 고개를 숙였다. 혹여 사가에 서찰을 보내려고 찾으신 건가 하여 여쭌 거라고 둘러대려고도 하였지만, 중궁의 분위기가 어딘지 서늘했다. 중궁으로선 법도를 빌미로 자신의 지아비를 자기네 남정네인 양 행세하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잠깐이지만 그런 무엄한 짓을 꿈꾼 것이 들켰나, 중궁이 노여워서 자신들을 책망할까...두려웠다.


하지만 진홍은 그들에겐 무심한 듯, 대청마루 한복판으로 걸어나갔다. 정말로 밤바람을 맡고 싶은 건지, 밤하늘의 별이라도 보고 싶은 건지, 그렇게 그녀는 걸음을 내딛어서 대청마루에 잠자코 걸터앉았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응?


평소 신을 신고 벗던 섬돌이 아닌 것도 같았다. 섬돌을 내려다 보니 자신의 당혜와 지아비의 목화 사이로 은빛 달그림자가 머무는 듯하였다. 진홍은 가만히 섬돌에 비친 달그림자를 내려다 보았다.


"섬돌이 바뀌었구나."

"일전에 봉위단자와 함께 허판부사 대감이 전하께 보내온 것입니다."

"허판부사 대감이?"

"예, 두광이 말로는 허판사께오서 직접 연마한 것이라 하옵니다. 분명 봉위단자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직접..."


진홍은 신기한 눈빛으로 섬돌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반질반질하게 표면을 다듬어놓은 것을 보니, 병중에도 허목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섬돌에 하얗게 비친 달그림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순간 그녀는 섬돌 한켠에 떨어진 연보라빛 불두화 봉오리를 발견했다.


"이건?"


연보라빛 꽃봉오리라니...진홍은 상체를 숙여서 가만히 연보라빛 꽃봉오리를 줏어들었다. 이런 꽃을 어디선가 본 듯하였다. 춘사월이면 둥글게 뭉친 눈송이처럼 하얗게 피기 시작해서 오뉴월이 되면 점차 연두빛, 다시 연보라빛으로 변해가는 꽃...이런 꽃이 피던 곳이 한군데 있었다.


"..."


소각? 소각에 가셨던 건가? 줄곧 가신 건가? 당장 물어도 보고 싶었고, 가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컴컴한 밤중에는 오히려 함부로 처소를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날 겨우 통명전 연못에서 혼자 울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통명전을 함부로 벗어날 수가 없어서였다. 자신도 모르게, 통명전 주위에 뿌리가 박혀버린 나무처럼 되어버렸다.


가만히 불두화 봉오리를 들고 상념에 잠기는데, 대청마루 앞에서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홍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대청 앞을 똑바로 쳐다보았어도, 그녀의 시야에 잡히는 건 없었다. 그냥 그림자들만 가득한 밤풍경일 뿐이었다.


"..."


그래도 이상했다. 자꾸만 누군가가 이쪽을 지켜보는 느낌이란. 착각인가. 왜 자꾸 환청, 환각 같은 게 드는 걸까. 너무 예민해진 걸까. 진홍은 괜히 불안해져서 동온돌을 돌아보았다.


동온돌은 온통 불빛이 환하게 새어나왔지만, 기척이 없었다. 여태 자신이 대청으로 나와서 나인들과 대화를 나눴으니, 지아비가 장지문을 열어보게 할 법 한데도, 동온돌 장지문은 열리질 않았다.


진홍은 의아한 얼굴로 동온돌 쪽으로 한걸음한걸음 다가섰다. 대전 지밀나인들이 긴장된 눈빛으로 진홍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중궁에게 면박을 당한 탓에 복침은 아니 된다 이런 말이 쉽게 나오지도 않았다.


진홍은 검지를 입에 대어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곤, 가만히 대전 지밀나인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이 그 자리에 섰다. 대전 지밀나인은 영문을 몰라 두눈을 멀뚱거렸다. 마침 옆에서 졸던 또 한명의 지밀나인도 두눈을 뎅그렇게 떴다.


"기침 소리, 맞느냐?"

"예?"


진홍은 확신을 할 수가 없어서 대전 지밀나인들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하던 대전 지밀나인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제야 미약하게나마 왕이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기침을 하면서도 왜 왕은 아무도 찾지 않은 건지, 왜 아무도 왕의 용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열어보라."

"예."


동온돌 장지문이 열리고, 서안 위에 왕이 고개를 묻고 잠든 모습이 중궁과 대전 지밀나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얼핏 서안 위에 흑돌과 백돌이 뒤덮인 것이 진홍의 시야로 들어왔다. 설마? 진홍은 의아한 눈빛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중전마마, 송구하오나 상중이라..."

"안다."

"..."


진홍은 동온돌 문지방을 넘자마자 얼른 장지문을 닫아버렸다.


"중전마마!"


지밀나인들이 황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그 서슬퍼런 기운에 압도되어 감히 장지문을 열어젖힐 엄두는 내지 못했다.


진홍은 재빠르게 서안 위로 다가들어 흑돌, 백돌의 정체를 확인했다. 바둑돌은 그저 왕이 유희로 갖고 노는 것이 아니라, 그 윗면에 남용익南龍翼, 민종도閔宗道, 민취도閔就道, 민정중閔鼎重, 남천택南天澤, 윤휴尹鑴, 박태보朴泰輔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또한 그 돌들이 놓인 자리에는 삼공 육경 이하 관제가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진홍은 나인들이 문을 열 것을 대비해서 자신의 치마로 돌들을 가리고 섰다. 하지만 방금 자신이 보았던 돌들에 적힌 이름들이 뇌리에 아른거렸다. 아무래도 지아비가 그냥 유희로 바둑을 두는 게 아니라, 인사문제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괜히 긴장했나 싶어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데 마침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장지문 밖에서 들려왔다.


"왜들..."

"김상촉! 왜 이제 오시오! 마침 중전마마께오서 저 안에..."

"어엉? 중전마마께오서?"


진홍은 당혹스런 두광의 음성에 콧잔등을 찡그리곤 고개를 똑바로 들고 명하였다.


"김상촉만 들어오라."

"예? 예 마마..."


두광이 의아한 눈빛으로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섰다. 낮은 기침소리를 내면서 서안에 엎드려 곤한 잠에 빠진 왕을, 중궁이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두광의 눈에 들어온 순간, 중궁이 엄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문 닫거라."

"예, 예..."


두광은 얼른 문을 닫고 중궁의 옆을 살짝 돌아서 반대편으로 향하다가 움찔했다. 이제 보니 중궁은 그 치마로 서안 위를 나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린 것이었다. 혹여 중궁도 오해를 하나 싶어서 두광이 황급히 해명하려 들었다.


"이것은..."

"안다. 누가 오해하기 전에 치우기나 하거라."

"예이 마마."


두광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는 사실에 다행스러워하며 재빨리 흑돌 백돌을 목함에 담아서 구석으로 옮겨두었다. 그제서야 진홍은 한발 비켜섰다.


"그리고, 잔기침을 하시니 어의를 불러오라."

"예이."


두광은 얼른 답하고서 동온돌을 나서면서 언뜻 안쓰런 눈빛으로 왕을 흘끗 돌아보았다. 조금만 신경을 쓰고 몸이 좋지 않아도 목이 붓고 기침을 하는 왕이다. 게다가 울화가 쌓이면 바로 번열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최석정과 이민철을 동시에 떠나보냈으니 속병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두광이 나가고, 진홍은 자신도 동온돌을 나서려고 문가로 향하다가 문득 서안 위로 눈길을 던졌다. 바둑 기보라도 놓여 있으면 곤란하였다. 그녀는 사은전謝恩箋(왕의 은혜를 감사히 여겨 올리는 글)이 살짝 흐트러진 서안 위를 가지런히 정리하다 또 한장의 종이를 발견했다.


이것도 사은전인가 했더니, 중간에 文谷문곡 金壽恒김수항이라는 저자 이름과 함께 짧은 시가 적혀 있었다. 그저 짤막하게 3연으로 이루어진 5언절구였다.


진홍은 하필이면 아이兒자가 먼저 눈에 들어와서 움찔했다. 不敎兒再生. 간난아기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글귀가 단번에 그녀의 동공을 파고들었다. 去歲同時兒...


寸草萎霜雪 하찮은 풀은 서리눈에 시들어도

春來還復榮 봄 오면 도로 무성해지건만

天心何厚薄 천심은 어찌 후하고도 박하여

不敎兒再生 아기는 다시 살려내지 않는가.


隔隣聽呱呱 이웃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

幾度錯疑汝 몇번이나 헷갈려 너인가 하였으니

去歲同時兒 지난해 같이 태어난 그 아이

如今已學語 어느덧 벌써 말을 배우는구나.


忍淚已垂睫 눈물을 참아봐도 벌써 속눈썹에 맺히고

欲忘還復思 잊으려 해도 도로 생각이 나서

呑聲向暗壁 울음소리 죽여 어둔 벽을 향했으니

恐被汝孃知 혹여 네 어미 알까 두려웠단다.


서안 위의 시를 함부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다. 하지만 시는 너무도 짧았고, 진홍의 눈은 너무도 빨랐다. 차라리 무지렁이였더라면, 그저 보기만 하고 읽지는 못했을 것을. 하필이면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눈속에 들어오고, 머릿속에 들어왔다. 진홍은 떨리는 손으로 서안 위에 도로 종이를 내려놓고, 쫓기듯이 동온돌을 뛰쳐나왔다.


"마마?'

"..."


진홍은 그대로 맥이 탁 풀려서 장지문 창살에 등허리를 기댔다. 의아한 눈길로 지밀나인이 그녀를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방금 읽은 문자들이 눈앞에 춤을 추는 참이었다.


"..."


목울대로 치미는 울음을 삭이면서, 진홍은 시야를 덮은 시를 생각했다. 문곡 김수항. 교아敎兒(간난아기)라는 단어만 봐도, 그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핏덩이를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웃집 아기 우는 소리에 죽은 아기가 생각나서 아내가 들을까 겁이 나서 홀로 벽으로 돌아서 애써 소리죽여 우는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김수항의 모습에서 지아비는 자신의 모습을 읽었던가. 그래서 그렇게 서안 위에 놓아두고 몰래 읽어보던 건가.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고 해도 벌써 코끝이 매웠다. 진홍은 소리 만은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아냈다. 온힘을 다해서 꾹 참느라고 그 가냘픈 어깨가 떨렸다. 목도 얼얼했다. 그런데 당장 가슴골이 또 하얗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


서안 위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던 숙종은 눈을 뜨자마자 바둑돌이 통째로 사라진 것을 보았다. 게다가 서안 위에 놓인 종이들과 부채의 위치도 한손가락 굵기 정도로 변동이 있었다. 숙종은 서안 가장자리와 책의 사이로 한손가락을 넣어보고, 위치가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평소 의심이 많아서 자리를 비우거나 할 때면 으레 위치들을 파악하고 나서는 그였다. 이번에도 누군가 만진 모양이었다.


"두광아?"

"..."


대답은 없었다. 장지문엔 평소대로 지밀나인들의 그림자가 비치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림자가 흔들흔들하였다. 장지문 너머로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느낌이었다.


중궁?


비녀도 꽂지 않은 그림자이긴 해도, 왠지 숨소리 만으로도 기분이 묘했다. 숙종은 가만히 팔을 뻗어, 장지문 그림자에 손을 대어보았다. 사람의 체온이 실린 손어름을 느꼈는지, 그림자가 움찔했다.


"..."

"중궁?"

"..."

"중궁 맞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요?"


장지문 저편에서 왕의 옥음이 물어오자, 장지문에 기대어 있던 진홍은 물론, 자리를 내어주고 한발 비켜서 있던 지밀나인도 놀라버렸다.


그림자만 봐도 안다? 그럴 리가.


진홍이 지밀나인에게 눈짓했다. 대신 답하라는 신호였다. 감히 왕을 속일 엄두가 나질 않는 지밀나인이었지만, 왕이 정말로 중궁의 그림자만 봐도 알아차리나, 믿고 싶지 않아서 좀더 시험해보고 싶기도 하였다.


"아니옵니다. 전하, 계옥이옵니다."

"죽고 싶으냐?"


숙종은 살벌하게 대꾸했다. 장지문에 기댄 그림자를 노려보았다가, 다시 그 옆으로 시선을 틀면서.


"어떻게 아셨사옵니까?"


장지문에 기댄 그림자가 고요히 답하였다. 역시 중궁의 옥음이 맞았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노래 같은 목소리.


"촉."

"네?"

"서안 위의 시를 보았소?"

"송구하옵니다."


눈물을 들킬 때면 당황해서 부인하면서도, 허물을 들킬 때면 당당하게 시인해버리는 중궁이, 숙종은 어이 없게도 좋았다.


"그래서 운 거요?"

"울지 않았사옵니다."

"중궁답소."

"저 답다니요?"

"눈물은 감추고, 허물은 들추고. 그래서 난 중궁이 좋소."

"..."


눈물은 감추고 허물은 들추고, 그래서 좋다? 진홍은 무슨 얘기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여 두눈을 깜빡였다. 솔직하지 않아서, 하지만 정직해서 좋다? 그런 의미인가? 낯부끄러운 고백이라도 한 듯 지아비가 머쓱한 음성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시는 영암에서 유배 중인 김수항이 2년 전에 간난아들을 잃고 쓴 오언절구요."

"..."

"자식까지 잃고 유배살이 하는 게 안타까워 양이시키려 하였더니 남인들이 반발이 심하오."

"..."

"사부 역시 더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잡은 손에 힘이 빠져서...오늘 문외출송 시켰소."


숙종의 음성이 허탈했다. 그래서 신료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을 갖고 고민하셨구나. 진홍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는 애써 등허리를 꼿꼿이 하고 심상하게 답하였다.


"공인恭人(5품관의 부인) 이씨가 딸을 낳았다지요."

"..."


숙종이 잠시 대꾸를 않자 진홍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점점 가슴이 비고, 시고, 식고...남의 행복을 축복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죽은 아기들 명복을 빌게 된다.


"그래도, 최사부도 딸이 태어난 건 보고 가게 되었군요."

"그렇게라도 해줘야...의리를, 도리를 지키는 것 같아서."

"네..."


진홍은 가만히 웃었다. 그런데 입은 웃는데, 눈은 울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고개를 떨굴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더욱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크게 떠야 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그런 진홍의 어깨에, 장지문 하나 사이에 두고 지아비가 마주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가느다란 문창살 하나 사이에 두고 얇고 팽팽하게 장지를 바른 그 장지문 하나 사이에 두고 지아비의 등이 닿는 느낌은, 미묘한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나는 내가 정말로 태산처럼 의리 있는 인간인 줄 알았소."

"예?"

"왕의 무리는 의리 따윈 없다고 떠드는 금언들...보란 듯이 의리를 태산 같이 지킬 수 있는 나인 줄 알았소."

"..."

"하지만, 이민철이 모친상을 당하자...고약하게도 나는 그 기회를 빌어...사부를 같이 떠나보냈소. 홍모鴻毛(기러기털)처럼 가볍게."


등을 맞댄 지아비의 음성은 공허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한숨이 스민 것만 같았다. 자신이 눈물은 감추고 허물은 들추어 좋다는 지아비의 말을, 어쩐지 진홍은 알 것 같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지아비도 자신의 허물을 토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홍모라니요. 전하께서 최석정에게 보여주신 의리는 태산과도 같았사옵니다."

"태산이 움직이는 것 보았소? 태산이 흔들리는 것 보았소?"

"..."

"나는...두렵소. 사부를 내손으로 문외출송 시킨 그 순간...미안하고, 불안하고, 편안하고...이런 기분들이 다 뒤섞였소. 할 만큼 했다는 만족감, 내 힘이 이것 뿐이라는 자조감, 내 사람을 얼마나 더 잃어야 할까 하는 열패감, 이러다 내 어미마저, 내 아내마저 지키지 못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


숙종의 음성이 허공에 흩어졌다. 진홍은 가만히 뒤돌아서 그림자에 비친 지아비의 그림자 손가락을 찾아 손끝으로 더듬었다. 지아비의 손가락에 종잇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손가락이 맞닿았다.


"전하, 무엇이든 사람사이는 서로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중궁?"

"전하만 어마마마와 신첩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마마마와 신첩도 전하를 지키옵니다. 그런 것이옵니다."


진홍의 음성은 담담하고, 또 당당했다. 최석정은 결국 서인의 편에 서서, 왕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황극의 법이 허물어진 남인천하 세상에서, 서인들을 진입시키는 것이 황극의 법을 되살리는 일이라 해도, 방법이 옳지 않았다. 최석정은 잘못한 것이 아니지만, 잘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진홍은 자신이 똑바로 서는 것이 왕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다.


물론 스스로 대단히 의리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는 지아비의 존재처럼, 자신 역시 언제 막다른 골목에서 홍모처럼 가벼운 자신을 맞닥뜨릴까 두렵기도 하였다. 그래도 아직은 자신이 제자리를 지킨다면, 지아비도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맙소."


한결 죄책감이 가벼워진 지아비의 음성을 들으면서, 진홍의 신경은 갑작스런 고양이 울음에 분산되었다. 왜 하필 고양이 울음이 자꾸 아기 울음처럼 그녀의 고막을 간지럽히는 건지, 왜 이리 심장을 물 먹은 백짓장처럼 후들후들거리게 하는 건지.


"다시 기운을 내어 대신들과 붙어봐야겠소. 최석정, 윤헌, 모조리 풀어주라 해볼까나."

"네에? 그럼 더 난리가 날 텐데요. "

"뭐, 십육계에 스무개를 더하여 삼십육계 좀 채워보지 뭐."

"전하, 신하들과 그리 싸우시다가는 옥체가 축나실..."

"그 전에 이만 문을 여시지? 얼굴이나 좀 봅시다."

"예."


한참을 그림자만 보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겨우 장지문을 여는 그 순간, 나지막한 헛기침 소리가 진홍의 신경을 건드렸다. 지아비가 또 기침을 하는가 싶어서, 놀라서 돌아보려는데, 얼핏 불그스름한 형체가 느껴졌다. 진홍은 힘칫 놀라 대청마루 쪽에 시선을 두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어의 백광현이 대청마루 앞에 침반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진홍의 두눈에 들어왔다. 감히 왕과 왕비의 대화를 엿들어 놓고서도, 백광현은 오히려 엿들은 보람이 있다는 듯 너무도 해맑게, 또 흐뭇하게 벙실거리는 참이었다.


"중전마마께서 어인..."

"백어의가 왔으니 되었소."


진홍은 황망히 대청을 가로질러 서온돌로 걸음을 내딛었다.


"중궁!"


열린 문사이로 숙종이 손을 뻗었지만, 진홍의 연옥빛 치맛자락만 손샅을 미끄러질 뿐이었다.


백광현은 그 모습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쿡쿡 웃다가 자신을 노려보는 왕의 매서운 눈초리에 움찔했다.


"여긴 왜 왔소?"

"전하께서 기침을 하시어..."

"조금만 늦게 오지."

"허면 일각 후에 다시..."

"되었소.그냥 올라오시오."

"예 전하."


백광현은 대청마루로 올라서며 얼핏 섬돌에 비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을 보았다.


응?


고개를 뒤로 젖혀서 그는 통명전 지붕을 올려다 보았다. 어두컴컴한 밤중이라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용마루도 없는 통명전 지붕 위에 마치 치마 솔기처럼 불거진 귀마루에 놓인 잡상과 취두, 용두 사이로 웬 시꺼먼 고양이 한마리가 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지켜보는 참이었다.


니앵니앵!


울음소리 한번 애기울음 같다고 느끼고 그는 별 생각 없이 두광의 손짓을 따라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광현마저 동온돌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귀마루의 잡상 틈새로 앉았던 고양이는 다른쪽 귀마루로 훌쩍 뛰더니, 이내 뒤편으로 달려들었다. 통명전 뒤쪽에서 묘생猫生이란 별명을 가진, 고양이 사육담당 내관이 누가 볼세라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살점이 살짝 남은 생선등뼈를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검은고양이가 냅다 묘생에게 달려와서 그 검은 목화를 축축하게 핥았다. 묘생은 자신이 며칠 앓았다고 그새 통제불능이 되어버린 고양이들, 특히 눈앞의 검은 고양이가 원망스러운지 눈을 흘기면서 툭툭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그런 묘생의 앞으로 환도를 찬 사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고양이의 올록볼록한 등줄기를 쓰다듬던 묘생의 손가락끝이 굳었다. 묘생은 동작을 멈춘 채로 눈알을 굴리고선 너스레를 떨었다.


"아 이놈들이...여긴 오지 말라니깐...통명전에 쥐가 있나..."

"쥐를 잡으라고 키우는 고양이, 제대로 간수 못하면 사람을 잡아야지."

"..."


밤공기 만큼이나 짙고 스산한 음성이었다. 그림자 만큼이나 허공에 흔들리는 음성이었다. 묘생이 의아히 힐끔거리는 순간 시뻘건 칼끝이 그 목줄기에 닿았다.


"누가 시켰나?"

"..."


공포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묘생의 눈에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신출귀몰한 홍길동이라도 되는지, 어느 틈에 금군 하나가 자신의 목에 칼날을 세우고 쏘아보는 참이었다.


"누가, 시켰냐고."

"시, 시키다뇨?"


불안감에 콧구멍이 벌렁거려선지, 묘생의 코밑에 유난히도 길게 뻗은 수염도 따라서 덜렁거렸다. 두눈을 내리뜨고 보니, 이미 누구의 어디를 베고 왔는지 시뻘건 피가 묻은 칼날을 따라 자신의 붉은 피가 한방울 두방울 또르르 흘러내려서 합쳐졌다.


"피, 피..."


허후는 물끄러미 묘생을 내려다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눈밑에는 유난히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채였다.


어둠 속에서도 묘생의 어깨너머로 하필이면 통명전 뒤편 언덕 오래된 느릅나무 뒤로 붉은 옷자락이 나풀거리는 것이 보였다.


"대감..."

"역시 자네 눈썰미는 피할 수가 없구먼."


서후행이 두팔을 활짝 벌리고 훌쩍 뛰어내렸다. 흡사 독수리가 노렸던 먹이를 포획할 기세로 더욱 한껏 벌린 채로 다가왔다.


잔뜩 쫄아있던 묘생이 두눈을 반짝였다. 어느덧 자신의 목줄기를 파고 들던 날선 칼날이 피를 살짝 머금은 채로 떨어져나갔다. 챙강 소리와 함께.


"안 그래도 찾던 참인데 잘 되었군요."

"나를?"


되묻는 서후행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묘생의 발치로 떨어진 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칼은..?"

"나으리께서 대감께 빌려드리라 하셨습니다. 피 묻은 칼이라도 좋다면야."

"..."


피묻은 칼이라...서후행이 두눈을 번들거리며, 묘생에게 어서 가라고 눈짓했다. 묘생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섞인 한숨을 소리죽여 흘러내었다. 눈치가 빤했다. 이들은 한통속이었다. 당장 이 금군을 보고 누런 이를 드러내고 사악하게 웃는 서후행만 봐도.


묘생이 검은 고양이를 끌어안고 내빼버리자, 서후행은 연못 뒤 으슥한 구석으로 향하였다. 서온돌 장지문에서 환히 새어나오는 불빛이 오히려 불편한지, 그는 최대한 어두운 구석에 자리를 잡고 허후를 힐끗 돌아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자네는 우리 사돈 아들이랑 이름이 같아. 그래서 더 관심이 간다 했지."

"그 관심, 사양한다고도 말씀드렸을텐데요."

"이거 왜 이러시나. 내 덕분에 중궁과 그쪽 형님의 일을 알았으면 됐지...뭐 더 알고 싶은 건 없나?"

"..."

"있을텐데?"

"고양이."


허후가 침묵을 깨고, 묘생의 품에 안겨 저만치 멀어지는 고양이를 차가운 눈짓으로 가리켰다. 서후행은 피식 웃으면서 칼에 묻은 핏물을 응시했다. 조금만 더 힘이 들어갔으면 묘생 놈은 싸늘한 송장이 되어 누워있을 것을.


"아...옛날에 언젠가 내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고양이 좀 치워달라며 말씀하셨지. 고양이 울음은, 아기를 잃은 어미의 귀엔 아기울음처럼 들리는 법이라고. 그건 남자들만 모른다고. "

"..."

"헌데 내 아비는 나까지 갖다버리셨지. 이 넓은 대궐에."


옛일을 회고하며 서후행의 눈빛이 시드는가 싶더니 이내 잔인한 생기가 감돌았다. 그는 흘끔흘끔 집요하게 허후의 침울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

"왜...이러십니까?"

"그냥."

"예? 그냥요?"

"아까까진 그냥 장난이었는데 말이야. 자네 얼굴을 보니 이제 제대로 해야겠으이."

"장난? 그 나이에 장난?"


허후는 기가 막혀서 비웃었다. 궐안에서 반백년을 지낸 그 세월이 고스란히 패인 주름투성이 얼굴로 장난이란 말을 일삼다니. 하지만 허후 자신을 보는 서후행의 눈초리는 그야말로 심심한 아이가 팽이를 보듯 순수했다. 서후행은 뒷짐을 지고서 허후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원래 사람은 늙을 수록 어려지는 법이지. 순수하게 애가 된다, 이 말씀이야."

"..."

"애란 말이지...고양이를 잡아다가 다리도 비틀면서 그 울음소리를 즐기고. 간난아기 숨구멍도 몰래 막아보고. 임신한 계집에게 차디찬 얼음물을 먹이고는 손뼉치며 웃는 법이지."

"..."


서후행은 허후의 등뒤에 바짝 달라붙어 그 귓등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다 장난이라고."

"..."


귓등에 미끄러지는 음성에 허후는 온몸에 오싹하니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 자가...여태 중궁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여인의 살을 후벼파고, 소금을 뿌린 건지. 사람이 얼마나 사악하면.


서후행은 허후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움찔했다. 컴컴한 밤중이지만 서온돌에서 장지문을 통해 비치는 불빛 덕택에 보고야 말았다. 의혹과 분노로 들끓어오르는 그 눈빛을.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그냥 간만 보려던 건데, 언젠가 자네 춘부장께서 그러더군. 만에 하나, 자네가 칼에 사람의 피를 묻혀 찾아오는 날엔, 함께 중궁을 아예 지우자고 ."

"..."


허후는 멍하니 손안의 칼을 내려다 보았다. 칼에 묻은 피...이게 둘의 신호라니...궐안에서, 또 조정에서 반백년을 묵은 두 능구렁이들이 뭉쳤다니.


"헌데, 그 피...누구 핀가? 사람 피 같은데? 냄새가 말야..."

"..."


피묻은 칼을 내려다보며 피맛을 본 독사처럼 혀를 낼름거리는 서후행이 허후에겐 너무도 끔찍했다. 그의 온몸에서 사늘한 비린내가 풍겨왔다. 차라리 잠시 숨을 멈추고 싶을 만큼. 하지만 보이지 않는 아비의 후끈한 누린내는...숨을 멈출 수도 없었다.


작가의말

1. 허견은 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봐도 화려합니다. 단순히 처녀가 아니라 유부녀를 납치하여 사달을 일으키는가 하면, 자기에겐 처형 되는 청풍부원군의 첩, 즉 대비의 서모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하고, 나라의 소나무를 제멋대로 베어다가 집을 짓고...또한 중궁을 밀어내겠다고 모의를 한 정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사 외의 기록으론 중궁 역시 허견의 온갖 비행을 숙종에게 전하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 허견에게도 조금은 아픔이 있는 걸로 설정을 해두었습니다.

 

2. 제 소설속 서후행은 중궁의 고난에 관여한 악의 축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록에는 숙빈최씨의 자부인 서진의 숙부이면서, 그저 당상관들에게도 술대접을 받고 만취해서 입궐할 정도의 실력자로 남인과 결탁하여 온갖 일을 꾸민 걸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상상 속에선 너무 무시무시한 악역이 되어서...이래도 되나...싶기도 합니다. 물론 서후행에도 남다른 사정은 투입해 두었습니다만.

 

3. 악역투표를 해보았더니 송시열이 1위, 숙종이 2위, 서후행과 대비김씨가 공동 3위? 대충 그런 반응이 나오더군요. 김석주가 0명인 걸 보고 반성했습니다. 제 후발주자입...

 

4. 실록엔 숙종이 종종 궐에서 고양이를 보았다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발언에 상상을 더해서, 아기 잃은 중궁을 괴롭히는 용도로 에피를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0.30 20:04
    No. 1

    고양이의 출현으로 궁궐 안이 더 스산해지는 기분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30 23:22
    No. 2

    음...그렇게 되었나요? ^^; 고양이는 특별출연인 걸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0.30 21:36
    No. 3

    헉... 악역투표를 언제 하신겁니까 ㅠㅠ
    자주 들어와서 이리저리 둘러봐야 하는데, 선작 목록만 지켜보니 이런 폐혜가 있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30 23:23
    No. 4

    옆동네에서 악역투표한 겁니다. 문피아엔 설문조사 시스템이 없어서...그냥 공지로 물어봐야 하나...하다가 보류한 것이구요. 여기서도 악역투표 하면 숙종이 표 좀 나올 듯...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0.31 13:31
    No. 5

    숙종이 2위......이번 작품에선 중궁이 살아있을 때라서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니 아쉽네요. 전 숙종이 더 스펙터클한 악역 포스 풀풀 풍기면 흥미진진할 것 같아요. 해의 그림자에서는 너무 불쌍하기만 해서......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06 16:24
    No. 6

    그쵸. 속편에선 좀더 악역 포쓰를 발휘할 듯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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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해의 그림자 198 +5 14.07.31 1,858 41 43쪽
198 해의 그림자 197 +3 14.07.21 1,789 41 41쪽
197 해의 그림자 196 +7 14.07.15 1,851 34 42쪽
196 해의 그림자 195 +3 14.07.11 2,020 32 41쪽
195 해의 그림자 194 +3 14.07.06 1,947 34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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